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다른 어머님들은 어떠세요? 다른 분들께서도 만족해하시나요?”
사희가 조심스레 묻는다.
“다른 엄마들이야 말해 뭐해요. 솔직히 우리 중엔 민하 엄마가 제일 깐깐한데 그이가 만족했으면 다 오케이지. 오늘 아침에 엄마들 다 같이 브런치 했거든. 우리 모여서 입이 마르도록 강사님 칭찬했네요.”
여자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달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생글거리는 여자의 목소리에는 상당한 립 서비스가 묻어있었지만, 거짓은 없어 보인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 없는 있는 집 사모님들이, 수영 강사에게 없는 소리까지 지어내 칭찬을 퍼부을 리는 없을 터. 이로써 학부모의 항의로 사희에게 강습을 맡기기 어려워졌다는 원장의 말은 거짓말이라는 뜻이 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날 자른 거지?
불길한 기분이 든다. 최근에 자신에 일어난 일들이 완전히 우연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자 마음이 몹시 불쾌해졌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추측일 뿐이다.
사람을 해고하려면 이런저런 핑계를 다 끌어다 붙이는 법이니, 원장도 자기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만만한 핑계 중에 하나를 골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뭐라도 좋으니 핑계라도 대주는 편이 그나마 낫다. 어떤 해고는 그런 속 보이는 변명조차 없기도 하니까.
사희는 자연스럽게 차세령을 떠올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리도 쉽게 상기되는 것을 보면, 모욕의 상처란 그리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삼류 수영강사 주제에 건방지게.」
여전히 그녀가 남긴 말은 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절로 어금니가 꽉 다물어진다.
‘내가 삼류강사면 당신은? 그 잘난 혜석그룹 며느리? 쳇, 그깟 재벌가 며느리, 코딱지만큼도 안 부럽다 이거야!’
사희는 콧방귀를 뀐다. 생각할수록 그날, 받은 모욕을 참지 않고 돌려주기를 백번 천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참았으면 두고두고 울화가 치밀 뻔했다.
그 여자도 자신이 준 모욕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했으면 좋겠다. 베푼 만큼 돌려받는 것이 인생의 법칙은 아니라 해도, 저지른 만큼은 돌려받는 것이 인생이었으면 좋겠으니까.
‘그런데 그 여자, 혹시 그때의 일을 앙갚음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서 나를 곤란에 빠트렸다거나…….’
마음이 심란하니 별 잡생각이 다 든다. 아니다. 사람이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악독하고 치졸하겠나. 사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얼른 고개를 털어냈다.
***
봄날이 깊을수록 해가 길어지더니 6시가 넘었는데도 완전히 어둡지 않았다. 간간이 불을 켜기 시작한 간판 조명과, 자동차의 브레이크등 불빛만이 조금 더 선명하게 빛나며 곧 다가올 저녁 어둠을 대비한다.
막히기 시작하는 도로에 갇힌 마을버스 안의 공기가 텁텁하다. 조금 멀미가 났다.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두 정거장 전에서 내린 사희는 천천히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낮과 밤의 사이에 걸린 도시는, 태양이 사위어가며 만든 엷은 광선으로 온통 연한 분홍빛이었다.
‘세계맥주 5캔에 만원.’
편의점 유리에 붙은 매혹적인 문구가 사희를 유혹한다. 점심도 샌드위치로 대충 때운 마당이니 지금으로선 맥주보다 끼니를 챙겨야겠지만, 울적한 기분 탓인지 도통 식욕이 돌지 않았다.
맥주를 담은 비닐봉지를 덜렁덜렁 흔들며 아파트 입구로 들어선다. 한 층에 13세대가 한 줄로 죽 이어진 형태의 복도식 아파트에는 저녁밥 짓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밥 냄새를 맡으니 식욕이 없다는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급격하게 허기가 졌다. 어느 집에서 끓이는 된장찌개 냄새가 참 좋다는 생각을 하며 코를 킁킁거리고 있는데, 그녀 바로 앞에서 자동차 문이 열렸다.
이동하였다. 사희는 깎아놓은 밤톨처럼 모난 데 없이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최선을 다해 설득할 거라던 말이 괜히 해본 허세가 아니었다는 것은, 벌써 몇 차례나 이어지고 있는 그의 뜬금없는 방문이 증명하고 있었다.
“왜 또 왔어요.”
사희는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빤한 질문을 던졌다.
왜 빤한 질문이냐? 이미 돌아올 답을 알고 있으니 빤하다. 남자는 사희의 질문에 언제나처럼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으니까.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대답이기에 사희는 마음속으로 곧 그가 꺼낼 말을 되뇐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동하의 말투와 목소리를 흉내 내며 중얼거렸다.
