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57화 (58/109)

#57

구인구직 사이트에 나온 공고를 훑어보며 마땅한 것을 적어보는데, 영 쓸 만한 것이 없다. 하루 종일 묶여서 일을 할 수 없으니 사무직으로 취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석사를 했어도, 교원자격증이 없는 이상 학교에 취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보조교사로 일하기엔 보수가 너무 적었다.

다이어리 한구석에는 한 달에 최소로 들어가는 비용들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곧 언니가 집으로 돌아올 테니 병원비는 줄겠지만 그렇다고 치료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으로선 언니가 일을 해서 부담을 줄여줄 거라는 기대도 할 수가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앞으로 반년은 두 사람 몫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

복잡한 생각에 빠져 의미 없는 낙서를 하고 있는데 사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아였다.

“네, 선생님.”

-우리 얼짱, 어디야?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정아의 목소리가 짜랑짜랑하다. 조금 취한 목소리였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 낮술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집이에요.”

-이 시간에 웬일로 집이야? 오늘은 강습 없어?

“네.”

-잘됐다, 그럼. 지금 나와라. 오랜만에 한잔하자. 여기가 어디냐면…….

가겠다는 대답을 한 것도 아닌데 정아는 사희의 말은 기다릴 새도 없이 자기가 있는 위치를 소상히 설명했다. 노바를 나온 뒤, 전화통화만 몇 번 했지 얼굴을 본 지 오래였으므로 사희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바닥에서 발이 넓은 정아를 만나면, 혹시라도 소개받을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정아가 이야기한 곳으로 나가보니 그 자리에는 정아 말고도 다른 사람이 더 있었다. 사희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아와 같이 앉아있는 사람이, 사희로서는 조금도 반가울 것이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노바에서 있을 때, 사희를 향해 노골적인 반감을 보였던 강사가 정아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괜히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눈치 없이 이런 자리에 저를 불러낸 정아에게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엇! 사희 쌤 왔다. 여기야, 여기!”

정아가 사희를 발견하고 손을 팔랑팔랑 흔든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돌아나가고 싶었지만, 사희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수틀리면 당장 일어나 나갈 기세로 멀찌감치 의자를 끌어다 엉덩이를 앉았다.

“오랜만이네.”

정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여자가 사희에게 말을 건다. 저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새미라고 했었나 뭐랬나. 이름이 새미라서 샘이 많나. 아무튼 사희에게 어지간히 샘을 부렸던 인물 중 하나다.

“아, 네.”

사희는 성의 없이 인사를 받곤 정아가 따라주는 술잔을 들어 툭 털어마셨다. 시킨 지 오래되었는지 미지근해진 소주가 쓰다.

“사희 쌤, 표정 좀 풀어라. 무섭다.”

정아가 빙글빙글 웃으며 술 한 잔을 더 따라준다.

“제가 있어서 그렇겠죠 뭐. 사희 쌤이 저 싫어하잖아요. 내가 싫어할 짓을 하긴 했지만.”

새미가 괜히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말을 받는다.

웬 착한 척이람? 사희는 입술을 삐죽 한 채로 다시 술잔을 비웠다.

“니들 화해하라고 부른 거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까지 내외할 건 없잖아.”

정아는 여전히 동떨어진 듯 멀찍이 앉아 있는 사희의 의자를 강제로 잡아당기며 말한다.

“애초에 화해를 하고 말고 할 사이도 아니에요.”

사희는 질질 끌려가는 의자를 발끝을 세워 버티며 차게 대꾸했다.

“나한테 감정 많은 거 알아요.”

새미가 사희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글쎄요, 감정은 그쪽이 나한테 많았겠죠.”

사희는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그래요. 감정 많았어요. 얄미웠거든. 이사희 강사 오기 전에 내가 그 VIP 강습했다는 거 알죠? 그런데 새 강사가 온다고 나를 하루아침에 잘라버리잖아. 얼마나 열이 받는지. 얼마나 대단한 게 오나 지켜봤지. 근데 진짜 대단한 게 왔더라고. 국가대표 출신이라지, 젠장. 예쁘기는 또 왜 그렇게 예뻐? 너무 얄밉더라고.”

사희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술잔을 비운다. 입 안에서 굴린 소주의 맛이 종전만큼 쓰지는 않았다.

“이사희도 잘렸어. 그러니까 니들 둘은 이제 쌤쌤이야. 똑같이 보릿자루 신세지. 크큭.”

