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어린이집에서 수아를 픽업해 돌아오는 길.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남은 한 손으론 이모의 손가락을 잡고 걷는 수아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수아, 기분 좋아?”
“응. 매일, 매일 이모가 데리러 오면 좋겠어.”
수아는 소리를 꽥 지르더니, 아이스크림이 묻은 입술을 벌려 천진하게 웃는다.
“문수아. 너 솔직히 말해. 아이스크림이 좋은 거야, 이모가 좋은 거야?”
이럴 때 다른 아이들이라면 없는 말이라도 지어서 할 법한데, 도통 여우 같은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수아는 그저 겸연쩍다는 듯 배시시 웃기만 한다.
그래, 그래야 내 조카지. 피를 어떻게 속이겠니.
사희는 수아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주며 빙그레 웃는다.
달에 한번, 수아를 데려와 집에서 재우는 날이면 사희는 조카에게 꼭 맥도날드의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준다. 입이 짧은 통에 통 밥을 먹으려 하지 않아서 웬만하면 군것질을 시키지 않는데, 이것만은 예외다.
이는 일종에 포상이다. 너도, 나도 지난 한 달 동안 수고가 많았다는 뜻에서 내리는 상.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뭐 배웠어?”
“한자로 이름 쓰는 법.”
“그렇게 어려운 것도 배워?”
아무리 한글에 구구단도 모자라 어지간한 영단어까지 떼고 학교에 들어가는 선행학습시대라곤 하지만 한자는 좀 너무하지 않나 싶어 사희는 혀를 찬다.
수아는 입가에 번진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허공에 대고 시키지도 않은 한자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빼어날 수, 예쁠 아. 수아. 사희는 자기 눈에는 빼어나게 예쁘다는데 의심이 없는 조카의 볼에 진하게 입을 맞춘다.
“이야. 우리 수아, 대단한데?”
“이모는 한자로 이름 쓸 줄 알아?”
“그럼, 이모도 쓸 줄 알지.”
사희는 조금 전 수아가 그랬던 것처럼 허공에 대고 한자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이모 이름은 모래 사(沙)에, 여자 희(姬), 사희.”
“그럼 엄마는?”
“네 엄마는……”
네 엄마 이름은 강 강(江)에, 여자 희(姬).
네 엄마랑 나는 강물과 모래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는데. 내가 무심했던 사이, 언니는 강처럼 젖은 마음으로 얼마나 홀로 외롭게 살았던 걸까. 내가 모래처럼 메마른 마음으로 살게 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콧날이 시큰해진다.
사희가 막 여자 희의 마지막 획을 그었을 때였다. 여자의 손가락 끝에 익숙한 실루엣이 걸렸다. 말쑥한 셔츠에, 구김 없는 블랙 슈트를 입은 장신의 남자, 이동하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사희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그를 만날 거라곤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하물며 여기는 사희의 집 앞이었다. 사희는 자기가 뭘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잘 지냈어요?”
눈을 끔뻑거리며 인사를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희를 향해, 동하가 다시 물었다.
사희의 흑갈색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너무 놀라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왜겠습니까? 눈앞에 있는 사람 때문이지.”
남자는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날 만나려고 왔단 뜻인가요?”
“그래요.”
“내가 여기에 사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내겐 별로 어려운 일 아닙니다.”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아. 알아내지 않으려는 게 되레 더 어려웠지. 동하는 씁쓸한 표정을 애써 지우며 묵묵히 대답했다.
사희는 굳은 표정의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내 수아의 손을 잡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이거 명백한 사생활 침해예요. 이런 돼먹잖은 수작을 부리면 여자들이 좋아할 거라고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번지수 잘못 찾았어요.”
“수작 부리러 온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지 않아도 돼요.”
“아, 그렇게 느끼셨어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도 알겠네요. 돌아가세요. 경찰 부르기 전에.”
사희는 수아를 번쩍 들어 안고 돌아섰다. 종종걸음을 치는 사희의 등 뒤로 동하의 낮은 음성이 들려온다.
“나랑 일합시다!”
뛰어가려던 사희가 우뚝 걸음을 멈춘다.
“나랑 일해요. 그 이야기를 하러 왔어요.”
“그 이야기라면 더 할 말 없어요. 난 이미 거절했어요.”
“이번에도 역시, 내가 불편해서요?”
“네, 잘 아시네요.”
“왜 불편합니까?”
“그거라면 이미 충분히 말했어요.”
“보안요원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노바의 본부장이어서?”
사희는 수아를 안은 팔에 힘을 꽉 준다. 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온전히 그 이유만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머뭇거리고 있는 사희의 등으로 동하의 다음 질문이 날아와 박혔다.
“당신이 느끼는 불편은 사람마다 다른 기준으로 일어납니까?”
