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55화 (56/109)

#55

두 사람은 아파트 구석에 놓인 정자에 나란히 앉았다. 말이 정자였지, 나무 합판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어설픈 골조 위에 싸구려 기와로 차양을 해놓은 작은 원두막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는 길을 벗어나 있어서, 밤이면 철없는 10대 애들이 비행을 하기에 좋은 장소다.

저녁 식사 때가 한창인 이 시간에 정자는 한담을 나누는 주민도, 망나니 같은 짓을 하는 청소년들도 없이 한적했다. 페인트가 벗겨져 벌겋게 녹이 난 담장에는 이름 모를 풀 넝쿨이 무성하다.

산 아래에 있는 이 낡은 아파트는 아침저녁으로 산에서 이슬 섞인 습한 바람이 불어 내려온다. 그 바람이 식물에게는 더없이 기름진 거름인지, 날이 조금만 풀려도 아파트 정원에 온갖 꽃과 나무가 정글처럼 자라났다.

형부가 위자료랍시고 남기고 간 조그만 전셋집. 학군도 교통도 좋지 않아서 젊은 사람들은 진작 이사를 가고, 나이 든 사람들만 남아 있는 낡은 아파트는 겉모습만 보면 꼭 도깨비 집 같다.

‘이 남자는 이런 데에서 살아본 적 있을까?’

사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딸깍, 뚜껑을 딴 맥주에 입술을 붙여 한 모금을 마신다. 냉기가 조금 가시긴 했어도 맥주는 아직 시원했다. 곁에 앉은 동하도 제 몫의 맥주를 땄다. 맥주를 넘기는 청량한 소리가 들렸다.

“어때요?”

사희가 물었다.

“뭐가요?”

“여기 어떠냐고요.”

“좋네요. 조용하고 시원하고. 그리고 으슥하고.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날 여기로 데리고 온 건 아니겠지?”

싱거운 농담을 한 남자가 빙긋 웃는다. 살포시 감기는 눈자위에 따듯한 눈웃음이 번진다. 사희는 쉬지 않고 농을 거는 남자가 우스워 피실 웃는다.

“원래 그렇게 뻔뻔한 성격이에요?”

“아니.”

“그런데 내게는 왜 이렇게 뻔뻔하게 굴어요?”

“그렇게 안 하면 아프거든.”

“……?”

“계속 거절하잖아, 나를. 이래도 싫다 하고, 저래도 싫다 하고. 끊임없이 나 싫다고 하는 여자, 이렇게라도 대하지 않으면 어떻게 견디겠어.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애쓰는 겁니다.”

싸르르, 마음이 울린다.

“내 말에 상처받아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쪽이 말을 워낙 예쁘게 하나?”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에요. 본부장님이 그만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사희의 말에 동하가 고개를 돌려 여자의 눈을 한참 바라본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동하는 씁쓸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일 이야기 하지 말자며. 오늘은 그 이야기 하지 맙시다.”

답 없이 뺑뺑이만 도는 이야기 더 해보았자 무의미하다는 데에는 사희도 공감했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희는 맥주 한 모금을 입안에서 굴리다가 천천히 나눠 삼켰다.

“맞다, 이사희 강사님, 국가대표였다며?”

잠시 후, 동하가 정적을 깨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 나 국가대표 운동선수는 처음 보거든. 얼마나 잘했기에 국가를 대표하지?”

동하는 경외심을 담은 눈빛으로 사희를 보며 감탄했다.

“대단할 거 없어요. 특별할 것도 없고. 올림픽도 아니고 겨우 아시안게임이었을 뿐이고. 사실 그나마도 1선발도 아니었어요. 1선발 선수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대체되어 투입되었거든요,”

“1선발이든, 2선발이든 어쨌든 국제대회에 나갈 만큼 잘했으니까 국가대표 자격을 줬겠지.”

“메달도 못 땄어요. 전체 순위 6위. 형편없는 성적이었어요.”

사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성적을 두고 주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해오던 말이었다. 처음에 그 소리를 들을 때는 그렇게 화가 나고 억울하더니, 이젠 하도 들어 세뇌가 되었는지 스스로 알아서 그렇게 자기의 성적을 축소한다.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은퇴한 데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부상으로 인한 은퇴였다. 거듭된 회전근개 파열. 수술로 생긴 공백. 그에 따른 성적 저하. 여자 수영선수 전성기의 끝자락에 서 있던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그 때의 절망감도 아스라이 먼일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니, 시간의 흐름이 실감이 났다. 사희의 입술 새에서 인식하지 못한 사이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부상 때문에 은퇴했다고 했던가요?”

사희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답하지 않는다. 그런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사희의 모호한 행동에 동하가 힐끗 고개를 돌린다.

“아니야?”

“그냥……. 내 인생의 전성기가 끝난 거지. 부상은 핑계고.”

“얼마나 살았다고 벌써 인생의 전성기가 끝이 나?”

“끝났어요. 의심의 여지 없이. 물 밖으로 머리채 잡혀 끌려 나온 그때,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밝았던 빛이 꺼졌으니까.”

