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농담이에요. 긴장 좀 풀라고. 편하게 대하라니까 왜 그렇게 굳어 있어요? 당신이 자꾸 그러니까 불편하게 만들고 싶잖아.”
물을 흘리듯 술술 말을 풀어놓은 동하는 천천히 사희의 손을 풀어놓는다. 손이 떠나갈 때, 그의 손가락이 사희 손등을 애무하듯 느리게 쓸었다. 사소한 손놀림일 뿐이었으나 사희는 온몸에 솜털이 빳빳하게 일고, 귀밑으로 감전된 것처럼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불편해 절로 헛기침이 나왔다.
그때, 수아가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동하의 팔을 잡았다.
“아저씨는 우리 이모랑 똑같은 이(李)예요. 우리 이모도 아저씨랑 똑같아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 우리가 성이 같네.”
동하가 사희를 돌아보며 빙긋 웃는다. 그리곤 아직 굳어있는 사희를 향해 한 번 더 농담을 던졌다.
“어디 이 씨예요?”
“그건 왜요?”
“난 괜찮은데 당신이 걱정할까 봐. 너무 걱정 말아요. 동성동본, 요샌 그런 거 그다지 문제 될 거 없다니까.”
“웃겨. 내가 왜 그런 걱정을 해요?”
“난 했는데.”
사희가 말문을 잃고 멈칫한다. 그런 사희의 얼굴을 다정하게 바라보던 동하는 큰 손으로 턱밑을 괴고,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사희를 본다.
“난 잠깐 했거든요. 그런데 강사님은 그런 생각 전혀 안 하셨다니 좋네요. 역시 구태의연하고 세속적이지 않은 사람이구나. 강사님, 갈수록 마음에 드네요. 내가 그런 여성에게 아주 호감을 느끼거든. 매력 있네요, 이사희 씨.”
사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청산유수처럼 이야기하는 동하를 기가 찬 표정으로 본다. 동하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 이것도 편하게 들어요. 그냥 하는 말이니까.”
남자는 얄밉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희를 향해 고정된 채 반짝거리는 그의 눈빛은 마치 최선을 다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겠다고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곤하게 잠든 수아의 입가에 푸릇한 오디 물이 들어있다. 사희는 아이의 입가를 손끝으로 가만히 닦아주며,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덕분에 비싼 음식 잘 먹었습니다.”
사희는 함께 차에서 내려 배웅하는 동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동하가 픽 웃음을 터트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냥 잘 먹었습니다, 정도가 훨씬 고상한 인사일 것 같은데.”
“비싼 음식이란 말을 붙여야 오늘 하신 수고가 더 값지실 것 같아서요.”
“아니, 잘못 알았어요. 나한테는 그런 게 별 의미가 없거든.”
“재벌은 다르시네요. 그럼 뭐, 나중엔 더 비싼 걸로 얻어먹어도 되겠네.”
사희가 입술을 삐죽이며 한껏 빈정거리자 동하가 다시금 피식 웃는다.
“벌써 다음을 기약하는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이라고 해요. 그래야 내가 다시 강사님을 만나러 오지. 우리 아직 끝내지 않은 이야기가 있잖아요.”
동하가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잘라 말했다.
사희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조심스럽게, 하지만 기죽지는 않은 목소리로 묻는다.
“왜 이러는 거예요, 정말.”
“말했잖아요. 당신 설득할 거라고.”
“억지 부리지 말아요. 내 대답은 끝까지 아닐 거니까.”
“두고 봅시다. 나도 지구력이라면 누구 못지않은 사람이거든. 당신이 백번을 거절해도, 난 백한 번 찾아올 겁니다.”
“그럼 백 두 번 싫다는 대답 들으실 수 있겠네요.”
“그럼 못해도 백 두 번은 만날 수 있겠네, 우리. 기대되는데?”
“내가 말을 말아야지.”
사희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데, 남자가 사희 앞으로 한 걸음 크게 다가왔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동하의 입술이 사희의 귓불 근처로 다가왔다. 사희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벅차오르는 심장 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수아를 좀 더 세게 끌어안는다.
“얼마든지 거절해요. 난 괜찮으니까. 하지만 이거 하난 알아둬요.”
“……?”
“난 계속 찾아올 거고, 그렇게 자꾸 만나면 우리, 정들 겁니다.”
귓가를 간질이는 나직한 음성에 온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걸 원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요.”
동하의 시선이 사희의 얼굴을 느리게 더듬는다. 사희는 그의 더운 눈빛이 자신의 입술에 닿은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입술에 닿았던 푹신한 느낌, 혀를 감싸던 매끄럽고 따듯한 감촉, 강하게 그녀를 압박해오던 팔의 힘까지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지자 사희의 몸은 더운 수증기를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더워졌다.
그때처럼 지금도, 남자의 눈빛은 흐렸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탐할 것처럼. 그의 눈동자 안에는 욕망의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올라 있었다. 남자의 시선에 희롱당한 입술이 간지러워 사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동하의 손이 조심스레 사희의 얼굴 가까이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작고 하얀 얼굴을 감싸고, 그때 그랬던 것처럼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사희는 송곳 위에 선 사람처럼 긴장한 채로 굳어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동하는 단호하게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얼굴 곁에서 배회하던 손으로 그저 가벼운 손 인사를 던졌을 뿐, 그는 사희의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또 봅시다. 뭐가 먹고 싶은지 생각해놔요. 다음엔 더 비싼 거로 사줄 테니까.”
우스갯말을 던져 놓은 남자가 싱긋 웃으며 돌아선다.
