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56화 (57/109)

#56

“……!”

사희의 눈이 놀란 것처럼 번쩍 커진다.

“처음엔 함께 있으면 편안했기 때문에 당신 만나는 시간을 기다렸어. 그런데 이제는 당신이 불편하기 때문에 더 만나고 싶어. 첫눈에 네가 마음에 들었고, 네가 자꾸 눈에 밟혔고. 좋아 죽겠는 건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 같아. 이게 당신이 의심하는 내 진심이야.”

젖은 화선지에 먹이 번져나가듯, 사희의 가슴 속에서 응축되었던 감정이 사르르 퍼져나갔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마치 화약을 머금은 듯 위험해졌다. 작은 불씨만 있어도 금세 팡, 하고 터질 것 같았다.

“나를 믿을 수 있겠어요?”

동하가 손을 뻗어 사희 아래턱을 살짝 어루만진다. 사희는 응석을 부리듯 도리질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진심인데, 어쩐지 마음은 아직도 그에게 완전히 열리지 못했다. 당신과 내가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자꾸만 사희를 머뭇거리게 만든다.

사희는 동하의 손길을 피하려 조금 물러섰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저를 만지는 남자의 부드러운 손길이 좋았다.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좋고, 조금은 안달을 내는 애달픈 목소리도 좋고,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도 좋았다. 너무 좋아서 자꾸 겁이 났다.

“아직 모자라요?”

사희의 턱을 잡은 동하는 엄지 손끝으로 여자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그머니 어루만진다. 사희는 입술을 간질이는 그의 손길에 저도 모르게 찡긋 눈꺼풀을 찡그렸다. 바람에 한들거리는 민들레 꽃씨처럼 사희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좀 더 정드는 수밖에.”

동하의 입술이 사희의 입술을 삼킨다. 사희는 입술 사이로 침범하는 뭉근하고 뜨거운 혀의 촉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촉감과는 다르게, 강하게 사희의 혀를 빨아들이는 호흡에는 자비가 없었다.

동하는 다부진 팔로 사희의 어깨와 허리를 안더니 와락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찌해볼 새도 없이 사희는 남자의 팔에 번쩍 들려 그의 다리에 올라앉게 되었다.

동하는 사희의 등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눌러 그녀의 몸을 제 가슴 쪽으로 더 가깝게 붙였다. 그리곤 맞붙은 입술을 좀 더 깊게 포개기 위해 고개를 조금 틀었다. 남자의 높은 코끝이 사희의 볼 언저리를 누르고, 두 사람의 입술을 더 싶게 맞물렸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부드럽게 더듬으며, 조금씩 스며들 듯 입속으로 들어오는 혀의 희롱이 감질난다. 조금 더, 조금 더. 애가 타도록 매달리고 싶은 중독적인 입맞춤이었다.

입맞춤은 점점 더 짙어졌다. 혀끝으로 입천장을 긁는 남자의 움직임에 숨이 막힌다.

“하아…….”

사희가 고개를 뒤로 젖혀 숨을 크게 몰아쉰다. 그 짧은 틈도 허락하지 않고, 동하가 다시 사희의 입술 아래를 질척하게 더듬었다. 투명한 타액이 빗방울을 머금은 거미줄처럼 생겨났다 이내 사라진다.

“누가…… 올지도 몰라요.”

사희가 동하의 가슴을 조금 밀어냈다.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든 남자의 입술에 사희의 입술이 한 번 더 부드럽게 물렸다.

“본부장님……!”

사희는 한층 다급하게 속삭이며 동하를 밀어내는 팔에 힘을 더했다.

“하……!”

사희의 입술을 헤집던 남자에게서 얕은 웃음이 터졌다. 동하는 으스러트릴 것처럼 세게 사희를 힘주어 안더니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욕망을 억누르는 인내의 숨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사희에게서 입술을 뗀 동하는 부옇게 풀린 눈빛으로 그녀를 보더니 얄밉다는 듯, 슬쩍 눈을 흘긴다.

