#61
“혹시 거기 수건 있어요?”
동하의 기분을 알 리 없는 사희가 그를 향해 다가오면 물었다.
넋이 빠진 것처럼 사희를 보고 있던 동하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이내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흠, 하고 헛기침을 한다.
“아, 잠시만. 가져다줄게요.”
“아니에요, 그냥 내가 나갈게요.”
사희는 사다리를 잡고서 한달음에 밖으로 튀어나온다. 촤악, 옷이 머금고 있던 물기가 바닥으로 쏟아진다. 이제는 가슴과 허리뿐만 아니라, 둥근 골반의 곡선과 긴 다리의 실루엣까지 가감 없이 드러났다.
‘돌겠네.’
동하는 난처한 일을 겪는 사람처럼 슬쩍 미간을 긁는다. 입이 타서 아랫입술을 슬쩍 핥는다. 입에서 저도 모르게 더운 한숨이 났다.
동하는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다 감기 걸려요.”
“강제로 물에 빠트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사희가 입술을 모아 새 부리처럼 뾰족하게 내밀었다. 둥글게 오므라든 입술이 꽃봉오리같이 요염하다. 동하는 슬쩍 눈꺼풀을 내리깔며 재킷을 벗는다. 그리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래, 안 그래도 후회하는 중이야.”
“……네?”
미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남자의 재킷이 사희의 젖은 몸을 덮었다. 재킷에서는 나무향기가 섞인 남자의 향긋한 체취가 느껴졌다.
“이거 비싼 옷이잖아요. 이러다 망가져요.”
깜짝 놀란 사희가 재킷을 벗으려 했지만, 동하의 손에 금세 저지되었다.
동하는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것으로 사희 몸의 물기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당신이 감기에 걸리는 것보다는 나아.”
“…….”
재킷을 벗으려던 사희의 손이 머뭇한다.
이 남자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기를 쓰고 외면할수록 되레 더 강한 이끌림으로 다가오는 사람. 그러나 결코 상대의 뜻을 넘어서 침범하지는 않는 사람. 아무리 멀어지려 해도 멀어지지 않고, 미워하려 해도 미워지지 않는 사람이다. 이동하라는 남자는.
더는 그를 밀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신이 더 이상 그를 밀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여러 가지 생각으로 흐려진 사희의 눈이, 손으론 열심히 물기를 닦아주면서도 눈은 여전히 그녀를 향해 고정하고 있는 동하의 눈과 마주친다. 자칫 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 사희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남자는 사희가 시선을 피하면, 어김없이 피하는 그쪽을 향해 고개를 기울여 기어이 눈을 맞췄다. 그 노골적인 눈빛에 사희의 몸은 더운 김을 쐰 것처럼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왜 자꾸 봐요……, 민망하게.”
사희는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찌푸린다.
동하는 입술을 당겨 싱긋 웃으며 소매로 사희의 눈가를 닦아준다.
“닦았는데도 촉촉해, 눈가가. 확실히 감동한 것 같은데?”
“장난치지 말아요.”
사희는 능청스럽게 장난치는 등하의 가슴을 쑥스러운 듯 조금 밀어냈다.
“이번엔 부인하지 않네요?”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본부장님은 본인이 믿고 싶은 대로 믿을 거잖아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사희는 체념한 듯 투덜거린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자, 그럼 이쯤에서 한 번 더 물을까?”
“또 뭘요?”
“어때요? 이렇게 세심하고 다정한 상사와 같이 일 해보는 건?”
“하, 진짜 대단하다. 지치지도 않아요?”
“전혀. 조금도. 앞으로 만 번도 더 물을 수 있어.”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동하는 재킷 앞섶을 단단히 여며준다. 사희의 몸을 다 덮고도 남는 재킷 자락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그는 문득 뭔가가 신경이 쓰인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곤 약간 망설이는 말투로 사희에게 묻는다.
“저기, 그런데…….”
“……?”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런 것도 촌스러운 건가?”
“네?”
“여자한테 재킷 벗어주는 거, 혹시 속으로 촌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사희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 동하는 얼른 발뺌을 한다. 그리곤 묻지도 않았는데 다급하게 변명을 꺼냈다.
“오해 말아요. 내가 뭘 노리고 한 건 아니니까. 그저 강사님 추울까 봐 그런 것뿐입니다.”
놀랍다는 듯, 사희의 눈이 커진다. 늘 냉정하고, 여유롭고, 가끔은 얄미울 정도로 저를 놀려먹던 그가 내심 심각하게 저의 반응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게 몹시 다감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촌스럽나?”
동하는 대답 없이 저를 보기만 하는 사희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다시 물었다.
사희의 광대뼈가 파도처럼 남실남실 들썩이더니 머잖아 풉, 웃음이 터졌다. 말아 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최선을 다해 참아보려 했지만, 웃음은 기어이 입술 밖으로 삐져나왔다. 크크큭, 비강을 지난 거친 웃음소리가 와르르 쏟아진다.
“그 말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어요?”
동하는 조금 언짢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신경 썼다고 한 적 없어요. 그냥 혹시 오해했을까 싶어서 물어보는 거지.”
부인하는 남자의 귓바퀴가 붉다. 그걸 보는 사희의 뺨에 살포시 보조개가 팬다. 사희는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다정한 눈빛으로 동하를 보았다.