그와의 거리가 멀어지자, 사희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뱉는다. 숨어서 뱉은 숨결이 뜨겁다. 그의 손길이 닿지도 않았는데, 사희의 온몸은 이미 거침없는 애무를 당한 것보다 더 뜨거워져 있었다.
***
NOVA의 진정성 있는 사과, 안티를 잠재우다.
자폐아동의 회원 거부 논란에 이어, 재벌 가문 황제 강의 추문으로 물의를 빚었던 NOVA쇼핑몰(이하, 노바)의 남다른 행보가 이목을 끌고 있다. 노바의 임원진은 사건이 일어나자 즉시 사태 파악에 주력을 기울였으며, 발 빠른 사과로 비난 여론의 불씨가 커지는 것을 막았다. 또한 피해를 입은 아이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는 한편, 자폐스펙트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구의 아동들을 위한 특별 프로젝트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자칫 혜석그룹 전체 이미지에 누가 될 뻔했던 이번 일을 분위기를 반전시킨 현명한 대처에는 노바의 새로운 사령탑으로 합류한 이동하 전략기획본부장의 지휘가 빛을 발했다고 전해진다.
여타의 재벌 갑질 사례와 비교되는 행보는 위기에 처했던 노바에 전화위복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행보의 중심에 선 이동하 본부장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신문을 읽는 윤여화의 눈매가 날카롭게 일그러졌다. 신문마다 도배된 각종 기사는 그녀가 가장 경계하던 것들이기도 했다. 신문을 던져 놓는 여자의 손이 바르르 떨린다. 섬쩍지근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여자는 잠시 숨 쉬는 것을 잃은 사람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비로소 이성을 되찾은 그녀가 곁을 지키고 있는 비서를 돌아본다.
“윤재화 전무, 들어오라고 해.”
***
“누님,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윤재화 전무는 파들거리는 윤여화를 달래며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동하의 이름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어선 안 돼. 주주들 머릿속에 그 애가 인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겨우 이번 한 번이에요. 그나마도 사고 수습하는 내용일 뿐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윤여화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윤재화도 더 이상은 태연한 태도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던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슨 뜻인지 잘 알았습니다. 제가 들어가는 대로 경민이 관련해서 기사가 나올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경민이는 좀 어떠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자꾸만 엇나가. 일전엔 날 두고 협박까지 하더라. 승계고 뭐고 다 손 놓겠다고…….”
윤재화는 앞뒤가 짧아 선한 인상을 주는 눈썹을 들었다 놓으며 쩝 입맛을 다셨다. 그리곤 두꺼운 손가락을 겹쳐 마주 잡아 배 위에 올려놓는다.
“괜한 소립니다. 누님한테 그게 가장 큰 협박이 된다는 걸 알고 더 그러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그러지 않았습니까. 걸핏하면 다 그만두겠다고…….”
“전 같지가 않았어. 그냥 하는 소리 같지 않았다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너무 품 안에 자식처럼 그러지 마세요. 성인입니다. 결혼해 자식까지 있는 아들, 언제까지 그렇게 숟가락으로 밥 떠먹이시려고요?”
“제멋대로 한 그 결혼 때문에, 그 녀석이 힘을 못 쓰고 있잖니.”
윤여화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경민이 조력자가 되어줄 가문과 합을 이루지 못해 힘을 받지 못하는 것이 두고두고 불만인 그녀였다. 그런 누님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윤 전무는 그저 무거운 한숨을 내쉴 뿐이다.
“이제 와 뭘 어쩝니까. 경민이 아들까지 낳은 며느리 ,내쫓으시게요? 누님, 그랬다간 아시죠? 경민이 진짜 큰일 냅니다. 그땐 아무도 못 말려요.”
“어디 반푼이 같은 걸 낳아놓고는……. 이번 일만 해도 다 그 녀석 때문에…….”
윤여화는 짓이기듯 혼잣말을 하던 것을 멈추고 크게 한숨을 몰아쉰다. 한 번만 더 자기 아들을 모욕했다간 가만히 있지 않겠다던 경민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는 최선을 다해 숨겼어도, 윤여화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사람은 역시 아들인 경민이었다. 가장 아픈 손가락이자 가장 두려운 손가락. 윤여화는 바르르 떨리는 손을 접어 꽉 쥐었다.
“재민이는 여전합니까? 뭐,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면서요. 자폐니, 뭐 그런 것도 아니고. 아기 때만 해도 제법 똘똘하지 않았던가요?”
“그 이야기는 그만둬. 골 아프다.”
윤여화는 정말 흔들리는 골을 잡겠다는 듯이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뭐, 모르지 않겠습니까? 경민이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지도…….”
흘리듯 이야기하는 윤 전무의 목소리에, 윤여화가 고개를 든다. 두통으로 반쯤 감긴 눈을 힘주어 떴는지 눈두덩이 우물처럼 깊게 팼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빛이다.
“경민이가 언제까지 외골수처럼 한 곳만 보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싫증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녀석이에요. 시들해지는 날 올 겁니다. 그러니 그냥 기다리세요. 괜히 맘 쓰지 마시고. 우리 누님, 그러다 얼굴에 주름 생깁니다. 고운 피부 망가져요.”
윤 전무는 엄지손톱만한 흑진주 반지가 끼워진 누이의 마른 손등을 툭툭 두둔하며 눈을 꿈쩍 감았다 떴다.
남동생의 감언이설이 싫지만은 않은 듯, 잔뜩 찌푸렸던 윤여화의 이맛살이 조금 반반해진다. 역시 윤여화의 불안과 짜증을 달랠 수 있는 사람은 윤재화 하나뿐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