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경민은 대리석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랐다. 그의 큰 보폭 때문에 세령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어머니, 화나셨어요!”
세령이 경민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경민의 우레 같은 고함이 2층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경민은 곧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거칠게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세령은 불같이 화를 내는 경민을 노려보다가 곧 그가 던져놓은 봉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얼핏 봉투 틈으로 빠져나온 지폐가 보였다.
“이게 뭐예요?”
“몰라서 물어? 네가 재민이 수영강사한테 준 돈이잖아.”
세령의 눈이 움찔한다. 짙은 쌍커풀 진 눈에 깊은 의혹이 들어찼지만, 흥분한 경민은 미처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야, 차세령. 너 도대체 왜 이래? 왜 이렇게 사람이 점점 추해져?”
세령은 악을 쓰는 경민의 눈을 보았다. 경민의 이글거리는 눈이 이성을 잃고 흐려져 있었다. 왠지 흐려진 그 눈이 조금 슬퍼 보였다.
“너는 그러지 말란 말이야! 제발, 너는 그러지 말라고!”
절규하듯 소리치는 목소리가 세령의 귓가에 쏟아졌다.
“무슨 소리예요? 뭘 그러지 말라는 거야.”
“제발……. 사람처럼 살아. 너까지 내 어머니처럼…….”
경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얼핏 물기가 고인 것 같았다. 세령은 그 부들거리는 눈빛의 의미가 분노인지, 슬픔인지 혼란스러웠다.
“당신이 이 돈을 왜 가지고 있어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하지?”
“해고 취소해. 그리고, 이사희 강사에게 재민이 수업 다시 맡겨.”
세령은 귀 뒤 어딘가에서 띵,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단단히 이를 악문다. 경민의 입에서 이사희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녀가 저에게 주었던 모욕이 한꺼번에 떠올라 온몸의 피가 뜨거워졌다. 기가 막힌다.
자기 앞에선 그토록 당당하게 자존심을 부려놓고, 이경민에게는 다시 수업을 맡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렇다면 대체 이경민과 그 여자는 무슨 사이지?
불쾌한 상상이 세령의 몸을 휘감았다.
“그 강사가 당신 찾아왔어요? 당신 찾아와 다시 재민이랑 수업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던가요?”
차분한 음성이었지만, 끝이 조금 떨렸다. 경민은 즉시 세령의 말을 잘랐다.
“그런 거 아니야. 그 강사 나 찾아온 적 없어.”
“그럼 뭐죠? 그 여자가 찾아온 게 아니면, 당신이 그 여자를 찾아갔나?”
세령이 입술을 이죽거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경민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세령은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껏 경민이 누굴 만나도 한 번도 동요한 적 없었던 마음이, 왜인지 소용돌이 몰아치듯 어수선해졌다.
“재민이가 그 강사 좋아해. 그러니까 다시 수업받게 해.”
“언제부터 당신이 그렇게 재민이를 생각했어?”
“비아냥거리지 말고 말 들어. 재민이 원하는 거 해줘. 그 애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게 해. 그래야 재민이 숨 쉬고 살 수 있어.”
세령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경민을 보았다. 담담히 말하는 경민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러나 지금껏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던 경민이 갑작스레 재민을 위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도, 납득이 되지도 않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경민을 보던 세령의 눈시울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네가 원하는 게 재민이의 행복이야? 아니면 그…….’
독사가 머리를 들 듯, 강한 의혹이 가슴속에서 고개를 든다. 혼란스럽다.
그러나 세령은 이내 흔들리는 눈빛을 지웠다. 그리곤 태연하게 경민이 내팽개친 돈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소원이면 나 시키지 말고 당신이 직접 해요. 난 그따위 삼류 강사한테 더는 볼 일 없어.”
순식간에 공허해지는 경민의 눈빛을 몇 초간 강하게 노려본 세령이 차갑게 등을 돌렸다. 돌아서는 여자에게서 엄동설한 같은 삭풍이 불었다.
***
노바를 나온 뒤 사희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여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금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빠듯해졌다. 전보다 더 오래 일해야 했고, 더 많이 이동해야 했다.
구와 구를 오가고, 멀게는 광역버스를 타고 이웃 도시까지 원정을 가야 하는 일정이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제아무리 강철 체력 이사희라고 하더라도 매일같이 반복되는 살인적인 스케줄 앞에는 장사가 없었다. 파김치처럼 지쳐 집에 도착하면 닿으면 잠들기 일쑤였고, 꼭 집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머리만 닿으면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눈에 보이게 야위었고, 표정도 없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는 게 바쁘다 보니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다는 점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종종 다른 생각에 잠기고, 가끔은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것도 많이 나아졌다.
