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숨이 턱까지 찬다. 머리카락, 얼굴, 그리고 후드티셔츠 안까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다. 발목이 시큰거리고, 오금이 당겨왔다. 골반이 빠질 것처럼 뻐근하고, 다리가 돌처럼 무겁다.
그러나 사희는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뒤따라오는 공포가 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목 안쪽에서 피 맛이 느껴진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여겨졌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페인트칠이 벗겨진 아파트가 모습을 보였다. 목적지에 다다르니 비로소 조금 긴장이 풀렸다. 피로로 눈앞이 흐리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고 나서야 사희는 비로소 달리기를 멈췄다. 허벅지를 짚고, 허리를 깊게 숙인 채로 서서 숨을 헐떡인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우욱, 몸이 뒤틀리며 욕지기가 치민다. 식도가 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쓴물이 넘어온다. 알코올기가 날아간 맑은 소주가 끈적끈적한 타액에 섞여 왈칵 쏟아졌다. 콧속과 목구멍이 맵다.
“이사희 강사님?”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그림자가 곧 사희 앞으로 다가와 서더니,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희의 어깨를 잡았다. 가볍게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운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동하의 눈이 핏기가 없는 사희의 얼굴을 보자 이내 가늘고 깊게 좁아들었다.
“무슨 일이야?”
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태풍에 흔들리는 깃발이 깃대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것처럼, 그렇게 그의 목에 매달려 사희는 울었다.
“이사희…….”
당황한 동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온다. 사희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목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남자의 팔이 바들바들 떨리는 사희의 등을 감싸 안는다. 터질 것처럼 뛰고 있는 사희의 심장 박동이 그의 가슴 언저리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온몸이 온통 땀에 젖어있는데, 왜인지 여자의 몸은 얼음장처럼 찼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묻고 싶은 욕구가 다시금 치밀었지만, 동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조금 더 깊이 안아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었을 뿐이다.
“괜찮아. 괜찮아.”
온몸을 들썩이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며 아이처럼 우는 사희를 품에 안고, 남자는 가만가만 등을 토닥였다.
***
“호텔로 모실까요?”
고 비서가 묻는다. 경민은 대답 대신 어두워진 창밖 풍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윤재화 전무와의 긴 미팅 때문에 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유쾌하지 못한 대화였다.
“이동하 이사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윤재화의 입에서 나온 이동하의 이름에 경민은 즉시 기분이 상했다. 별 의미가 없는 것이겠지만 그 이름 뒤에 붙은 ‘이사’라는 직위 호칭이 영 마뜩잖다.
“이동하 이사?”
경민은 픽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윤재화 역시 그의 빈정거리는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결같은 톤으로 담담히 말을 잇는다.
“여론은 자연스럽게 주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거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게 못 되는 게 주주들 마음이야. 이런 때에 부사장이 행동을 바로 하지 않으면, 금시에 자격을 운운하며 딴죽 걸어올 거라고.”
“그래서. 나보고 그것들 눈치나 보면서 개처럼 바짝 엎드려 있으라는 겁니까?”
이죽거리는 경민의 얼굴을 잠시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윤재화는 이내, 한숨을 쉬며 살짝 눈을 내리깐다. 눈꺼풀과 치켜뜬 눈썹의 거리가 멀어진다. 그가 화를 참을 때 자주 짓는 표정이다. 그 표정을 지을 때면, 그는 화가 난 것 같다기 보다는 되레 몹시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윤재화는 4선 국회의원, 정치꾼의 아들답게 본심을 숨기고, 표정을 가리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러잖아도 회장님 물러나시고, 부사장이 시작한 사업들이 모두 부진한 성적을 내는 이런 때에, 그들에게 좋은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밉보일 행동은 말아야지.”
“외숙부, 말은 바로 하셔야죠. 그게 왜 내 사업입니까? 외숙부님 사업이지.”
“성과가 시들하니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호평을 받을 때에는 본인의 것인 양 어깨 으쓱하다가, 마뜩잖아지니 남에게 책임을 미루려 하는 건, 바람직한 경영인의 자세라고 볼 수 없지.”
“지금 나 가르칩니까?”
경민이 어금니로 볼 안쪽 연한 살을 씹으며 묻는다.
윤재화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내려놓는다.
“조언으로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윤 전무님 눈에는 내가 열 살짜리 애 같아요?”
그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지자, 내내 태연했던 윤재화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부사장입니다. 그렇게 애 다루듯 하지 마시고, 존중을 해주셔야죠. 개나 소나 다 무시한다고, 전무님까지 내게 그러셔야 되겠습니까?”
“오해를 하는 것 같구나.”
“오해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
“라고 하세요. 여기 회사입니다. 집 아니에요. 윤 전무님.”
경민은 빙그레 웃으며 의자 뒤쪽으로 몸을 깊게 뉘었다. 불룩 나온 윤재화의 심부 볼이 미세하게 떨린다.