“아직 할 이야기 남았으니까.”
그러나 동하에게서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 보고 싶어서.”
중얼거리던 사희가 번쩍 눈을 뜨고 동하를 올려다본다. 동하는 가늘게 눈을 뜬 채로 사희를 보더니 윗입술을 당겨 싱긋 웃었다.
“그거 혹시 내 성대모사 한 겁니까?”
“아……그게…….”
사희는 바보처럼 말을 더듬거린다.
“잘하네. 당신이 날 그렇게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그런 게 아니라…… 매번 똑같은 대답을 하니까…….”
“오늘은 다르게 말했는데?”
동하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여 사희를 본다.
부끄러운 탓일까. 아니면 저녁으로 접어드는 분홍빛 공기 탓일까. 여자의 뺨이 붉다. 살구꽃처럼 보오얀 살결을 만지면 퍽 부드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쓰다듬고 싶다. 애써 참아내는 손끝이 간지러워, 동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은 다르게 말했다고. 들었어요?”
동하가 한 번 더 강조해 물었다.
“아니요.”
사희는 고개를 팩 돌리며 거짓말을 했다. 괜히 그런 말로 어영부영 말꼬리를 이어가는 것을 막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보고 싶었다고 말했어요.”
동하가 사희 쪽으로 허리를 굽히곤 여자의 소라껍질 같은 귓가에 속삭였다.
사희는 귓구멍 안으로 들어오는 새털처럼 부드러운 입김에 저도 모르게 살짝 눈을 감는다. 찌릿하게 전기가 올랐다. 사희는 뒤로 주춤 물러나 동하를 노려본다.
“못 들었다고 해서 다시 들려준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이래도 내 대답은 똑같아요. 당신이랑 일 안 한다니까요.”
“오늘은 그 말 하러 온 거 아닙니다.”
“그럼 대체 여기 왜 온 건데요.”
“몇 번을 말해요.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왜 자꾸 반복하게 하지? 듣고 또 들어도 좋습니까? 그럼 더 해주고. 크게 말해 줄 테니 잘 들어요. 보고 싶었어요. 하루 종일 되게 보고 싶더라고, 이사희 씨가.”
동하가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지나던 사람들이 고성을 지르는 잘생긴 남자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잖아도 누구네 집에서 누가 방귀를 뀌어도 다음날 온 동네에 소문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좁아터진 동네, 이대로 두었다가는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은 시간문제다.
말리지 않으면 끝도 없이 떠들 것 같아서 사희는 황급히 동하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요? 제발 그만 좀 해요!”
“스른데. 계속 흘끈데. 브고스펐는데. 이스희.”
동하는 사희의 손에 틀어 막힌 입술 틈으로 말을 잇는다. 그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보드랍고 매끄러운 촉감과 축축한 입김이 손바닥 위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자는 짓궂은 표정으로 싱긋 웃더니 사희의 손가락 틈, 여린 살갗을 살짝 입술로 더듬었다. 화들짝 놀란 사희가 얼른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암팡지게 노려보는 사희를 보며 동하는 한 번 더 씩 웃는다.
“밥 안 먹었죠? 갑시다, 비싼 밥 먹으러.”
동하는 일부러 ‘비싼’이라는 수식어에 힘을 주었다. 사희는 저를 놀리려는 기색이 분명한 동하에게서 쌩하니 고개를 돌렸다.
“내 밥은 내가 알아서 먹을 거예요.”
“뭐 맛있는 거 사왔나?”
동하는 사희의 손에 들려있던 비닐봉지를 빼앗아 그 안에 든 것들을 들여다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당신, 알코올중독자야?”
“내놔요.”
“이거 혼자 다 마시면 진짜 중독됩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좀 나눠 마셔 줘야겠네.”
“혼자 다 마셔도 절대 중독 안 되니까 걱정 마세요.”
“약속을 잊으셨나 보네. 분명히 나랑 편하게 앉아서 맥주를 마실 수 있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불편한가? 내가 또 남자로 보이나 봐요?”
사희는 얄밉게 빈정거리는 동하를 살차게 노려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거리는 그를 완전히 뿌리치는 것까지는 하지 못했다. 오늘은 혼자서 술을 마실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핑계일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핑계 삼아 스스로를 잠시 속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요. 대신 약속해요.”
“뭘?”
“같이 일하자는 말은 하지 않는 걸로.”
“노력은 해 볼게요.”
“어영부영 말하지 말고 약속해요. 그 말, 절대 안 하는 거예요. 약속 안 하면 나도 싫어요.”
동하는 물러날 기색이 없는 사희의 또랑또랑한 눈을 가만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영 미심쩍은 기색이었지만, 약속까지 받아놓고 이제 와 말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희는 결국 그 약속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