말을 마친 사희가 쓸쓸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

동하는 씁쓸해 보이는 사희의 옆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곧 어깨를 으쓱 끌어올렸다.

“염세적인 구석이 있으시네.”

“염세적인 게 아니고 현실적인 거죠.”

“대체 뭐가 현실적이라는 겁니까? 자기의 가치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좋았던 기억까지도 다 부인해버리는 게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현실입니까? 대체 당신이 사는 현실은 뭐가 그렇게 험해?”

동하의 말투가 거슬렸다. 날 때부터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살았을 것이 분명한 금수저가 마치 세상의 이치를 다 안다는 것처럼 구는 꼴이 꼴 보기가 싫었다.

“대단하신 재벌께서는 절대 모르는 그런 험한 세상이 있어요. 아늑한 둥지 속에 사는 분은 죽을 때까지 모를 그런 세상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그런 사희를 보는 동하의 눈이 조금 흔들린다. 아픈 표정이었다.

아차 싶다. 조금 전, 자신의 말에 상처를 받는다고 말했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즉시 후회된다. 그와 말을 주고받다 보면, 마음과 다르게 항상 뾰족해진다. 어쩌면 한 마디도 지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저다. 이동하가 그랬던 것처럼, 그와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만든 몽니인 걸까.

“아……,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요?”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요.”

“훗, 그렇게 빨리 미안해할 거면서 왜 화는 냅니까?”

동하가 콧방귀를 섞어 웃으며 물었다.

“…….”

“당신, 화내는 거 별로 안 어울려. 그리고 애초에 누구한테 상처를 줄 만한 깜냥도 없어. 그러니까 독한 척 그만해요.”

동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를 털어 마신다.

사희는 그에게 자신의 완전한 민낯을 들킨 것만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그 순간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맥주 캔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주물거리며, 죄 없는 입술만 하염없이 물어뜯었다.

동하는 빈 맥주 캔을 구겨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부딪힌 캔에서 챙, 하고 가벼운 소리가 났다.

“어쨌든 한때는 아시아에서 6번째로 수영을 잘하는 여자였다는 거 아냐. 은퇴하면 그 기록도 다 없어지는 건가?”

동하는 끝없이 부정적인 쪽으로 향하는 사희의 화살표를 어렵게 않게 반대쪽으로 돌려놓았다.

사희는 동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술에 취해서인지, 향기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사희의 눈이 조금 풀렸다.

“……포장해주지 않아도 돼요.”

“포장할 이유가 뭐가 있지? 내가 보기에 당신, 거추장스러운 포장 없어도 충분히 가치 있어 보이는데.”

“…….”

“내가 몇 날 며칠 여기에 왜 오고 있겠어? 내가 왜 당신에게 같이 일하자고 했을까?”

“그건…….”

사희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다 말았다.

“설마 당신이 예뻐서 스카웃 제의하는 줄 아는 거예요?”

동하가 가늘게 찌푸린 눈살로 의심스럽다는 듯 사희를 본다.

“하긴 뭐, 그렇기도 하지. 예쁜 건 예쁜 거니까. 좀 예쁜가, 이사희가?”

제 눈앞에서 싱긋 웃는 동하의 얼굴을 보자 사희는 물색없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됐어요. 나 그런 립 서비스에 감동 안 하니까 제발 넣어둬요.”

동하는 질색하는 사희를 귀엽다는 듯 보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아까부터 들고만 있는 사희의 맥주를 빼앗아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뱉어놓은 남자가 말을 잇는다.

“당신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같이 일하자고 했던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조금 더 자부심을 가져도 돼요. 믿어요, 스스로를. 자꾸 다그치기만 하지 말고. 자꾸 그렇게 괴롭히기만 하니까 삐죽삐죽 가시가 돋잖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부드럽게 감긴다. 듣는 사람을 한없이 느슨하게 만드는 감미로운 음성이다.

산허리에 걸려있던 해가 고개를 숨기자 빠르게 어둠이 찾아온다. 산 어디에서 산비둘기가 구구, 스산하게 울고, 바람이 싸하게 불었다. 산바람을 타고 아카시아 꽃향기가 두 사람이 있는 곳까지 자욱하게 밀려 내려왔다. 습한 공기가 머금은 아카시아 향에 기분이 몽롱하게 취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믿는 김에, 나도 좀 더 믿어 봐요.”

정면을 보고서 혼잣말하듯 이야기하던 동하가 사희를 돌아본다. 사희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동하의 눈을 보았다. 동하는 쉽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 당신 마냥 편한 사람으로 여겨 아무렇게나 이용해 먹을 생각으로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거 아니에요. 난 그럴 자격도 없고, 무엇보다 그럴 수도 없어.”

“…….”

“왜인 줄 알아요?”

사희는 작게 도리질 쳤다. 물끄러미 저를 보는 사희를 역시 닮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동하가 여자의 앙증맞은 코끝을 손가락으로 스윽 쓰다듬는다.

“이사희, 당신 불편해졌거든. 내게 당신, 아주 불편한 여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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