근래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부딪히는 일이 잦다. 두 사람의 사이는 아주 좋다고도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쁘다고 하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감정 위에 올라있다. 경민이 종종 성질을 참지 못하고 뻗대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현재로서 그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을 찾는다면 그는 단연 윤재화 전무였다. 어쨌든 이경민을 지금 이 자리에 앉게 한 일등공신이 바로 그였으니까.
그러나 경민은 갈수록 제 목을 조여 오는 외숙부의 간섭이 못마땅해지고 있었다. 윤재화의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을 어머니의 흔적을 느껴서인지도 모르겠다. 힘이 없었던 시절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부사장이 된 지금까지 어머니의 뜻대로 좌지우지되는 삶을 살 의향은 없다.
지금까지 이경민의 삶이 어머니의 욕망에 의해 꾸려진 것이라면, 이제부터 그의 삶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의해 뻗어 나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동하와의 피 튀기는 싸움이 따른다면, 기꺼이 그것도 자신이 직접 할 것이다.
이동하와의 경쟁에서 경민은 늘 이겼지만, 늘 졌다. 반대로 늘 졌지만, 늘 이겼던 것도 사실이다. 경민의 승리에는 늘 어머니와 외숙부가 있었다. 온전히 혼자서는 이동하를 이겨본 일이 없다. 심지어는 맞부딪혔다가 처절하게 져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늘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간과한 것이 있다. 그 경쟁은 이겼어도 늘 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또한 한 번도 제대로 맞붙어 본 적이 없는 상대이기에, 경민의 내면에서 이동하는 본질 없는 공포감이 되어, 되레 점점 두려운 존재가 되어갔음을.
더는 그런 막연한 공포에 떨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제일 먼저 윤재화 전무에게 의지했던 많은 부분부터 떨쳐내야 할 것이다. 그로선 구명조끼를 풀고 맨몸으로 풍랑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는 선택이다.
“집으로 가.”
경민의 지시가 떨어진다. 다음 신호에서 경민이 타고 있는 차는 대로를 크게 유턴했다.
“요새 애들이 뭘 좋아하지?”
경민이 묻는다.
고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다.
“네? 뭐, 어떤 종류를 말씀하시는지…….”
“뭐든. 그 집 애들은 뭘 좋아해? 뭘 사다주면 좋다고 하던가?”
“저희 애들이요? 글쎄요. 군것질거리를 사다주면 제일 좋아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애 엄마가 애들 단 거 먹이는 걸 워낙 질색해서 잘 안 사갑니다.”
“하여튼 엄마들이란. 애들이 거 단것 좀 먹을 수도 있지.”
경민이 혀를 끌끌 차자, 고 비서도 동의한다는 듯 조금 웃었다.
“먹을 건 됐고. 그럼 로보트 같은 거 사다주면 좋아하나? 아니면 차 같은 거?”
“아……, 아마 그럴 겁니다. 아들이라면…….”
“고 실장네 애들, 아들이잖아?”
“아, 딸 쌍둥이입니다.”
그러고 보니 4년 전에 고 실장이 쌍둥이 아이를 얻었을 때, 얼핏 딸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예쁘게 잘 키우라고 봉투를 줬던 기억도, 애들 사진을 본 기억도 나는데 완전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이경민에 대한 일이라면 그가 며칠 주기로 손톱을 깎는 것까지도 알고 있을 고 비서와는 퍽 비교되는 무관심이다.
“아, 미안. 애들이 장군감처럼 생겼던 것 같아서 내가 잠깐 착각했네.”
“아, 네. 그러셨군요.”
고 비서가 표정 관리가 완전히 되지 못한 얼굴로 어정쩡하게 웃었다.
아차! 실수.
“아니, 나쁜 뜻은 아니고 애들이 튼튼해 보였다고.”
“네, 튼튼합니다. 저를 닮아서.”
“고 실장을 닮았어? 딸인데 고 실장을 닮아서 어떡해?”
이번에도 고 비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얼굴로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좀, 그렇긴 하죠, 라고 황급히 덧붙이는 말이 무진 씁쓸해 보인다.
아, 또 실수. 아이, 젠장. 왜 자꾸 헛소리가 튀어나와. 생전 뭐 이런 소리를 해봤어야 알지.
경민은 슬쩍 아랫입술을 깨문다. 상대 듣기 좋은 말을 생각해서 예의를 차려본 적이 없으니 립 서비스가 영 서툴렀다.
“애들 좋아할만한 것 살 수 있는 데 찾아서 잠깐 좀 들리자. 과자든 빵이든 뭐든.”
“네?”
“내가 사줄게. 와이프가 뭐라고 하면 내 핑계 대. 뭐, 적어도 나한테 따지지는 못할 거 아니야.”
허둥지둥 말을 얼버무린 경민은, 여전히 저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고 비서의 시선을 피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여름이 가까워진 도시의 야경이 유난히 선명하다. 피로하긴 했지만, 어쩐지 집으로 향하는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