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48화 (49/109)

#48

“어제 저희 방송에서는 자폐 스펙트럼을 보이는 어린이의 회원등록을 거부해 한차례 물의를 일으켰던 N쇼핑몰 산하의 한 스포츠센터 사건을 전해드렸지요. 그런데 이 스포츠센터에서 비슷한 증세를 가진 재벌그룹 손자를 상대로, 일명 황제 강의가 이뤄졌다는 폭로가 나와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해당 수영장에서 근무했던 A씨의 고발에 의하면…….”

이어지는 내용은 누구보다 사희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최근 스포츠센터로부터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몹시 격앙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니셜을 이용해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누가 보아도 혜석그룹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회원들에게는 수질검사 시간으로 안내가 나간 시간에, 사실은 총수일가의 황제 강의가 이뤄졌다는 이야기는 그러잖아도 반감을 사고 있는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거액의 회원권을 끊은 일명, VIP회원과 일반회원 간의 차별대우에 대해서도 심층적으로 언급되자 분위기는 거의 수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뒤로도 방송은 인권의 사각지대, 빈부격차, 현대판 계급제도, 갑질 폐해 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한참 쏟아놓았다.

“인권위는 해당 스포츠센터의 인권침해 사례를 심층적으로 조사하겠다는 입장인데요. 현재 해당 아동과 비슷한 피해를 입은 부모 연대는 스포츠센터를 상대로 위자료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뉴스는 거기에서 끝났다. 화면이 기나긴 광고로 넘어가자 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곧 흥미를 잃고 흩어졌다. 하지만 사희는 여전히 그 앞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여러 가지 감정들 가운데에서도 도드라진 하나의 마음이 그녀의 다리를 묶어놓고 있었다.

잠시 후, 복잡한 생각에서 빠져나온 사희가 얼른 로커 쪽으로 뛰어갔다. 가방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사희는 저장된 전화번호를 뒤졌다. ‘받지 마!’, 익숙한 저장명 앞에서 사희는 잠깐 손가락을 멈추었다.

‘당신, 괜찮은 거야?’

가슴에 돌을 얹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조금 망설이던 사희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다른 번호 하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머, 사희 쌤!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 난 통 연락이 없기에 은근히 섭섭해하던 참이었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정아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그냥저냥. 사희 쌤은 어떻게 지내?”

“저도 비슷하게 지내요. 여기저기 강습하고.”

두 사람은 한참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 싱거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사희가 그냥 안부만 묻겠다고 전화를 할 사근사근한 여자가 아닌데……. 설마…… .시집 가?”

사희가 단지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를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눈치챈 정아가 다소 의아한 목소리로 농담 섞은 질문을 했다.

사희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뉴스 봤어요.”

“아……, 그거. 사희 쌤도 봤구나?”

“네…….”

“안 그래도 요새 전화 걸어오는 사람마다 다 그 이야기야.”

“괜찮……으세요?”

“나야 뭐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지. 그런데 여기 분위기는 아주 별로야. 사실 그게 노바 정식 소속 강사가 그런 게 아니고, 특수교육 쪽으로 초빙했던 외부강사가 그런 거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지 뭐. 괜히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상황이니까.”

“그렇군요…….”

“거기다 갑자기 혜석그룹 손자 강습 이야기까지 튀어나와서 엮이는 바람에……. 그러고 보니 사희 쌤도 뉴스 보고 놀랬겠다. 그래도 걱정 마. 너한테는 절대 피해 안 갈 거야.”

“그런 걱정 안 해요, 저.”

“그럼 정말로 내가 걱정되어서 연락한 거야? 이야, 이사희 철들었네. 진짜 감동이다.”

정아의 말에 사희는 겸연쩍은 듯 입술을 꾹 물었다. 정아에 대한 걱정이 아주 없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사실 사희가 진짜 궁금해하고 걱정했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걱정 마. 곧 괜찮아질 거야. 새로 온 본부장이 일 처리가 빨라. 사무실 사람들 말로는 일 터지자마자 긴급회의 소집하고 해결책 찾고 있대.”

“본부장이요?”

사희의 목소리에 반짝 반색이 어린다.

“응. 의외지? 사실 이런 일 있으면 총수 일가 사람들은 뒤로 숨기 바쁜데, 자기가 되레 먼저 나서서 해결하는 걸 보면. 어영부영하지 말고 제대로 사과하고, 수습하라고 본부장 특별 지시가 떨어졌대. 아마 오늘쯤 대표이사 사과문도 올라갈걸?”

정말로 궁금했던 사람의 안부를 듣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희는 수화기를 붙들고서 몇 번이고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큰일이 없다면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마음이 싸하게 시리다. 아무래도 그의 이름이 잊힐 날은 조금 더 미뤄질 것 같다.

