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붐비는 도심 도로를 따라 느리게 달리던 자동차는 외곽순환도로로 빠져나가자 비로소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계기판의 숫자가 120Km/h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차 안은 소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눈이 어릿할 만큼 빨리 지나간다.
동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울었는지 충분히 물어봄직한 질문들이었지만 그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 사희가 울음을 그치고 진정이 될 때까지 그가 한 말이라곤 “괜찮아.”와 “바람 좀 쐴까.”뿐이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오래도록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사희가 동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고민 중입니다. 좋아할 만한 곳이 어딘지.”
“집에 갈래요. 지금은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아요.”
사희가 조금 피곤한 목소리로 시들하게 대꾸했다. 동하가 시무룩한 사희를 힐끔 돌아본다.
“집에 가서 할 일 있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좀 놉시다, 나랑. 내가 심심해서 그래요.”
동하는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사희도 더 이상은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녀가 할 일이란 뻔했다. 온갖 생각과 또 생각들. 오늘 밤은 그런 망상의 파도에 하염없이 휩쓸려 다니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를 지나 교차로에서 우회전해서 꺾어 들어가니 웅장한 철제 구조물로 울타리를 친 교각이 나왔다. P호수 부근. 얼핏 이 근처에 분위기 좋은 커피숍이나, 식당들이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각광을 받는다는 소리를 들은 게 생각이 난다.
사희는 시시하다는 듯 픽, 웃었다.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 게 여기예요?”
“별로인가?”
“본부장님, 은근히 촌스러운 취향이시네요.”
사희의 맹랑한 대답을 들은 동하가 하핫, 유독 크고 즐거운 웃음소리를 냈다. 이동하 특유의 부드러운 눈웃음까지 가미되어 있었다. 그의 시원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예민하게 솟아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좀 기다려 봐요. 분명 좋아할 거니까.”
“왜 그렇게 장담해요?”
사희는 일부러 뾰로통한 척을 하며 새침하게 어깃장을 놓는다. 퉁명스럽게 말하지만 그녀의 입술에는 이미 미소 한 자락이 걸려 있었다.
부드럽게 액셀러레이터를 눌러 밟은 동하가 사희를 살짝 돌아보며 빙그레 웃는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거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커피숍도 아니고, 식당도 아닌 회양목이 둘러쳐진 집이었다. 가느다란 철제문 너머로 하얀색 2층 건물이 얼핏 보였다. 두 사람이 탄 차는 마치 새로운 세계로 통과해 들어가는 것처럼 미끄러지듯 정원으로 들어섰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정원 한구석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사희는 제 자리에서 주변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본다. 색이 짙어지기 시작한 나무들이 밤바람에 가볍게 흔들린다. 간간이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 아늑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시선 닿는 곳마다 근사하지 않은 곳이 없는 저택을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살펴본 사희가 감탄한 표정으로 묻는다.
“빌렸어요. 머리 아플 때 와서 쉬면 좋을 것 같아서.”
사희의 입이 떡하고 벌어진다. 두통약 한 알이면 해소될 통증을 치유하기 위해 이렇게 큰집을 빌릴 정도의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게 새삼스럽게 피부에 와 닿는다.
잠시 잊을 뻔했다. 이 남자가 혜석그룹의 사람이라는 것을. 혜석그룹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다시금 스멀스멀 솟아나자, 그의 친절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와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거리가 다시금 훌쩍 멀어졌다.
“금수저는 다르네요. 좋겠어요. 순도 99.99% 혜석그룹 금수저라서.”
사희가 입술을 삐죽이며 퉁퉁거리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던 동하가 돌연 피식 웃는다.
“순도 99.99%?”
“왜요? 조금 빠져서 아쉬우세요?”
“당신 눈에는 혜석그룹 금수저로 사는 게 좋아 보여요?”
“그럼 나빠요?”
“글쎄. 좋아 보인다니 그냥 좋은 걸로 칩시다.”
동하는 일부러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골라 하며 트집을 잡으려는 사희에게 말려들지 않고, 얄밉게도 수월하게 빠져나갔다.
“날 왜 여기 데려왔어요? 금수저의 삶, 자랑하고 싶어서?”
“자랑?”
동하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코웃음을 친다.
“그래요, 자랑. 본부장님 보람 있게, 이제 제가 위화감 느껴 드리면 되는 건가요?”
“삐딱하게 굴 거 없어요. 그런다고 해서 내 삶이 갑자기 평범해질 일도 없을뿐더러, 이사희 씨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잖아.”
동하가 사희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냥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었어. 그뿐이야.”
동하는 손을 뻗어, 가방끈을 단단히 말아 쥐고 있는 사희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깍지를 낀 남자의 손가락이 올무처럼 조여든다.
동하의 손에 이끌려서 돌길을 따라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머잖은 곳에서 사희는 그녀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만날 수 있었다.
