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49화 (50/109)

#49

“안녕하세요. 저는 강사 황정아라고 합니다.”

프로젝트의 담당자로 선정이 된 사람은 수더분한 인상에 말씨가 상냥한 여자였다. 스포츠센터 소속 강사 중 가장 고참에, 강사 경력도 가장 긴 데다, 회원들이나 직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다는 설명은 이미 들었다.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들으셨나요?”

“네, 들었습니다.”

정아는 차분한 말씨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외부 강사는 아직 선정 중에 있습니다. 특수교육 쪽으로 경력이 있는 강사로 신중을 기해 영입할 겁니다. 모쪼록 함께 책임을 다해 프로젝트를 진행해주시기 바랍니다. 당분간 해당 사업 전결권은 내게 있으니, 궁금한 사항이나 건의하실 내용이 있으면 직접 본부장실을 찾으시면 됩니다.”

동하를 설명을 마치자, 정아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약간 주저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세요. 주저 마시고.”

정아의 기색을 눈치챈 동하는 그녀가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도록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외부 강사를 선정 중에 계시다고요.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라면 저도 강사를 한 명 추천해도 될까요? 마침 적임자가 있어서요.”

동하의 눈이 살짝 찌푸려진다. 여기서도 지인 끼워 팔기인가?

그렇지만 이토록 당당하게 추천을 하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용기가 가상해 한번은 들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현장을 직접 지휘할 사람이 그녀이니, 저와 잘 맞는 사람과 일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었고.

“얼마나 적임자이기에 이렇게 직접 청탁을 하시는지 궁금하군요.”

동하는 일부러 웃음기를 섞어 물었다. 농담조였지만, 질문에는 뼈가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별반 긴장하는 기색 없이 빙긋 웃었다.

“청탁 아니에요. 후보자에 추천하는 것뿐인걸요. 잘 봐달라는 뜻도 아니에요. 그런 인사가 없이도 충분히 자질이 있는 친구여서.”

자신감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래요. 추천해보세요.”

“문제가 됐던 혜석그룹의 VIP 고객을 직접 강의했던 수영강사입니다. 이사희 강사라고, 국가대표 출신 인재고요. 특수교육 석사과정을 전공했으니 자격도 충분하고요.”

동하의 눈썹이 일순 움찔했다. 이사희라고?

동하는 다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정아를 보았지만,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에 의뭉스러운 구석은 없어 보였다.

“그 강사라면 외부 인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모르셨군요. 이사희 강사는 이 문제가 거론되기 훨씬 전에, 이미 계약이 해지되어 노바에 출근하지 않고 있어요.”

펜을 쥔 동하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우연이라도 한번을 마주치지 않기에, 일부러 저를 피해 다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실은 훨씬 전부터 이곳에 나오지 않았다니. 그녀를 오해했던 시간이 조금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리도 동시에 그가 이사희의 존재를 잊어버리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일부러 없는 사람인 양, 그쪽에 일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토록 애써서 잊고 있었는데, 그저 단 한번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장벽이 허물어지듯 이사희가 그의 마음 온갖 군데에서 사정없이 튀어나왔다. 마치 스프링이 달린 인형이 상자를 박차고 튀어 오르듯 여기저기에서, 막을 수도 없이.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아련함 같기도 했고, 원망스러운 마음 같기도 했고, 그리움 같기도 했으며, 불안 같기도 했다. 애써 덮어놓았던 마음이 다시 크게 일렁이더니, 잊고 있던 불편함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본부장님?”

정아가 부르는 소리에 동하는 복잡한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정아는 한참이나 그를 불렀던 모양이다. 그녀는 완전히 넋이 빠진 것처럼 다른 생각에 잠겨 부르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있던 동하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계속하세요.”

“이사희 강사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 생각엔 황제 강의 논란이 일었던 당사자가 직접 해당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면, 여론도 노바가 충분히 반성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아의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동하는 입술 안쪽 연한 살을 질근질근 물었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선, 여자를 잠시 물끄러미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력서 제출하라고 전해주세요.”

***

-안 한다고?

전화 너머에서 따갑게 목청을 높인 정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의 제의를 쌍수를 들고 반겨줄 거라 생각했던 사희가 내놓은 거절이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사희는 심란한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해요.”