“그 호칭, 거북하다고 했을 텐데.”

“그러니까 더 해야죠. 본부장님이랑 정들면 안 되니까.”

사희는 동하의 눈을 마주 보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말투는 새침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길만은 부드럽고 너그러웠다.

“좋아, 당신 마음 가는 대로 해. 의심해도 좋고, 삐딱해도 좋아.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지금은 다 마음에 드니까.”

사희가 모호한 눈빛으로 동하를 바라본다. 여전히 눈빛에는 미심쩍음이 가득했다.

동하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입술을 씹는다.

“내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믿지 않기로 작정한 거예요? 보기보다 겁이 많네.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디 연애하겠어?”

“누가 연애하겠대요?”

“연애가 별건가? 남녀가 이 시간에, 이렇게 같이 있는 게 연애지.”

동하가 사희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새에 걸어 부드럽게 빗어 내린다. 사희를 보는 동하의 눈빛이 한없이 따듯했다.

그 순간 사희는 왠지 그를 좀 더 애태우고 싶다는 짓궂은 욕구를 느꼈다. 자신이 애탔던 시간만큼, 그도 어쩌지도 못하겠는 기분을 느껴줬으면 좋겠다는 심술이었다. 그가 그 환장할 것 같은 시간을 기꺼이 감내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저를 갈구한다면 그때는 정말 그를 의심 없이 믿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미련스러운 욕구였다.

“아뇨. 이건 그냥 키스예요. 신체적 욕망 그 이상 이하도 아니야. 앞서가지 말아요.”

사희는 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살짝 시선을 피했다. 동하는 제게서 시선을 돌리는 사희의 턱을 손으로 잡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이사희, 너 이럴 때마다, 꼭 그거 같아.”

사희는 가로 너비가 긴 눈을 앙큼하게 뜨고 동하를 보았다.

“……?”

“아주 버릇없는 새끼 고양이.”

낮은 음성이 허스키하게 갈라졌다. 너무 많은 욕구를 삼키고 있는 탓이다. 무어라 반박하려던 사희의 말은 다시금 동하의 입술 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 후로 오래도록 이슥한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눈이 부신 느낌에 사희는 스르르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한 줄기가 침대 위를 가로질러 방의 끝까지 이어져 있다. 온몸에 산뜻한 기운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꿈도 꾸지 않고 숙면한 덕이다. 몸에는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완벽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사희는 게으르게 이불 안에서 꼬물거리다가 두 팔을 쭉 뻗어 크게 기지개를 켠다.

“아그그그그.”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늘은 수업도 없으니 하루 종일 이렇게 침대에 누워 게으름을 피웠으면 좋겠다. 새끼고양이처럼.

‘새끼고양이?’

풉, 사희는 반사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작게 시작한 웃음은 머잖아 깔깔거리는 박장대소로 바뀌었다. 그렁하게 고인 눈물이 눈초리를 타고 흘러 시트 위로 툭 떨어진다. 잠시 후 구슬 굴러가듯 이어지던 웃음이 서서히 잦아들고, 사희는 뺨을 시트 위에 묻고 모로 누웠다.

동하의 고백을 생각한다.

「첫눈에 네가 마음에 들었고, 네가 자꾸 눈에 밟혔고. 좋아 죽겠는 건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 같아. 이게 당신이 의심하는 내 진심이야.」

귓가에 선명한 목소리. 저를 안아주던 품의 포근한 온도와, 습기 찬 숨결, 그리고 그의 목덜미에서 풍기던 나무 향기까지. 모든 것이 생생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도 남들처럼 그렇게 연애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연애는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을 생각하는, 나의 이 어리석은 불안이 끝내는 그와의 관계를 망치게 되지는 않을까.

어리석은 불안이었지만, 이유 없는 불안은 아니다.