***

대표이사의 사과문이 올랐다. 변명의 여지를 남기지 않은 진정성 있는 자필 사과문이었다. 대표이사의 자필 사과문은 들끓던 여론을 진정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다.

사과문 외에도 노바는 인권위의 권고대로 직원 교육을 약속했다. 스포츠센터 직원뿐만이 아닌 대표이사를 포함한 노바쇼핑몰 전 임직원이 교육받겠다 약속한 점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산 것은 노바가 약속한 한 프로젝트였다.

내용인즉슨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보이는 지역거주 아동을 대상으로 주에 한번 노바의 풀장 무료 개방을 약속하고, 전문 강사를 초빙해 특수교육 강좌를 개설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회의가 한창인 회의실의 분위기는 사뭇 얼어붙어 있었다.

“취지는 좋으나, 기존 이용회원들에게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점이 우려됩니다.”

레저사업부 부장의 표정에 적잖은 걱정이 어려 있었다.

“반감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동하가 메모를 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피로로 꺼진 눈두덩 때문일까, 눈빛이 한결 깊다.

“노바의 스포츠센터는 60%이상이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는 고품격 프리미엄 서비스입니다.”

“그래서요?”

“자폐 아동들이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 아무래도 센터 이미지에 좋지 않습니다. 기존 회원들의 이용이 확실히 적어질 겁니다. 이에 따른 컴플레인도 있을 게 분명하고요. 단발성 행사라면 몰라도,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일은 너무 무리이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상 대표이사님의 사과문과, 직원 교육만으로도 노바가 질 수 있는 책임은 다한 셈입니다. 여론도 금방 잠잠해질 거고요.”

몇몇 임원들이 부장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동하의 반반한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동하는 만년필 뚜껑을 닫아 자리에 내려놓으며 느슨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둘러앉은 이들을 느리게 훑어본다.

“부장님, 일전에 제게 노바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동하의 느닷없는 질문에 레저사업부 부장이 두 눈을 크게 깜박였다. 남은 사람들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무슨 소릴 하려나 싶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부장을 향해 동하가 다시 묻는다.

“NOVA의 정체성 자체가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생활 전반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노바의 그 정체성은 일부 고액 회원권을 가진 회원들에게만 적용되는 내용입니까?”

동하의 날카로운 지적에 좌중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노바는 주에 두 번, 오직 한 명의 아이를 위해서 2시간 동안 풀장을 무료로 개방했습니다. 기존의 회원에게는 수질검사를 위한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거짓말을 했고요. 회원의 눈을 속이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이제 회원들의 반발 때문에 진행할 수 없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그건…….”

레저사업부 부장치 말문이 막힌 듯 말을 조금 더듬었다.

“네. 그 아이가 혜석그룹의 손자였으니 어쩔 수 없으셨겠죠. 그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 이제 와 그 책임을 따져 물으려고 한 질문도 아니었고요.”

“…….”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들끓었던 여론을 잠재우고,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는 수준에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단편적인 효과를 위해 투자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직도 이 프로젝트의 목적을 파악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동하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현재 노바의 가장 큰 문제는 노바의 진짜 고객이 누구인지, 공략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입니다. 누굽니까? 노바를 먹여 살리는 진짜 고객이.”

서늘한 빛을 내는 눈동자가 사람들을 꿰뚫을 듯하다. 동하는 만년필 끝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툭툭, 쳤다. 작은 행동이었지만 조용한 회의실 안의 시선을 단번에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보시다시피 노바를 이용하는 고객들의 대부분이 이용하는 상품은 명품서비스가 아닌 일반 생활과 편의입니다. 소수 상류층 고객만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쇼핑몰을 기획했다면, 이곳의 몸집이 이렇게까지 클 필요가 없겠죠. 자, 다시 한번 묻습니다. 노바가 공략해야 하는 진짜 고객은 누굽니까? 우리가 누구의 니즈를 만족시켜야겠습니까?”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하지 못했으나, 놀라는 눈빛만큼은 확실한 이해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들의 기색을 확인한 동하가 다음 말을 이어간다.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회의는 내일 다시 하겠습니다. 부장님께선 오늘 오후까지 프로젝트 진행 적임자를 선정해, 보고 올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암암리에 이뤄졌던 일부 특정 회원을 위한 노바의 시설 개방은 오늘부로 전면 폐지입니다. 그게 누구든, 설령 혜석그룹 사람이라도 예외는 없을 겁니다.”

동하의 눈빛과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몇몇은 그의 결정이 불러올 파장을 걱정했고, 한편 또 다른 몇몇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거세게 불어오는 새로운 변화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각자 다른 온도로 반짝이는 사람들의 눈을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는 동하의 시선이 한없이 날카롭고 냉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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