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그다음의 일은 편집된 필름처럼 군데군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고통스러워 지워버리려고 했던 노력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길로 파주까지 날아간 동하는 흥청망청 취해 뒤엉켜있는 남녀 무리를 보았다. 술에 취했다기보다는, 무언가 강한 환각제에 취한 것처럼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두 경민과 어울리는 무리였고, 한 가닥씩 한다는 상류층 자제들이었다.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인 술병들 사이에 한눈에 보기에도 상서롭지 않은 것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 자리에 경민과 세령은 없었다. 그중 하나의 멱살을 잡고 세령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동하의 얼굴을 알아본 녀석이 침이 흐르는 입술을 이죽거리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지껄였다.
“아, 네 그 잘난 애인? 지금쯤 경민이한테 대주고 있겠지. 그렇게 도도한 척을 하더니, 돈 앞에서는 그년도 어쩔 수 없었나 봐.”
이튿날, 신문은 상류층 자제의 폭행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처음에는 단순폭행에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추가 증언으로 인해 특수 폭행으로 죄질은 더 무거워졌다. 폭행보다 더 세간의 주목을 산 것은 현장에 있던 불법 약물과, 그 자리에 대기업 자제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초범이었기에 거액의 합의금과 벌금을 납부한 것으로 일단락이 지어졌으나, 재벌가 자제의 편의를 봐 준, 일명 봐주기 수사였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몇 주 뒤, 동하는 쫓기듯 미국으로 보내졌다. 사고 수습과정에 윤재화 전무의 지휘가 있었다고는 하나, 최종 결정은 이종학 회장이 내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이경민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미간을 스쳐 간다. 동하는 욕지기가 치미는 목을 비틀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앞이 흐려진다. 더는 그때의 지옥 같던 시간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금 절망이 그를 늪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아닐 거야. 그런 건 아닐 거야.’
동하는 차분하게 자신을 다독였다. 우연일 것이다. 이사희는 이경민의 아들의 수영강사니까. 어쩌다 엉킨 불쾌한 우연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설령, 이사희와 이경민이 어떠한 관계라 하더라도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사희. 그 여자와 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 것을.’
그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대로 끝이다. 다시는 지옥 같은 시간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절규가 울려 퍼졌다.
차가운 이성이 남자의 마음을 강하게 압박한다. 심장이 얼음처럼 굳고 피가 차갑게 식는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
그리고 여기, 심란한 남자가 한 사람 더 있다. 경민은 내내 무언가 얹힌 것처럼 거북한 기분으로 앉아있었다. 오늘처럼 굴욕적인 날은 경민의 생에 손꼽을 만큼 드문 일이었다.
이사희는 끝내 자리에 엉덩이 한번 붙이지 않고 돌아갔다. 계약이 해지되었으니, 그녀는 더 이상 그와 얽힌 것이 없는 사람. 그쪽에서 원하는 것이 없으니, 빌미 삼아 잡을 수도 없었다. 붙들어놓을 방법이 없었으므로 경민은 눈앞에서 어찌할 방도도 없이 그녀를 보내야 했다.
“씨발.”
경민의 입술 새로 낮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을 때, 특별한 목적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가벼운 말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다.
오늘은 몹시 힘든 날이었다. 종일 따분한 회의가 계속되었던데다가, 오늘따라 윤재화 전무의 잔소리가 그를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어 피곤했던 터라,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평소라면 내연녀의 집으로 향했겠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내키지 않았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맛에 옆에 두었던 여자가, 갈수록 이래저래 요구가 많아져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어차피 서로 목적을 두고 만나는, 유효기간이 있는 관계이니만큼, 그 기간이 끝나기 전에 한밑천 챙기고 보겠다는 생각이 발동한 모양이다.
지금껏 만났던 여자들 모두가 그랬다. 하도 반복된 패턴이라 이제는 언제쯤이면 날 귀찮게 만들겠구나, 하는 느낌이 올 정도였다.
시시하다. 지루하고 지긋지긋했다. 그런 빤한 만남, 이제는 염증이 났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지독한 권태 끝에는 늘 세령이 떠오른다.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고 상처 주기에 바쁜 사이인데도, 왜 항상 그 끝은 차세령인지.
차세령, 억지로 발 묶어 제 옆에 두었지만. 한순간도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여자. 늘 그를 목마르게 하고, 허덕이게 하는 여자. 그래서 저를 계속해서 그 곁에 맴돌게 하는 여자.
그러나 오늘은 그것마저도 내키지 않았다. 지난번의 냉전이 있은 후, 경민은 지금껏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저를 한심하게 보던 세령의 눈빛이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평소보다 한층 더 차가워진 그녀의 태도와 눈빛이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이동하였다.
‘이동하가 돌아왔기 때문이야. 그 새끼가 돌아와 차세령이 흔들리는 거야.’
경민은 설명할 수 없는 패배감에 분이 치밀었다. 지금 기분으로 세령을 본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 해도, 지금은 그녀를 잃을 수 없다. 세령을 잃는다면 정작 무너질 사람은 그 자신일 테니까.
경민은 순간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같았다. 혜석그룹의 부사장이라는 번지르르한 타이틀마저 없으면, 누구도 자신의 곁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언제나 이동하에게로 기울어있던 아버지의 눈빛, 이동하보다 앞서지 못하는 자신을 차갑게 다그치던 어머니, 그리고 이동하에게만 절실하고 따듯했던 차세령까지.
그가 가지고 싶었던 모든 것은 모두 이동하가 가졌다.
‘이동하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그 자식 때문에 나의 삶이 텅 비었다.’
