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51화 (52/109)

#51

어차피 시치미를 떼 보았자, 믿을 사람 같지도 않아 사희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희는 태연하게 표정을 바꿔 동하를 돌아보았다.

“좋아요, 솔직히 인정할게요. 그쪽 껍데기가 본인도 잘 아시겠지만, 아주 훌륭해서 눈이 좀 즐거웠어요. 그래서 좀 관심이 갔어요. 아니 호기심이 생겼어요. 어쩌다 보니 의도치 않게 자주 마주쳤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친분이 생겼던 것도 인정해요. 그런데 그게 전부예요.”

“그게 전부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날 밤 일은……, 아시다시피 우리 좀, 취해있었어요. 그냥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뿐이에요.”

“그럼 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던 말은 뭐였지?”

동하가 짙고 선명한 눈썹 한쪽을 의미심장하게 올려 뜨며 은밀한 음성으로 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당신이 날 마냥 편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선을 그은 것뿐이에요. 고작 키스 한 번에 몇백 미터쯤 관계를 앞서가는 사람들, 너무 많으니까. 그런 구태의연하고 세속적인 관계로 얽히고 싶지 않아서 한 말이었을 뿐이에요. 혹시 그 말이 당신에게 오해를 일으켰다면, 미안하게 됐네요.”

사희는 일부러 더 되바라진 말투로 차갑게 말했다.

“나한테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믿든 말든 그것까지는 내 알 바 아니죠. 하지만 사실이에요.”

“한순간 호기심이었을 뿐, 이젠 아니다?”

뜨겁게 타오른 동하의 눈이 사희를 오래도록 쏘아보았다. 사희는 흔들리는 눈빛을 지우려는 듯, 눈꺼풀을 빠르게 몇 번 깜박였다. 그녀의 그런 사소한 행동에도 자꾸만 기대를 걸게 된다. 하지만 사희는 그가 기대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했어요.”

동하의 눈빛이 일순 차갑게 식었다. 그리곤 곧 무언가 결심한 듯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됐네요. 나도 나한테 관심 없다는 사람, 계속 여자로 볼 마음 없어요.”

사희는 왜인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도록 만들었으면서, 막상 그런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저린 이 이율배반적 감정은 왜일까. 마음이 혼란스럽다.

“자, 이제 당신과 나 사이에 불편할 일은 없어요. 당신도 날 남자로 보지 않고, 나 역시 이제 당신을 여자로 보지 않을 거니까. 이제는 서로를 쿨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볼 수 있겠군요.”

“…….”

“이제 더는 거절할 이유가 없죠? 아마 없어야 할 겁니다. 자고로 핑계가 길어지면 그게 거짓말일 확률이 높아지는 법이니까.”

동하는 입술을 끌어당겨 싱긋 웃는다.

사희는 입술을 말아 문 채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표정이 왜 그래요? 꼭 서운한 것처럼. 내가 이제 당신 여자로 안 본다니까 좀 후회됩니까?”

동하는 이제 숫제 놀리기라도 하듯 빈정거리는 투로 사희를 자극했다.

“멋대로 상상하지 말아요.”

사희는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담아 단호하게 남자를 한번 노려 본 뒤, 흘러내린 수아를 번쩍 치켜 안았다. 그와 동시에 수아의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 덩어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모, 내 아이스크림…….”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본 아이는 금세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미 바닥에서 질펀하게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을 잡기라도 하겠다는 듯 버둥거렸다.

그 덕분에 팽팽하게 맞서던 두 사람의 긴장이 조금 와해되었다. 사희는 그 틈을 타 얼른 수아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문수아. 뚝!”

“아이스크리임……. 내 아이스크림……!”

사희가 수아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달래보았으나, 이미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아이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아저씨가 사줄게. 지금 그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더 크고 맛있는 걸로 사줄 테니까 그만 울어.”

동하가 수아의 등에 손을 얹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랜다.

수아는 울음을 그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동하를 돌아본다. 그리곤 이모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살짝 입을 열었다.

“그러면……, 초콜릿 묻은 거 먹어도 돼요?”

“그래, 초콜릿 잔뜩 들어간 거로 사줄게.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

동하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수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정하게 아이를 달래는 남자를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보고 있던 사희는, 곧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사희는 저도 모르게 흡, 숨을 삼켰다.

동하는 당황해서 붉어진 여자의 뺨과 귀를 차례로 보다가 입 안으로 희미하게 웃음을 삼켰다. 남자는 손목 깃을 살짝 당겨 시간을 확인하더니,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녁 같이합시다.”

“……?”

“언제까지 길바닥에 서서 떠들 수는 없잖아요. 조카에게 초콜릿 아이스크림 사주기로 약속도 했고. 밥 먹으면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죠. 이사희 씨가 원하는 조건도 이야기해 보시고.”

사희는 기가 찬다는 듯 하,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동하는 사희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표정을 한결 더 분명히 할 뿐이었다.

“물론 밥은 내가 사요. 얻어먹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누가 그런 걸 걱정한대요?”

