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53화 (54/109)

#53

유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세령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다. 더 이상 노바에서 재민의 개인 강습을 위해 풀장을 오픈하지 않겠다는 지침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일명 총수일가 황제 강습에 대한 보도가 나가면서 그러잖아도 들끓던 여론이 상대적 박탈감을 운운하며 더욱 나빠졌기에 내린 조치였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령이 견딜 수 없이 분노한 것은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밝혀진 재민이의 상태에 관한 부분이었다. 재벌 그룹의 손자에 대한 이슈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기 좋은 주제였다. 자폐니, 중증의 ADHD니 하는 자극적인 병명을 거론한, 확인되지 않은 가십들이 인터넷을 통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부랴부랴 기사를 내리게 조치했지만, 이미 깃털처럼 퍼져 나간 소문까지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최근에 노바에서 해고를 당한 강사의 인터뷰였다고?”

유 선생의 보고를 듣던 세령이 귀에 거슬리는 대목에서 말을 끊었다.

“네, 익명의 제보자였다고는 하지만 재민이의 상태를 소상하게 인터뷰한 것으로 보아선, 지도했던 강사 중 한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도 강사 중 하나.”

세령이 말을 되씹으며 눈을 강하게 찌푸린다.

“제 생각에는…….”

유 선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혹시 이번에 해고당한, 이사희 강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령은 잠자코 유 선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가장 마지막까지 재민이를 지도했던 강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기존의 강사들과는 다르게 계약해지에 강하게 불만을 표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이에 앙심을 품고 그런 인터뷰를 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어금니를 꽉 물었는지, 세령의 턱 근육이 기이하게 움직인다.

그녀를 노려보며, 겁 없이 눈을 부릅뜨던 이사희의 얼굴이 떠올렸다.

「이 세상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미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거든요. 또 한 번 내 앞에서 힘이니 뭐니 운운하셨다간, 진짜 힘들어지실 겁니다. 저는 잘 안 참거든요.」

당한 만큼 돌려줄 각오가 되어있다던 그 맹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두려웠느냐?

아니다. 그깟 맹랑한 하룻강아지 계집애의 경고 따위에 움츠러들 세령이 아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살 수 없는 각오라면, 그 계집애보다 자신이 훨씬 더 오래전에 했고, 실천한 일이다.

시커먼 물속으로 가라앉은 가족을 두고 물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빚을 갚으라고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서 양부모의 돈을 훔쳐서 도망쳐 나왔을 때, 그리고 사랑했던 동하를 져버리고, 이경민을 찾아갔을 때부터 그녀는 이미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했다. 그랬기에 멸시와 모욕뿐인 이 집안에서의 지옥 같은 삶도 버틸 수 있던 것이다. 저에 대한 모욕쯤은 얼마든지 코웃음으로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재민은 다르다. 살얼음판 같은 세령의 삶에 재민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혜석그룹 후계자 이경민의 외아들 이재민. 아픈 재민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윤여화가 세령을 내치지 못하는 것도 그 아이가 경민의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이다.

재민을 완벽하게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헌신했던가. 아이에 관한 어떤 흠도 허락하지 않으며, 얼마나 혹독하게 지켜온 아이인데. 그녀의 자존심이고, 그녀의 구명줄인 재민에게 흠이 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세 치 혀 위에서, 그녀의 아들이 혜석그룹을 이어받기에 모자란 반푼이가 되었다. 동시에 세령의 자존심도 무너졌다.

갚아 줄 것이다. 참지 않을 것이다. 그게 이사희 짓인지, 아닌지, 이제 와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겠다면, 의심이 드는 모두를 대상으로 삼으면 그만이다. 내게는 참지 않겠다는 경고조차 필요치 않다는 것, 나를 무시한 모두에게 보여줄 것이다.

힘이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

“강사님, 수업을 듣는 학생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데, 어떻게 된 거죠?”

강습을 마치고 나오는 사희를 붙잡은 원장이 다짜고짜 다그치듯 물었다. 목소리에 쌩쌩, 찬바람이 분다. 선생님같이 특출한 경력을 가진 분이라면, 명품 교육을 지향하는 우리 학원과 안성맞춤이라며 오래오래 함께 일하자고 말할 때 보였던 간드러지는 태도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문제요? 어떤 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선생님이 지도하는 그룹 내에서 학생들끼리 다툼이 있었답니다.”

“다툼이요?”

사희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에는 대답할 생각은 않은 채, 원장은 윤광이 과도하게 돌아, 자칫 식용유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볼썽사납게 찌푸렸다.