발그레 술이 오른 정아가 키득거리며 말한다. 사희와 새미 두 사람은 동시에 도끼눈을 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사희, 내가 널 왜 불렀냐면, 내가 새미 쌤 만나서 이야기를 좀 들어보다가 뭔가 좀 이상한 게 있어서 말이야.”

“이상한 거라뇨?”

“새미 쌤이 최근에 맡고 있던 강습에서 다 강제로 하차당했대.”

술잔을 쥔 사희의 이마가 살포시 찌푸려진다.

“나 말고도 몇 명 더 있어요. 비슷한 일 겪은 사람들이. 모아놓고 보니까 하나 같이 혜석그룹 손자 개인 강습 맡았던 강사들이더라고. 혹시 사희 쌤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고 불렀어요.”

사희는 피가 식는 느낌을 받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표정을 감췄다.

“뭐, 그쪽에서 일부러 강사들을 곤경에 빠트리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최근에 사건이 하나 났었잖아요. 노바 관련해서. 그때 혜석그룹 손자를 강습했다는 강사의 폭로 인터뷰가 나오면서 더 문제가 됐었고.”

“……그런데요?”

“그 인터뷰, 이사희 강사가 한 거예요?”

사희는 불쾌하다는 듯 강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감정적으로 소주잔을 내려놓는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예요?”

새미는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뒤집어엎을 기세로 발끈하는 사희의 얼굴을 몇 초간 뚫어지게 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래요. 쌤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비겁한 타입은 아닌 것 같아서.”

“됐고요. 아무튼 나는 이런 이야기 더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가겠습니다.”

“괜찮아요? 강사님은? 아무 일 없었어요?”

엉덩이를 떼려던 사희는 멈칫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네 명이에요. 만약 강사님도 그런 일을 당했다면 강사님까지 다섯. 그 애를 담당했던 다섯 명 모두가 그런 일을 겪는다면 그게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요.”

“…….”

“인터뷰를 한 사람이 누군지, 그쪽에선 알아내자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러지 않았어요. 대신 물망에 오른 모두의 앞길을 망치는 방법을 선택한 거라고.”

사희는 대답 대신 소주병을 들어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술잔을 채운 술이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렸다. 술을 털어 마신 사희가 고개를 든다. 눈빛이 심란해 보였다.

“증거 있어요? 그 사람들이 그랬다는 증거.”

“없어요. 그냥 심증일 뿐이에요.”

“심증만으로는 안돼요. 물증이 있어야지.”

“물증이 있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닐까? 상대는 재벌이잖아요. 너무 무서워요, 나는. 이제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럴 때 좀 똑 부러지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음 좋겠는데, 우리 중에는 그럴만한 사람도 없고.”

사희는 입 안에 쓰게 고여 있는 소주를 혀로 긁어 삼킨다.

“그럼 뭐 어쩌자고. 날 여기 왜 부른 건데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건지…….”

“본인만 당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으면 좀 덜 억울해질까를 기대했던 건 아니고?”

사희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새미는 머뭇하며 입을 다문다.

“아무것도 못할 거라면, 의혹은 가져서 뭐해요? 하소연? 그걸 왜 나한테 해?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까 과거엔 얄미워 죽을 것 같던 사람한테도 갑자기 정이 생기고 그러시나 보죠?”

“…….”

“억울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동지의식이나 키울 마음, 난 없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로 나 불러내지 말아요.”

사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아가 싸늘하게 돌아나가는 사희를 따라 나왔다. 그리곤 조금 질책하는 눈길로 사희를 본다.

“이사희, 그렇게까지 화낼 건 뭐야. 새미도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겠어. 쟤 지금 강습하러 현남 시까지 나간대. 그나마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고 불안해하고 있어. 다들 한창 돈 벌어야 하는 애들이야. 걔들이 다 너처럼 그렇게 어른스럽게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

“그래서 나한테 앞장서 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내가 자기들보다 더 냉정한 것 같고, 잘 안 참는 사람 같으니까 내가 나서서 이 일을 어떻게 해주면 좋겠다 싶은 마음 아니냐고요!”

“…….”

“선생님, 나도 힘들어요. 나도 무섭고, 나도 지친다고요. 나도 그 사람들이랑 똑같은 사람이라고요.”

무섭게 소리친 사희의 눈에 반짝 눈물이 고였다.

“사희 쌤…….”

“제 대답은 하나예요. 억울하면 본인들이 직접 나서라고 하세요. 나도 그럴 테니까.”

사희는 붙잡는 정아의 팔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그리곤 그녀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 빠르게 뛰어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고였다가 빠르게 흩어져나간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거대한 감정의 그림자가, 검은 개처럼 이를 드러내고 자꾸만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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