「재벌들이 아무나 만나는 줄 알아? 그 사람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자기들의 리그가 있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세계 밖의 사람에게 손 내미는 그런 일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도 벌어지지 않는다고.」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모두가 부인하지 못했던 그 말, 부인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것이 현실이라는 뜻일 것이다.

「뭐가 현실적이라는 건데? 대체 당신이 사는 현실은 뭐가 그렇게 험해?」

다그쳐 묻던 동하의 얼굴도 떠올랐다. 어떤 것도 문제될 것 없다는 그 눈빛, 그 단호한 눈빛을 덜컥 믿어버리고 싶다.

사랑이란 원래 알면서도 속는 장난이지. 끝내 그 장난에 울게 된다 하더라도.

사희는 질끈 눈을 감았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지 말자. 언제 자신의 인생이 한 번이라도 생각대로 된 적이 있던가. 어떤 것도 계획하지 말자. 그저 믿자. 믿어보자.

‘그가 아닌 나를. 나 자신을. 내 마음을.’

사희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포옹하듯 꽉 감싸 안았다. 맞붙은 팔의 온기 때문일까. 불안하게 벌렁거리던 가슴이 한결 잠잠해졌다.

***

동하는 아까부터 볼에 날아와 박히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수찬이 그를 보고 있었다. 동하는 심드렁하게 한번 눈을 마주쳐 주곤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볼이 뚫어질 것 같은 느낌은 여전했다.

“왜, 뭐!”

동하는 결국 신문을 내려놓고 수찬에게 버럭 소리친다.

지레 발끈하는 동하를 한결 더 수상한 눈으로 보면서 수찬은 바짝 구운 베이컨을 덩어리째 입안으로 쑤셔 넣는다.

“뭐야, 그 불손한 눈빛은?”

“수상합니다.”

“대체 뭐가.”

“아까부터 계속 콧노래 흥얼거리잖아요, 선배.”

동하는 생각지도 못한 수찬의 말에 조금 당황한 듯 눈썹을 움찔한다.

“무슨 헛소리야.”

“왜 시치미 떼고 그래요. 제가 다 봤는데. 느끼한 표정으로 Love me tender, Love me sweet. 나나나. 음음음. 그랬잖아요!”

광대뼈 부근이 화끈 달아 오는 것을 느낀 동하는 신문을 활짝 펴 최대한 높이 치켜들었다.

“뭐 좋은 일 있어요? 네? 그런 겁니까?”

수찬이 요리조리 고개를 들이밀며 동하와 눈을 맞추려 애썼다.

필사적으로 피하려던 동하의 노력은, 신문지 밑으로 기어이 머리를 들이밀어 파고드는 수찬의 오기 앞에 무너진다.

“뭐하는 짓이야, 이게.”

“대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으신 건데요?”

“이게 오냐오냐해주니까 끝도 없이 기어올라, 아주?”

“아, 알았다!”

“뭘 알아, 알기는.”

“알아내셨나 보구나. 그분이 느끼는 불편함의 정체를?”

이미 눈치 재게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묻는 수찬을 더 이상은 따돌릴 수 없었다. 동하는 결국 걸레처럼 뜯긴 신문지를 접어 내려놓는다.

“아직 몰라.”

“모르신다고요? 근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수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모르니까.”

“네에?”

“아직 모르니까 더 알 수 있잖아. 아직 모른다는 건 재미있는 거거든. 알아볼 거야. 최선을 다해서.”

“그럼, 알고 나면요? 알고 나면 재미없어질 테니까 흥미도 떨어지시겠네요?”

수찬이 입술을 뚜하니 내밀고 묻는다.

“아니. 알고 나면 그때부턴 더 즐겁겠지. 완전히 갖고 싶을 테니까.”

동하의 입술에 싱그러운 웃음이 번진다. 반짝 눈빛에 생기가 돈 것은, 아직 잘 모르는, 그래서 더 알고 싶은 그녀를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심장이 뛴다. 모처럼 완벽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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