20미터 길이의 야외 풀이었다. 아이보리빛 조명이 밝은 수영장은 마치 우주에 뜬 은하수 같다. 풀을 보자 사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하게 빛난다. 동하는 미처 다물지 못한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사희의 턱에 손끝을 살짝 얹어 입을 다물려주며 빙긋 웃는다.
“어서 가 봐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처럼 달려간 사희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만히 물에 손을 담갔다. 초여름이 다가오고 있는 날씨에 적당한 수온이었다.
“보기만 하지 말고, 들어가 보지 그래요?”
“아녜요. 지금은 갈아입을 옷도 없고…….”
“아쉽네. 좀 즐겼으면 했는데.”
“괜찮아요. 이렇게 손만 담그고 있어도…… 꺄!”
아이처럼 물 표면을 휘휘 젓고 있던 사희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물 밑으로 깊게 가라앉았다가 반사적으로 번쩍 솟아오른 사희가 해초처럼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푸, 하고 물을 뱉는다.
“다 젖었잖아요!”
사희가 물 밖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동하를 노려보며 씨근덕거린다.
“다 젖었으니 더 고민할 것도 없네. 이제 좀 즐겨 봐요.”
동하는 태닝베드에 걸터앉으며 씩씩거리는 사희를 향해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 진짜!”
사희는 있는 힘을 다해 남자 쪽으로 물을 뿌렸다. 동하는 뺨에 튄 물기를 손등으로 닦아내곤,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여 앉았다. 자세 때문에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 자락이 다부진 몸에 달라붙어 특유의 건장한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전에 내게 그랬잖아요. 내가 노바의 주인이 되면 수영장 한 레인만 달라고. 기억합니까?”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던 사희의 손이 멈칫한다. 물기를 털어내는 척하며 대답을 피했지만, 사희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흘리듯 했던 약속이었는데, 이동하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깍지 끼워 모은 손을 입술 언저리에 붙이고, 물에 젖은 사희를 잠시 바라보던 동하가 입을 열었다.
“그걸 해주고 싶었어요. 내겐 이런 게 진짜 보람입니다.”
사희는 젖은 얼굴을 살짝 돌려 동하를 보았다. 따스한 조명 빛깔 때문인지 샤프한 이목구비가 한결 부드러워 보인다. 빼죽하게 가시 돋았던 마음이 어느새 둥글어졌다.
한결 누그러든 사희의 눈을 본 동하는 빙긋 웃었다. 눈꺼풀이 너울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혹시 감동했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는데?”
남자는 곧 짓궂게 입술을 올리며 묻는다.
“방금 물에서 나와서 그런 거예요!”
사희는 붉어진 낯을 숨기기 위해 몸을 기울여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불편하게 달라붙었던 셔츠가 인어의 지느러미처럼 나풀거린다. 허리를 유려하게 움직일수록 몸은 물의 저항을 이겨내고 부드럽게 잠영해 나아간다.
동하는 흐르듯 유영하는 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빳빳했던 몸을 풀고 자유롭게 물을 가르는 모습을 보니 비로소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저 그녀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자연스레 그녀에게 더 많은 것들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뒤따랐다.
이 마음은 무엇인가.
그 안에서 무언가 모습을 바꾸었다. 미묘하지만 확실하게.
그녀에게 품었던 감정들을 더듬어본다. 처음은 호기심이었다. 연민이었고, 호감이었고, 기분 좋은 불편함이었다. 내가 마음을 보인 만큼, 그녀도 마음을 보여주면 하는 철저히 상대적인 감정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마음은 앞선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주고 싶은 마음뿐, 받는 것은 생각지 않는다. 어떠한 대가도 기대하지 않는, 한 사람을 향한 순수한 열망. 오직 그뿐이다.
이런 마음, 살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빗장을 걸어놓아도 담을 타고 넘어온 바람에 꽃이 움트듯, 어느 사이 마음의 계절이 바뀌었다. 가슴에 아련한 온기가 퍼져나간다.
오래도록 물속에 잠겨 있던 사희가 서서히 물 위로 떠올랐다. 하아, 하아. 관능적인 숨소리가 사희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다. 젖은 셔츠 자락이 몸에 달라붙어, 둥근 가슴과 잘록한 허리의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모난 데 없이 갸름한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물기가 꽃잎처럼 뾰족한 턱 끝에 고였다가, 비처럼 뚝뚝 떨어진다.
사희는 젖은 머리카락을 한데 묶어 손목에 걸어두었던 끈으로 동여맸다. 하얀 목덜미에 해초처럼 붙은 가느다란 잔 머리카락을 무심하게 손으로 스윽, 쓸어내리는 손길이 묘하게 야릇하다.
무심코 바라보고 있던 동하는 이내 슬쩍 이마를 찌푸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치 몸 어느 한구석이 조금 불편한 표정이었다. 입술 안쪽이 불을 삼킨 것처럼 뜨겁다 싶더니 곧 쿵쿵, 하고 심장이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