사희는 알 수 없는 동하의 말에 인당으로 좁게 눈썹을 모으며 돌아섰다. 사희와 눈이 마주치자 동하는 한 번 더 다그치듯 물었다.
“이경민 부사장 차에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탈 수도 있으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못해요?”
“……?”
“뭐가 다른 겁니까? 한 사람은 혜석그룹의 부사장이고 난 일개 본부장 따위여서 그럽니까?”
사희는 황당한 표정으로 동하를 보았다. 동하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굳어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경민 부사장이 보낸 차를 탔다는 것이 굉장히 못마땅하다는 듯. 몹시 화가 난 표정이었는데, 한편으로는 그가 굉장히 서운해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질문은 내가 먼저 했어요.”
사희는 눈을 가늘게 찌푸린다.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그가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내가 당신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건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사희는 복받치는 마음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해를 풀고 싶다. 난 그런 속물스러운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고. 당신, 날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으로 본 것이냐고, 정말 서운하다고도 외치고 싶다.
하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와중에도 그가 저를 좋은 모습으로 보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미련한 욕구가 그저 우스울 뿐이다.
“부사장이고 본부장이고, 나하고는 아무 상관없어요. 나한테는 다 똑같거든. 내겐 당신들, 힘없는 사람들 쉽게 보고, 멋대로 이리저리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인간들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에요.”
사희는 하고 싶은 말을, 목이 아프도록 꾹 눌러 담곤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똑같다?”
동하가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찡그린다.
“그래요. 똑같아요. 누군 일방적으로 해고하고, 누군 또 같이 일을 하자고? 온 가족이 사람 하나 바보 만들자고 짰어요? 당신들은 내가 그렇게 우스워?”
“해고를 당했다고요?”
동하의 눈이 번쩍 커진다.
“그래요. 해고됐어요. 그 댁은 가족끼리 대화를 잘 안 해요? 왜 이렇게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 거예요, 피곤하게!”
계약이 종료되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던 말이, 실은 해고였던 모양이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파악하려는 동하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흔들렸다.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사희와 이경민의 관계가 그가 경계하는 그런 게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 순간, 부글부글 끓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부사장이나 본부장이나 다 똑같은 것들이라는 말은 동의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녀가 이경민에게 기울어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뜨겁게 치솟았던 분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이렇게나 유치할 수 있는 것인가. 동하는 위아래로 크게 널뛰는 자신의 상태에 살짝 기가 찼다.
차갑게 쏘아대는 사희의 목소리에 놀란 수아가 목덜미를 세게 끌어안는다.
“이모……, 무서워.”
“괜찮아, 수아야. 너한테 그러는 거 아냐.”
수아의 엉덩이를 토닥이는 사희의 모습을 골똘하게 바라보던 동하가 이윽고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안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 줄은 몰랐어요.”
“됐어요. 이미 다 지난 일이에요. 아무튼 난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돌아가세요.”
“내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어요.”
돌아서려는 사희를 동하의 목소리가 다시 붙들었다.
“또 뭐가 남았죠?”
“나, 당신이랑 일할 겁니다. 당신을 꼭 설득시킬 거거든.”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당신 불편하다고.”
“안 통해요. 거짓말인 거 아니까.”
동하가 사희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다가온 만큼 뒷걸음치려던 사희는 이내 동하의 손에 붙들렸다.
“부사장, 본부장을 한꺼번에 싸잡아 똑같은 놈 취급할 수 있는 겁 없는 당신이, 내가 본부장이어서 불편하다고 하는 핑계가 아직도 통할 거라고 생각해요?”
“…….”
“안 통합니다. 그러니 진짜 이유를 알아야겠어요.”
사희는 정말 당장 그녀의 속내를 까발리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번득이는 동하의 눈빛에 긴장했다. 절로 마른침이 넘어간다.
“난 아무래도 당신이 느끼는 불편함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느껴지거든.”
동하가 사희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남자의 큰 키 때문에 사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혹시 당신, 나 남자로 봅니까? 그래서 불편합니까?”
사희의 눈동자가 등잔만큼 커졌다. 무어라 대꾸를 해야 하는데 풀이 붙은 것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해봤어요. 당신이 왜 날 불편해하는지. 몇 날 며칠 머리가 터질 만큼 생각했어.”
동하는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찡그렸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 짜증과 함께 짙은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몇 가지 이유가 떠올랐는데, 끝내 하나로 결론이 났어요. 당신, 날 남자로 보는 걸까?”
“미쳤어요?”
“난 그렇거든. 나 당신, 여자로 봤거든. 내가 그날 당신에게 입을 맞춘 것도…….”
“그만해요!”
사희는 붉어진 얼굴을 모로 돌리며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말해 봐요. 당신도 그런 겁니까?”
동하의 목소리는 차라리 애원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