“아니, 강사님. 강습을 맡고 계신 강사님이 그런 것도 모르고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죄송합니다만, 강습 중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제가 모를 리가 없는데 정말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게, 많아 보았자 4명의 아이로 이뤄진 소수 그룹 지도다. 1시간 지도받는 데만도 입 벌어지게 비싼 강습비를 지불해야 하는 명품강의이니 만큼, 강사는 아이들을 대할 때 그 어느 때 보다 신중해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간 깐깐한 학부모들 등쌀에 강습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안에서 다툼이라니. 무엇보다 자신이 그걸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어떤 학생이 그랬다는 거죠?”

“지금 그게 중요해요?”

“당연히 중요하죠. 어떤 학생들끼리 싸움이 있었는지 알아야 제가 무슨 일인지 짐작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오전에 학부모님께서 너무나 속상해하시면 전화를 하셨어요. 자기 아이가 꽤 오래전부터 그 그룹 내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던 것 같더라면서.”

“그러니까 그게 어떤 학생인지…….”

“학생의 자존심이 있는데 그걸 밝히고 싶겠습니까? 막말로 자기 아이가 왕따를 당했다는 사실을 어떤 부모가 공개적으로 떠들고 싶어 하겠어요? 지금 중요한 건, 선생님이 담당하는 그룹에서 그런 문제가 일어났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선생님은 그 부분에 대해 전혀 인지를 못하고 계시다는 것도 큰 문제고요. 아무튼 이 문제, 도저히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원장의 표정이 싸늘하다. 사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다음에 이어질 상황까지도 충분히 짐작게 했다.

“간과할 수 없다는 뜻은 제가 더 이상 이 강습을 진행할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사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원장이 흐음, 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입술을 강하게 앙다물었다. 자기 입으로 해고를 말하지는 않겠지만, 사희가 알아서 그만두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이 담긴 침묵이었다.

사희는 약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일어난다더니, 벌써 이번 주만 해도 그녀가 맡은 일의 절반이 줄었다.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운영 사정이 어려워 강사 수를 줄이기로 결정이 났다는 말은 양반이다. 어떤 곳은 수업시간을 그녀가 스케줄 상 도저히 올 수 없는 시간대로 갑자기 옮겨버렸고, 어떤 곳은 그녀보다 시간당 페이가 낮은 강사로 변경하게 되었으니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의 이 난데없는 통보까지.

그렇게 하나둘 자리가 줄어들더니, 이제 그녀에겐 공공기관과 연관이 된 강습 외에는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문제는 해당 일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일정이니만큼 학기가 끝나면 강습도 자연스럽게 없어진다는 것이다. 더구나 학기마다 교육청의 깐깐한 선발 과정을 거쳐 선임되는 자리이니만큼 다음 학기에도 그녀의 자리가 있다는 보장이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삶이 갑자기 거대한 모략에 휘말려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통 되는 일이 없다.

사희는 찜찜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왔다. 학원 밖에는 아이를 픽업하러 온 학부모들의 차가 즐비하게 서 있었다. 소위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는 학원이니만큼, 부모들의 차는 하나같이 번쩍거리는 외제차였다.

“어머! 강사님, 안녕하세요.”

그 틈을 헤치고 지나가는데,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사희를 잡았다. 돌아보니 그녀가 담당하고 있는 10세 반 아이들의 학부모가 서 있었다. 아이보리색 카디건을 숄처럼 두른 여자가 사희를 향해 다가온다.

‘혹시 그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학생의 부모인가? 내게 책임을 불으려는 건가?’

사희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서서 그녀를 향해 꾸벅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강사님, 마침 잘 만났어요. 그러잖아도 엄마들 사이에서 강사님 모시고 다 같이 식사 한번 하자는 말이 나와서 말이에요. 시간 괜찮으세요?”

그러나 사희의 걱정과는 다르게 그녀 앞으로 다가와 서는 여자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적어도 피해를 당한 아이의 엄마는 아닌가 보군.’

사희는 조금 마음을 놓으며 어정쩡하게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한번 시간 내세요. 엄마들이 꼭 대접하고 싶대요. 특히 민하 엄마가 얼마나 난리인지 몰라. 민하가 글쎄요. 1년이나 배웠어도 헬퍼 안 달면 불안해서 수영 안 하려던 애가, 이번에 하와이 가서 호텔 수영장을 돌고래처럼 누비고 다녔대요. 민하 엄마, 입이 아주 귀에 걸렸어요.”

“그랬군요.”

사희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해진다.

민하도 아니라면 남은 것은 이제 둘 중 하나.

사희의 눈시울이 좁아 든다. 왜인지 불안한 생각이 든다. 무언가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음험한 무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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