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부사장님 10분 후에 도착하신답니다.”
잡지를 넘기고 있던 세령의 손이 멈칫한다.
윤 여사와의 꽤 큰 갈등이 있었던 터라, 이번에는 경민의 반항이 꽤 오래 지속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이른 복귀였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그 뒤로 경민이 내연내의 집에도 발걸음 하지 않고, 시시껄렁한 패거리들과 모여 갖는 모임에도 전혀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말 이경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난 몇 주간, 경민은 조용했다. 성실하게 출근을 하고, 퇴근하면 즉시 호텔로 돌아갔다. 이경민과의 7년의 결혼생활 가운데, 근래만큼 세령의 휴대전화가 조용했던 적이 없었다. 경민이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보고되는 사진도 없어진 것이다.
평화롭지만, 평화로운 만큼 불안하기도 했다.
도대체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긴 거지?
세령은 불길한 마음을 애써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세령은 막 현관으로 들어선 경민과 눈이 마주쳤다. 경민의 표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아 보였다. 항상 예민하게 구겨져 있던 미간도 반반했고, 늘 세령을 향해 이죽거릴 준비가 되어있던 입술도 오늘은 잠잠해 보였다. 어쩐지 그가 조금 웃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예민하게 솟아있는 표정이 평화로울 때, 경민의 윗입술은 마치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듯 양 끝이 살짝 솟아있다. 그 입술이 가장 이경민다운 부분이다. 어딘가 모르게 동하와 조금씩은 닮아있는 경민의 얼굴에서, 오직 그 입술만큼은 독보적으로 이경민의 색채가 묻어있다. 물론 기분이 좋을 때나 드물게 드러나는 표정이기에 잘 볼 수는 없지만.
경민의 입술에 저도 모르게 몇 초간 시선을 빼앗겼던 세령은, 빤하게 저를 보고 있는 경민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왔어요.”
“응.”
짧게 대답한 경민은 넥타이와 재킷을 벗어 가정부에게 건네며 천천히 집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조금 야윈 것 같다.
“식사 준비해요.”
세령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가정부에게 넌지시 지시했다.
“됐어, 생각 없어.”
“조금이라도 들어요. 원하는 거 있음 만들라고 할게요.”
경민이 걸음을 멈추고 세령을 돌아본다. 세령도 그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경민은 미묘한 시선으로 세령을 보다가, 입술 끝을 살짝 당겨 조금 웃는다.
“네가 만들면 먹고.”
“……?”
세령의 눈이 커진다.
“싫음 말고.”
경민이 돌아선다.
“뭐……가 필요한데요……?”
세령은 짐짓 경민을 외면한 채로 물었다. 돌아서려던 경민이 다시 세령을 돌아본다.
“라면.”
“네?”
세령이 놀란 얼굴을 들었다.
“전에…… 너네 집에서 먹었던 라면.”
“…….”
“그때 그거, 해 줄 수 있나?”
경민이 말하는 것은 언젠가 세령의 자취집에서 끓여 먹었던 그 라면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
때는 7년 전, 경민이 매일 같이 세령의 학교와 집을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페이스페인팅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참가했던 기업행사 자리에서, 세령은 우연히 경민을 다시 만났다. 고등학교 때 보고 처음이니 근 8년 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청소년보호센터에 잠시 머물러 있게 되었을 때, 세령은 그곳에 봉사활동을 왔던 경민과 동하 형제를 처음 보았다. 그곳은 혜석그룹 산하의 장학재단에서 운영하는 청소년보호센터였고, 그들은 혜석그룹의 아들들이었다.
열여덟, 봄이었다.
그때부터 그들과 인연이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때만 해도 그들과 세령은 어떤 교집합으로도 묶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쌍둥이 형제 중 하나인 이동하를 대학에 와 다시 만났다. 자매결연 한 학교 간 교류 활동에서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인연이 이어진 것은 아니었어도, 얼굴이 익은 사이에는 인연이 싹트기 쉬운 법. 학교 간 교류 활동이 종료된 시점에, 두 사람은 이미 연인이 되어있었다.
동하를 통해서, 쌍둥이 형인 이경민이 해외 유학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경민은 유학을 떠났고, 동하는 본가를 나와 독립했다. 쌍둥이 형제지만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그 이유는 한참 나중에야 동하에게 들어 알았다.
두 형제의 복잡한 관계상, 동하가 먼저 경민의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는 전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세령 역시도 경민을 없는 사람처럼 잊고 지냈는데, 8년 만에 우연히 그를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다.
