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45화 (46/109)

#45

“강사님?”

“그날 일이 고맙다고 하셨어요, 지금?”

“그래요.”

“혜석그룹 분들은 고마움에 대한 표현을 이렇게 하시나 보네요?”

“네?”

“그거 아세요? 그쪽 분들, 정말 사람 피곤하게 한다는 거?”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경민이 짙은 눈썹을 강하게 찌푸렸다.

“저는 부사장님께서 사주시는 밥을 먹을 이유가 없고요. 그러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쌀쌀맞게 대꾸한 사희가 몸을 돌렸다.

그대로 두면 진짜로 갈 기세여서, 경민은 다급히 사희를 막아섰다.

“잠깐만요. 다짜고짜 그럴 게 아니라, 말을 해봐요. 왜 그러는 겁니까? 왜 화가 났죠? 혜석그룹 사람들이 강사님을 피곤하게 한다는 소리는 또 뭐고.”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거예요?”

“뭐가요? 대체 내가 뭘 모른다는 겁니까?”

사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큰 눈을 깜박이고 있는 남자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는 저를 그렇게 노려보는 여자의 눈빛에 자못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정말 모르는 모양이네.’

약간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이내, 또 삐뚠 생각이 머리를 든다.

몰랐으면, 뭐?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멋대로 사람을 해고하고 모욕하는 당신 부인이나, 마음대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당신이나 다 똑같아.

사희는 턱을 바짝 치켜들고 다시금 경민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저는 이제 재민이 담당 강사가 아니에요. 해고당했거든요.”

생각지 못한 말에 경민은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을 허, 벌렸다.

“뭐라고요?”

“잘렸다고요. 그날 제가 봐서는 안 될 모습을 봤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했다고요.”

경민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가 미처 생각을 정리할 새도 주지 않고 사희가 다음 행동을 이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녀가 내려놓은 것은 하얀색 봉투였다.

“이게 뭐죠?”

“사모님께서 제게 주신 돈이에요. 그날 시간 외 근무를 한 것에 대한 수고비라고 주신 건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은 날 해고하면서 뒷말 나오지 않게, 먹고 떨어지라고 준 것 같거든요?”

“……”

“그래서 돌려드립니다. 제가 이 돈을 받으면 정말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아서 말이에요. 직접 드리고 싶었는데 받을 경황이 없어 보이시더라고요. 그러니 아버님께서 가져가셔서 전달해 주세요.”

사희는 그렇게 제 말을 마치더니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가방 지퍼를 잠그고 돌아섰다.

“잠깐만요. 잠깐만 앉아요.”

“밥 안 먹는다니까요.”

“알았어요. 밥은 안 먹어도 되니까 일단 좀 앉아요. 이야기 좀 합시다.”

경민이 사희의 팔을 잡았다. 사희는 화들짝 놀라 그의 팔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마치 치한이라도 보는 듯, 저를 경계하는 사희의 행동에 경민은 다시 당황했다. 어떻게든 저와 연결되어 보려고 안달이 난 여자들과의 관계에 익숙했던 그로서는, 사희의 지금 이 행동이 너무도 당황망조한 일이었다. 절로 행동이 부산해진다.

“몰랐어요, 나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정말 몰랐습니다.”

“이제 아셨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사희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서 경민을 올려다보았다.

살차게 저를 보는 눈빛에 경민은 말문이 턱 막혔다. 초조하게 입술을 씹던 경민이 사희에게 물었다.

“좋아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강사님이 말해 봐요.”

사희는 오른쪽 눈꺼풀을 미세하게 찌푸리더니 눈썹 언저리에 주름이 생기도록 미간을 찡그렸다.

“뭘 말하라는 거죠?”

“다시 재민이 강의를 할 수 있게 해주면 되는 겁니까? 아니면 아예 새 일자리, 주면 됩니까?”

사희의 하얀 얼굴이 깨진 도자기처럼 날카롭게 일그러졌다.

“하, 진짜 어이가 없네.”

서슬 퍼런 눈으로 경민을 쏘아본 사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씹었다.

“정말 질린다. 당신들.”

***

앙다문 동하의 턱 근육이 뱀처럼 꿈틀거린다. 머릿속으로 혈류가 빠르게 쏟아져 들어가는 것 같은 환각이 일만큼 극도로 흥분된 상태였다.

‘이경민이 어떻게 이사희를 알고 있지? 설마…….’

불길한 생각이 치민다.

두 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던 어떤 기억이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와 그의 마음을 헤집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기억이 7년 전, 그 날로 걷잡을 수 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7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학생군사교육단에 임관해 군 복무까지 마친 동하는 일찍부터 생업에 뛰어들었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서였다. 혜석그룹에 입사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향후 경영에도 절대 참여하지 않을 것이란 약속이었다. 그것은 그가 윤여화 여사에게 직접 한 약속이기도 했다.