“표정 풀어요. 자꾸 그렇게 못 볼 것을 본 표정으로 있으니까 아이가 겁먹잖아. 또 울릴 셈이에요?”

동하의 말대로 수아는 툭 건드리면 또다시 눈물을 터트릴 기세였다. 사희는 수아의 고개를 감싸 가슴에 품곤 남자를 흘겨보았다. 매섭게 쏘아보는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동하는 사희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본다.

“당신 전에 나한테 그랬어. 내가 노바의 주인이 되어도 나랑 편히 앉아서 맥주 마셔줄 수 있다고.”

“.......”

“그 말 지켜요. 날 자꾸 불편해하면 나 당신 오해할 거야. 당신이 나를 여전히 남자로 보는 거라고. 오해받기 싫으면 분명하게 행동해요. 조금이라도 그런 내색 보이면…….”

동하는 사희의 눈을 마주 본 채, 바람처럼 속삭였다.

“그때는 내가 당신을 정말로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

오가닉 푸드로 이름을 알린 스타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홀은 이미 만석이었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중한 거절을 받은 사희가 어정쩡하게 돌아섰을 때,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잠시 뒤처져 있던 동하가 홀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에서 식사를 좀 하고 싶은데.”

남자의 그 한 마디가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바꾼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던 말이 무색하게, 세 사람은 레스토랑의 가장 큰 룸으로 안내되었다.

음식은 삼삼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부분의 오가닉 푸드가 그러하듯 특별한 맛을 찾을 수 없게 심심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굉장히 훌륭했다.

갖가지 종류의 베리가 잔뜩 올라간 플랫브레드를 먹으면서 수아는 몇 번이고 엄청 맛있다, 감탄사를 뱉었다. 워낙 입이 짧아 매번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이가 이렇게까지 무얼 맛있게 먹는 걸 본 적이 없었으므로, 사희도 덩달아 조금 신이 났다.

“꼭꼭 씹어서 먹어, 수아야.”

수아를 보고 있는 사희를, 역시 아까 전부터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물었다.

“조카 이름이 뭐예요?”

“수아예요, 문수아.”

“예쁜 이름이네요.”

입가에 오디 물을 들인 수아가 불쑥 동하를 향해 묻는다.

“아저씨는 한자로 이름 쓸 줄 알아요?”

수줍음이 많은 편이라 누구에게 쉽게 말을 거는 아이가 아닌데,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던 그의 말이 둘 사이에 모종의 끈끈한 유대를 만든 모양이었다.

“한자?”

“나는 쓸 줄 아는데.”

수아는 또다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꼼지락꼼지락 제 한자 이름을 적어갔다.

“똑똑하네.”

동하는 아이의 동그란 정수리를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림처럼 고요하게 웃은 남자는 수아 쪽으로 몸을 좀 더 기울었다. 그리곤 아이가 했던 것처럼 테이블보 위에 자기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적기 시작했다.

“아저씨 이름은 이동하. 이 李 동 棟 하 昰.”

사희는 이름을 적어 내려가는 남자의 손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 공들여 만든 골조에 얇은 한지를 바른 것처럼 고운 윤곽이 드러나는 손가락과, 손등부터 손목까지 굽이치며 길을 내고 있는 푸른 혈관도 보인다. 단정하게 자른 손톱 위, 낮달 같은 조반월도 마저 보았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기도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크고 예쁜 손이었다.

하여튼 이 남자, 껍데기만큼은 정말이지 완벽 그 자체였다. 도에 지나칠 만큼 취향을 관통한다. 한 번도 그런 걸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사희에게 이상형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지체 없이 이 남자의 얼굴을 제일 먼저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 보이는 손등에 가만히 제 손을 얹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인다. 입은 거짓말을 해도, 마음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마음에 입술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나마 이렇게라도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그가 저의 손을 잡았던 그날 밤의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그때 그 손을 뿌리쳤다면, 감정이 이렇게 엉키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후회해보았자 이미 늦었다. 그리고 설령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손을 결코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란 것도 안다. 다시 한번 목소리가 없는 마음 덕에, 속내를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뚫어지겠네.”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사희는 동하의 낮은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부터였는지 남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박고 있었다.

사희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화끈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를 놓치지 않고 동하가 사희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인다.

“내 손 보면서 무슨 생각 했지?”

“아무 생각 안 했어요.”

“얼굴만큼이나 손도 잘생겼다는 생각, 안 했습니까?”

“안 했어요.”

“그러면 한번 잡아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완벽하게 속내를 들킨 사희는 당황했다. 사희의 검은 눈동자가 우왕좌왕 갈피를 잃고 흔들리자, 동하는 보다 짓궂은 투로 빈정빈정 그녀를 놀렸다.

“역시 했구나.”

동하는 입가에 엷은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아뇨! 꿈도 야무지시…….”

사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하의 큰 손이 이불처럼 포근하게 사희의 손을 덮었다. 그리곤 빼내려고 하는 여자의 손 전체를 꽉 한번 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