“몰랐는데, 본부장님. 은근 귀여운 면이 있으시네요.”
“귀엽다니!”
동하는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몹시 당황했는지 귓불이 불에 덴 것처럼 붉어지고, 목 언저리 피돌기가 갓 잡은 물고기처럼 울근불근 펄떡였다.
남자는 최선을 다 해 엄하고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 같았으나, 사희의 눈에는 그마저도 귀엽게 느껴졌다. 산만한 덩치를 한 남자가, 귓불을 붉히고서 어른인 체하고 있는 모습이 되레 철부지 아이 같다. 어렵기만 했던 남자가 훌쩍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사랑스러워.
짜릿한 느낌이 몸을 감싼다. 단단한 목을 끌어다 숨이 막힐 때까지 꽉 안고 싶다는 짓궂은 욕구가 피어나는 것을 누르느라 주먹을 꽉 쥐어야 했을 정도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뭐 좀 구식이긴 하지만, 성의는 충분히 고마우니까.”
“신경 안 썼다니까.”
“뭐, 난 좋던데……. 좀 촌스러운 남자.”
사희의 옷깃을 여며주던 동하의 손이 멈칫한다.
“뭐?”
동하의 눈이 보기 드물게 커져 있었다. 둥그렇게 뜬 눈이 무방비할 정도로 순진해 보였다.
“뭐라고 했어요, 지금?”
동하가 다급히 다시 물었다.
“들어놓고 왜 못 들은 척해요? 하여튼 진짜 촌스러워.”
새침하게 쏘아붙인 사희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동하를 지나쳤다. 얼이 빠진 동하를 등지고 앞서 걸어가는 여자의 붉은 입술이 초승달처럼 생긋 웃고 있었다.
***
경민은 재민의 방 앞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살짝 밀어 안으로 몸을 들이기만 하면 될 일인데 그렇게 하기가 도무지 쉽지 않았다. 영 어색하고 쑥스럽게만 느껴졌다.
노크를 해야 하나. 아니면 이름을 불러야 하나. 한참을 주춤거리다 경민은 결국 손끝으로 아이의 방문을 살짝 밀었다. 열린 문틈으로 하얀색과 연한 하늘색으로 꾸며진 아이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민은 슬그머니 안으로 몸을 들였다. 문에서 오른쪽으로 비껴선 자리에 책상과 책장이 있고 반쯤 분리되어 독립된 공간에 침실이 있는 구조의 커다란 방이었다.
문을 열었어도 돌아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정면으로 책장과 책상이 있었으나, 재민의 책상은 비어있다.
경민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한 바퀴를 크게 둘러본다. 아이가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방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인 자기가 느끼기에도 넓은 이 공간이 어린아이에게는 얼마나 크게 느껴질까.
어릴 때, 그도 이만큼이나 큰 방을 썼다. 머리가 크기 전까지는 종종 그 방에서 홀로 잠드는 것이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 창피한 이야기다.
씁쓸한 듯 웃으며 방 안을 둘러보던 경민은 작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선가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침실 쪽을 기웃, 드레스 룸 쪽도 기웃하며 방을 둘러본다. 어느 곳에도 재민은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방을 나서려던 경민이, 문득 무릎을 굽혀 앉아 책상 밑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그리고 동시에 슬쩍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재민이 그곳에 있었다.
“뭐하니, 거기서?”
“…….”
재민은 대답이 없다. 재민이 말문을 닫은 지는 좀 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한다는 것뿐. 어쩌면 그게 더 나쁠 수도 있고. 어쨌든 혜석그룹의 유일한 손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집안에도, 그리고 이 아이에게도 큰 비극이다.
“잠깐 나와 봐.”
“…….”
“좀 나와 보라니까…….”
급한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욱하고 올라오는 말을 뱉어내려다 경민은 황급히 입을 뚝 다문다. 이러려고 새삼스럽게 이 방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잠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던 경민은 곧 애초의 목적을 기억해 내고, 주춤주춤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두었던 것을 꺼냈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콘솔게임기였다.
“너, 이런 거 좋아해?”
멋도, 정도 없는 투박한 말투였다.
재민의 시선이 게임기에 닿는다. 아이는 게임기를 한번, 제 아빠를 한번 번갈아 보더니 곧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쌍수를 들어 환영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았어도, 그래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영 무심하기만 했다. 경민은 조금 무안해졌다.
“아이씨, 고 실장 새끼. 좋아할 거라더니…….”
경민이 엄한 고 비서 탓을 하며 혼잣말로 투덜거린다.
“싫으면 말던가.”
경민은 무안함을 달래려는 듯, 괜히 퉁퉁거리며 다시 게임기를 뒤춤에 꽂았다. 그리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굳이 “간다.”라는 말을 덧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포기하고 가려는 듯하던 경민이 갑자기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다시 몸을 숙였다. 그리곤 두 팔로 재민의 팔을 잡아 책상 밖으로 끌어냈다.
“나와, 그 구석에 처박혀서 뭐하고 있는 거야.”
갑자기 팔을 붙들려 놀란 경민이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으으으으으.”
앙다문 입술 새로 이상한 신음이 흘렀다.
그때 끌려 나오던 재민의 품에서 무언가 툭 하고 굴러떨어졌다. 작은 플라스틱 통에 번쩍거리는 것이 담긴 정체불명의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