뜻이 맞는 인재들을 모아 스타트 업 회사를 창업하는 문제로 한창 정신없이 뛸 때였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열정만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위기에 위기를 반복하는 재정문제와 고강도 업무로 매일 같이 지쳐있던 나날이었지만, 세령이 곁에 있었기에 동하는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낮에는 예대 조교로, 저녁에는 입시미술학원의 강사로 일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세령의 성실한 기운이 동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주에 한두 번 겨우 만나, 몇 시간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 소박한 데이트라도, 동하와 함께할 수 있어 고맙다고 말해주는 세령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동하는 세령의 사랑을 믿었다. 하루빨리 자리 잡아, 세령과 함께 안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스물여섯 이동하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다. 세령 역시 자신과 같은 뜻이라는 것을 동하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의 실수에도 단단한 믿음이 산산이 부서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머지않아서였다. 그날은 동하의 회사가 경쟁업체와의 투자 경쟁에서 참패를 당했던 날이었다.

그날은 동하의 생일이기도 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출생을 축하받지 못한 운명이었기에 그 자신조차도 애써 잊고 사는 날이긴 했지만.

실망한 직원들을 달래느라 늦게까지 술을 마신 동하는 엉망으로 취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남겨지니, 꿋꿋하게 버티고 있던 마음이 힘을 잃고 무너졌다. 아무리 용감하고, 영민한 그라 하더라도 고작 스물여섯이었다.

위로가 필요했다. 그의 유일한 위안인 세령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세령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왜인지 세령의 전화는 꺼져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잠들겠다고 말하긴 했어도, 평소의 세령이라면 동하가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기다렸다가 짧은 통화라도 할 사람이었다. 더구나 동하가 오늘처럼 유쾌하지 못한 일로 술을 마시는 일이 있는 날이라면 더욱더.

세령과 연락이 되지 않자 동하는 마음이 이상해졌다. 왠지 오늘 꼭 세령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령에게 만큼은 오늘이 가기 전에 생일 축하 인사를 듣고 싶었다. 그가 태어난 것을 유일하게 축하해줄 사람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세령의 집으로 찾아간 동하는, 그녀의 룸메이트 미란의 주저하는 얼굴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세령 언니, 지금 집에 없어요…….”

세령이 거짓말을 했다. 동하는 순식간에 술이 깨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 갔어요?”

미란은 얼떨떨해하는 동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친구 생일이라고 나갔어요.”

생일? 의아했다. 오늘은 동하의 생일이었고, 세령은 동하가 자신의 생일을 기필코 지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동하의 생일을 챙기기 위해서 나가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그것은 세령이 동하에게 거짓말을 하고, 전화기까지 꺼놓은 채, 누군가의 생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나갔다는 뜻이 되었다.

“그게 누구죠? 어떤 친구예요? 내가 아는 사람인가요?”

동하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강하게 누르며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미란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거의 울상이 되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그녀가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 잘 몰라요.”

“미란 씨. 말해요. 세령이, 지금 어디에 있어요?”

“전 정말 잘 몰라요. 그냥 파주 어디 별장이라고만 했는데…….”

동하는 차갑게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몇 달 전, 세령의 집 근처에서 본 고가의 외제차가 떠올랐다. 대학 근처에, 고만고만한 형편의 학생들이 모여 사는 자취촌에는 어울리지 않는 수억대의 자동차가 몹시 이질적이라고 느껴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그날 동하는 그 차에서 뜻밖의 인물을 보았다. 이경민이었다. 그때는 우연이라 생각하고 넘겼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경민, 이동하와 한날한시에 태어난 그의 배다른 형제. 그리고 파주라면 윤여화 여사 소유의 별장이 있는 곳이었다.

“이경민입니까?”

동하의 질문에 미란은 입술을 말아 물고 고개를 푹 꺼트렸다. 그러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동하 씨가 상상하는 그런 건 아니에요. 언니도 계속 거절했어요. 정말로……. 그런데……. 그 사람이 워낙 막무가내여서……. 언니가 싫다는 데도 막 이것저것 보내고…….”

그제야 동하의 눈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현관 한구석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쌓여있는 상자들에는 명품 브랜드의 낙인이 찍혀있었다.

“오늘만 와주면 다시는 괴롭히지 않겠다고 했대요. 언니도 그래서 가는 거라고 그랬어요. 정말로요……. 동하 씨도 세령 언니,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미란의 이야기는 더 이상 귀에 들리지 않았다. 동하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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