동하와 경민의 관계상, 그리고 동하와 저의 관계상, 경민과의 재회는 처음부터 매우 껄끄러웠다. 그래서 세령은 저를 알아보고 반갑게 다가오는 경민을 피했다.
그게 이경민의 자존심을 자극했던 걸까. 아니면 왜 저를 피하냐는 그의 질문에, “동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 나, 동하 사랑해.”라고 했던 저의 대답이 문제였을까.
그 뒤로 경민은 무서울 정도로 세령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었다. 스물여섯, 이경민은 또래의 남자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원하는 것, 갖고 싶은 것을 한 번도 가지지 못한 적이 없는 남자였다. 그가 갖고 싶은 것에, 세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는 동하가 스타트업 기업 창업으로 정신없이 바쁠 때였다. 경민은 세령과 동하가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삶의 고뇌 속에서, 서로에게 잠시 소홀했던 사이를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매일같이 그녀를 찾아왔고, 거절할 틈도 없이 많은 것을 그녀의 품에 안겼다.
다른 것들은 모두 외면할 수 있었지만 끝내 그러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다.
돈이었다. 대학 조교로 푼푼한 돈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아빠에게 빚을 내어준 사람들이 세령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금액은 조교 월급과 아르바이트 비용을 모두 합해 보아도, 다달이 이자 정도나 겨우 갚을 수 있는 거액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이었다.
동하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알면 그가 저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상황에 처한 동하가 저의 불행까지 뒤집어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하에게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그게 다는 아니다. 정말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신의 바닥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자신의 바닥은, 돈 때문에 온 가족이 목숨을 버리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것, 그것이 끝이기를 바랐으니까.
“나한테 대체 원하는 게 뭐야?”
그날도 어김없이 저를 찾아온 경민에게 세령은 물었다. 그간 한 번도 그런 질문조차 하지 않았던 세령이 던진 질문에, 경민은 대답했다.
“나랑 밥 한 번만 먹어.”
“나 아르바이트 가야 돼. 한가롭게 밥이나 먹으러 갈 시간 없어.”
“딱 밥 한 번이야. 그것만 해주면, 네가 원하는 거 뭐든 해줄게.”
세령은 대꾸하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그녀에게서 또다시 거절이 돌아오자, 경민의 눈빛이 무섭게 이글거렸다.
그런데 앞서 걸어가던 세령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사먹는 밥 아니어도 괜찮으면 따라와.”
그날, 룸메이트와 둘이 살기엔 턱없이 좁은 다섯 평짜리 원룸에서 세령은 버너에 끓인 라면을 경민과 나누어 먹었다. 언제부터 냉동실에 박혀있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떡국 떡을 한 줌 넣은 퉁퉁 불은 라면이었다.
김치도 없이, 불은 라면을 후루룩 먹는 세령을 보며 경민이 물었다.
“이동하는 알아?”
젓가락질을 멈추고 세령이 경민을 본다.
“무슨 소리야?”
“너한테 빚 있다는 거. 이동하는 아냐고.”
세령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동하한테 말하면 죽을 줄 알아.”
“나는 알아도 상관없고? 나한테는 말할 거였잖아.”
“…….”
“너, 나랑 오늘 같이 밥 먹어준 거 돈 때문 아냐?”
세령은 제 자존심을 잘근잘근 짓밟는 경민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노려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줄게. 원하는 만큼. 얼마야?”
“됐어. 필요 없어.”
“그래. 네 입으로 금액을 말하기가 좀 그렇긴 하겠지. 차세령이 어디 보통 자존심인가?”
“……!”
“그럼 이건 어때? 내가 원할 때마다, 오늘처럼 이렇게 라면을 끓여줘. 그럼 그때마다 내가 알아서 해결해 줄게. 빚쟁이들이 다시는 널 찾아오지 않게 해주겠다는 뜻이야. 어때?”
흔들리는 세령의 눈빛을 또렷하게 바라보던 경민이 살짝 입술 끝을 당겨 웃는다. 볼가로 살짝 올라간 애교스러운 그의 입술이 어느 때 보다 기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경민은, 그날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세령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미소에 저에게 끝내 굴복한 자신을 비웃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세령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세령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경민의 표정이 조금 굳는다. 그의 입술 끝에 걸려있던 웃음이 흐려진다.
“됐어. 그만두자.”
쓴웃음을 끝으로 경민은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