어쩌다 아주 가끔 휴대전화의 전화번호부를 볼 일이 있어 검색할 때, ‘받지 마!’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있는 어떤 번호 앞에서 멈칫, 했다가 가슴 한구석이 싸르르 아파지는 날들이 있기는 했지만 잦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끝내 그 번호를 지우지는 못했다. ‘받지 마!’라는 저장명으로 스스로에게 경고를 내린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다행히 그 번호로는 더 이상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받지 말라는 경고를 받지 않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때로는 조금 씁쓸해지곤 했다.
그러나 이것도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언젠가는 그 번호를 ‘받지 마’ 가 아닌 ‘누구세요?’ 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날이 꼭 올 것이다.
그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너무 피곤해 되레 잠이 오지 않는 날, 그래서 괜스레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면 사희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어서 빨리 이동하의 이름이, 여전히 그린 듯 선명한 그의 얼굴이 완전히 낯설어지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어쩌면 그 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찾아올 것이다. 인생이란 그렇다. 치열한 삶 앞에서는 잊히지 않는 것이 없다. 정 잊히지 않는다면, 묻어버리고서라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이고 설령 마음에서 멀어지지 않았더라도 눈에서 멀어졌다면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
두 번 다시는 그를 다시 만날 일 없을 테니, 그는, 이동하라는 그 이름은, 머잖아 이사희의 기억에서 잊히거나, 마음 저편에 묻힐 것이다.
부디, 그래야만 한다.
***
“본부장님, 급하게 보셔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이 한창인 회의실에 급하게 뛰어 들어온 수찬이 동하에게 귀엣말을 전한다. 목소리가 다급한 것을 보니 그냥 넘길만한 사안이 아닌 것 같았다.
동하가 피로로 움푹 파인 눈꺼풀을 힘주어 뜬다. 몇 주 사이,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까칠해져 있다. 한동안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일과 생각에 바빴다. 생각에 바쁜 것보다, 일에 바쁜 것이 나아서, 언젠가부터는 밤에도 쉬지 않고 일에 묻혀있으니 강골의 몸이라도 버텨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무슨 일이야?”
“인터넷에 노바에 관해 글이 올랐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아서요.”
수찬이 동하 앞으로 태블릿PC를 내밀었다. 화면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동하의 미간이 강하게 일그러진다.
“화면에 연결해.”
동하에 지시에 수찬은 태블릿을 빔 프로젝트 화면에 연결했다.
‘노바 쇼핑몰의 종합스포츠센터’, ‘자폐 스펙트럼 아동의 회원 가입 거부’, ‘해당 내용을 인권위에 고발 예정’ 등등의 심상치 않은 문장이 화면 안에 가득 찬다. 내용인즉슨 노바의 스포츠클럽 수영장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동의 회원 가입을 거부하고, 수영장 입장을 제한했다는 내용이었다.
댓글 창은 이미 만선이었다. 국내 최대 쇼핑센터라 자부하는 곳에서 이와 같은 장애인 차별이 발생했다는 데에 분개한 사람들의 비난 여론이 불붙은 듯 번져, 불매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화면을 보고 있던 임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현재 각종 사이트로 일파만파 퍼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신문에도 이미 해당 학부모의 인터뷰가 잡혀 있다고 하고요.”
수찬이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시고, 즉시 상황 보고하세요.”
동하는 하얗게 질려 땀을 흘리고 있는 레저사업부장에게 지시를 내리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수상안전교육을 마치고 나온 사희가 로커로 향하는데, TV 앞에 오종종 모여 있던 사람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화면 앞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애 엄마는 얼마나 속이 무너져, 그래. 어떻게 아픈 애한테 그럴 수가 있어?”
“그러게 말이에요. 1시간 동안 화장실을 다섯 번이나 보냈네요. 애가 물에 소변보면 안 된다고요. 거부하면 그 애만 빼놓고 수중 교육하고요.”
“어머, 어쩜 그런 나쁜 인간들이 다 있어? 강사가 나서서 왕따를 조장했다는 거야?”
“듣자니 이번이 처음이 아니래요. 이번에 문제가 된 애 아빠가 변호사여서 이제야 수면 위로 드러난 거지.”
“아주 겉만 번지르르했지. 직원 교육이 형편없나 보네. 저런 데는 진짜 혼쭐이 나야 돼. 쫄딱 망해봐야 정신 차리지.”
“그럴 거예요.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 문제잖아요. 노바의 실질적 이용고객이라고 볼 수 있는 소비층이 딱 그맘때 아이 키우는 부모들이니……. 아시죠? 이 지역 맘카페 힘이 얼마나 센지? 지금 환불 요구에 보이콧에 난리래요. 아마 엄청 타격 입을걸요?”
웅성거리는 내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사희는 그들이 집중하고 있는 TV 화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극적인 뉴스거리를 모아 틀어주기로 유명한 종편방송의 화면이었다. 그런데 화면에 보이는 장소가 어쩐지 눈에 익다.
사희는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 TV 쪽으로 조금 더 걸어갔다. 화면은 곧 노바쇼핑몰의 전경을 비춰주더니, 이내 풀장을 비춰주었다.
‘노바?’
사희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