-왜? 이거 하면 사희 쌤, 지금처럼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메뚜기 강의 안 해도 되는데 왜 안 하겠다는 거야? 정직으로 채용될 가능성도 높고. 보수도 좋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다다 쏘아대는 정아의 목소리가 모터를 단 듯 빠르다.

“노바 정직원 될 마음 없어요. 저 곧 다시 공부할 거예요.”

-그래, 누가 공부하지 말래? 그래도 그전까지는 돈 벌어야 하잖아. 그래서 지금 그렇게 무리해가며 뺑뺑이 돌고 있는 거 아니야?

“……무리 아니에요.”

-아니긴! 힘 남아도는 새파랗게 어린 남자 강사들도 그렇게까지는 안 해. 그리고 이 일, 사희 쌤 하는 공부에 도움이 됐으면 됐지, 안 될 일 전혀 없잖아. 안 그래?

“…….”

“잘 생각해 봐. 지금 사희 쌤, 강의 몇 개나 해? 돌아다니면서 길에 뿌리는 돈도 만만치 않을 텐데. 수강생 떨어지면 폐지되는 하루살이 강사 생활보다야 일정 기간이라도 안정된 일을 하는 게 훨씬 좋지. 그런 건 나중에 다시 학교 다닐 때, 아르바이트로 해도 충분하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보수도 높고.”

정아는 도통 물러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선생님, 저한테 더 말씀하셔도 제 대답은 하나예요. 저 안 해요.”

사희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혜석그룹에 감정이 남아서 그래? 그래서 싫은 거야?

이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호한 사희의 태도에 살짝 기가 꺾인 정아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사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감정이 남은 것은 사실이다. 하나 혜석그룹에 대한 감정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품고 있을 가치도 없는 그런 모욕적인 일 따위, 기억할 가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 안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지워내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있다. 그녀를 올무처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위험한 감정. 바로 이동하에 대한 마음이다. 그 감정의 발원지인 그 남자를 다시 만나서는 안 된다.

“네, 그래서 싫어요. 다시 노바에 가고 싶지 않아요.”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 사희는 정아가 무슨 말을 더 꺼내려는 걸, 바쁘다는 핑계로 막고 허둥지둥 전화를 끊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환장할 일이다. 고작 그 남자의 이름 석 자를 들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심장이 날뛰는데, 그곳에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냔 말이다. 안 될 일이다. 사희는 더는 생각하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털어버렸다.

***

최종으로 취합된 이력서를 검토하던 동하는 그 안에서 끝내 이사희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를 추천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다소 불편한 기분이었는데, 정작 그녀가 리스트에 없으니 심기가 그 전과 비할 바 없이 더욱더 불편해졌다.

“전에 말씀하셨던 그 강사는 이력서가 없더군요?”

보고를 마치고 돌아나가는 정아에게 동하가 넌지시 물었다.

“아, 그게…….”

정아의 표정이 조금 난처해지더니 곧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사희 강사가 거절했어요.”

동하의 짙은 눈썹이 아찔한 각도를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거절이요?”

“네, 아무래도 문제가 있었던 자리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좀 부담스러운가 봅니다.”

“이사희 강사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되묻는 동하의 목소리에 약간의 감정이 실렸다.

“아, 아니요. 이사희 강사가 그렇게 말한 건 아니고요. 이건 그냥 제 생각입니다.”

정아가 황급하게 손을 저으며 부인했지만 동하에게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강하게 거듭 부인하는 그 태도가, 이사희의 강한 거절을 상징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정아는 눈에 보이게 딱딱하게 굳은 동하의 표정에 긴장한 듯 눈치를 살핀다. 동하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마음을 다스렸다.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보세요.”

정아가 나가고, 문이 닫히기 무섭게 동하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데스크 위에 세게 던져 놓았다. 파일을 빠져나온 문서들이 팔랑팔랑 흩어져 바닥으로 흩어진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이렇게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퓨즈가 끊기듯 이성을 놓치는 것은 평소의 이동하라면 결코 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신이 끈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이리저리 나부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끈을 쥐고 있는 사람은 그 여자, 이사희일 테고.

더 이상 묻어둔다고 삭는 감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 끈을 완전히 잘라버리든, 아니면 그 끈에 속절없이 묶여버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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