그러니 혜석 만큼은 오롯이 자기의 것이어야 한다. 어쩌면 그가 버거운 그 자리를 지키려고 악착같이 버티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외로웠다. 위로가 필요했다. 잠시라도 자신을 따듯하게 안아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런데 내 곁에 나를 혜석그룹 부사장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이경민으로 대해줄 누군가가 과연 있었던가.
그때, 불현듯 그 여자가 생각났던 것이다. 저에게 겁도 없이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던, 자기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타겠다고 했던 그 황당한 여자, 재민이의 전담 수영강사라는 그 여자가.
고 비서를 시켜 그 여자를 데려오라고 시켰다. 최대한 정중히 하라는 지시도 잊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두통도 덜해졌고, 빳빳했던 긴장도 풀렸다. 누굴 만나는 일이 이렇게 기다려졌던 것이 언제였던가.
여자를 만나는데, 그 플랜에 술도, 섹스도, 돈도, 혹은 자극적인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 참 신선한 기분이었다. 그저 사람과 사람의 평범한 만남일 뿐인데, 가슴이 왜 그리도 설렜던지.
그런데 포근하고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경민의 기대는 완전히 깨져버렸다. 그 대신 굴욕적인 기분만 얻었다.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또다시 생겨났다는 것은, 그러잖아도 예민하게 솟아있던 경민을 거의 폭발 직전까지 몰았다.
경민은 이사희가 던져놓고 간 돈 봉투를 짓이기듯 꽉 쥐었다. 그리곤 긴장한 표정으로 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고 비서에게 소리쳤다.
“당장 집으로 가.”
***
“재민 엄마, 어디에 있어?”
집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경민은 날카로운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소리쳤다.
“사모님께서는 지금 큰 사모님 방에 계십니다.”
거칠게 벗은 옷을 그를 기다리고 선 도우미에게 던져놓고, 윤 여사의 방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경민은 반쯤 열린 윤 여사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려다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경민이, 또 그 계집애에게 간 게야?”
채근하는 윤 여사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다.
“아니요. 이번에는 아닙니다.”
곧 세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민은 살짝 손으로 문을 밀었다. 조용히 열린 문틈으로 윤 여사와 세령이 보였다.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집무 책상에 앉은 윤 여사 앞으로, 세령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럼, 지금은 어디에 있지?”
“호텔에서 회사로 출근하고 있습니다. 오늘 임원 회의가 있었고 퇴근 후에 다시 호텔로 들어갔습니다.”
경민의 동선을 들은 윤 여사는, 자신이 질색하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에 조금 안도했던지 차갑게 굳어있던 도끼눈을 풀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어쩔 셈이니?”
윤 여사가 묻는다. 세령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긴장한 표정으로 윤 여사를 보았다.
윤 여사의 눈이 가늘게 좁아진다.
“너는 눈치가 없는 거니, 맹한 거니? 그 앨 언제까지 거기 둘 셈이야. 혜석그룹 부사장이 호텔에서 출퇴근을 한다는 소문이 돌면, 금세 냄새 맡고 불화니 뭐니 떠들어 댈 텐데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 소리가 나돌게 두겠다는 거니?”
“아……. 죄송합니다. 어머님.”
“내가 너한테 죄송하다는 소리 듣겠대?”
윤 여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세령의 마른 어깨가 겁먹은 아이처럼 움츠러들었다. 지켜보는 경민의 눈꺼풀이 가늘게 일그러졌다.
“그런 지저분한 소문 돌지 못하게 처신 똑바로 해. 그리고 재민이 단속도 잘 시키고. 짐승 새끼도 아니고, 왜 사람을 물어뜯어? 반푼이 같은 녀석. 행여 그쪽 부모들이 정말 인터넷에 떠들어 기사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 넌 도대체 애가 그러고 다닐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죄송합니다.”
세령은 그날 회장님이 퇴원을 하시는 날이었고, 그때부터 새벽부터 종일 손님맞이를 하느라 엉덩이 붙일 틈이 없었다는 변명은 굳이 하지 않았다. 윤여화는 애초에 변명이 통할 사람도 아니었고, 되레 변명하면 변명할수록 사람을 벌레 보듯 하며 궁지로 모는 특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에.
“경민이, 완전히 자리 굳히기 전까지 그 애에게 흠집 안 나게 잘 해. 그 뒤로는 너희가 이혼을 하든 말든, 상관 안 한다. 차라리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고.”
세령은 죽은 듯 대답이 없었다. 그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경민이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게 어머니 소원이시면 지금 하겠습니다, 이혼.”
윤 여사와 세령이 동시에 경민을 돌아본다. 경민은 굳은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윤 여사를 향해 차갑게 조소했다.
“참 수고가 많으십니다. 윤여화 여사님. 못마땅한 며느리, 7년이나 참고 사시느라 얼마나 고단하실까? 거기다 하나뿐인 손자라는 놈도 반푼이고.”
“이경민!”
윤 여사가 앙칼지게 윽박을 지른다. 그러나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어머니의 그런 힐난 어린 목소리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경민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키세요, 이혼. 어차피 나란 놈, 구재불능에 개망나니인 거 알 만한 사람 다 아는데, 그까짓 이혼 한다고 새삼스레 흠집이 나겠습니까? 설령 난대도, 티도 안 나요. 난.”
“그 입 다물지 못해?”
“분명히 말씀드리죠. 때 되면 어머니 뜻대로 알아서 헤어져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이 사람 괴롭히지 말아요. 내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아들한테 짐승 새끼니 반푼이니 뭐니, 한 번만 더 그딴 말 늘어놓으면 그때는 정말 안 참습니다.”
윤 여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노기로 굳은 턱과 볼이 파르르 떨렸다.
“재민 아빠!”
세령이 황급히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따라 나와.”
경민이 세령의 팔을 무섭게 잡아끌었다. 세령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경민의 손에 잡혀 방에서 끌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