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이사희!”
동하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간 사희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조용한 비상구를 뒤흔들 듯 왕왕 울려댔다. 동하가 뒤따라오는 것을 알아챘는지, 사희의 걸음이 더욱 급박해졌다.
마음만 먹으면 앞서가는 여자쯤 얼마든 따라잡을 수 있겠지만, 동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위태롭게 내려가는 사희가 마음이 다급해 발이라도 엉킨다면 그때는 정말 큰일이었다.
“뛰지 말아요. 다쳐!”
동하가 타이르는 목소리로 사희를 안심시켰지만, 그럴수록 사희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이윽고 아래층에 도달한 사희가 온몸으로 비상구 출입문을 밀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녀가 계단을 완전히 내려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동하는 조금 더 속력을 붙였다. 쇼핑몰을 오가는 많은 사람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 틈에서 이사희를 찾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마치 표적에 고정된 조리개처럼 동하의 눈에는 사희의 모습만이 또렷하게 잡혔다.
***
저를 뒤따르는 소리가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자 사희는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사람들을 헤치고 밖으로 뛰어나온 사희는 택시를 잡기 위해 승강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대로 쪽으로 막 한 발을 내려놓았을 때, 날카로운 급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달려온 차가 그녀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낯선 남자가 내렸다.
“이사희 강사님?”
그쪽에선 저를 아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사희는 그를 본 기억이 없었다. 사희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남자를 보았다.
“누구세요?”
“저는 이경민 부사장님의 비서입니다. 부사장님께서 강사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사희가 이마를 강하게 찡그렸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오늘 아주 작정을 했나. 이것들이 다들 왜 이러는 거야!
“이사희!”
그때, 쇼핑몰의 문을 밀고 나온 이동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사희는 더 되물을 것도 없이 차 문을 열고 날듯이 뛰어올랐다.
“가요!”
당황한 채로 서서 쭈뼛거리던 비서는 사희가 다그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빨리!”
사희의 재촉에 비서는 가속페달을 밟았다.
거의 근처까지 달려왔던 동하와 간발의 차이를 두고서 차가 출발했다. 사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허탈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차를 보고 있는 동하를 보았다. 다행이다 싶은 마음 한편에, 서글픈 생각이 밀려들었다.
이제 정말 끝인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가슴이 물먹은 종이처럼 먹먹해지더니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런 사희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고 비서는 지시받은 사항을 착실하게 전달한다.
“부사장님께서 강사님을 정중히 모시고 오라고…….”
“조용히 좀 해주세요.”
사희는 무어라 떠드는 남자의 말을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나 지금, 다른 사람 말 들을 기분 아니야. 가슴이, 여기가 너무 아프단 말이야.
사희는 가슴에 손을 얹어 꾹 눌렀다 뜀박질의 여파일까. 가슴이 뻐근하게 아프고, 심장이 벌컥벌컥 뛴다. 엉겁결에 뜨거운 것을 삼킨 것처럼 갑갑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 남자가, 가슴이 얹힌 것 같았다.
***
“본부장님. 헉헉…….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헉헉…….”
멍하니 선 동하의 어깨를 잡아챈 것은 수찬이었다. 수찬은 숨이 턱까지 차서는, 온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불러도 대답은 않고 재규어처럼 달려 나가던 동하를 따라 몇백 미터를 쉬지 않고 달려온 탓이었다. 허리를 배배 꼬며 더운 숨을 토하는 수찬과는 달리, 동하는 허탈한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한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하아, 아이고. 진짜 숨넘어갈 뻔했네. 그런데 고 비서한테 무슨 볼일 있으세요?”
한참 후, 겨우 숨을 돌린 수찬이 동하에게 다시 물었다.
“누구?”
“고 비서요. 이경민 부사장 비서. 방금 전에 그 차 잡으시려고 하던 거 아니었어요?”
동하의 미간이 강하게 좁아든다.
이사희가 타고 간 차가 이경민 부사장의 차라고? 이사희가 어떻게 이경민을?
뜨거운 피가 동하의 몸을 빠르게 돌았다. 윙, 하고 기분 나쁜 이명이 지나갔다. 사이렌이 울리듯 온몸 여기저기에서 위험 신호를 알린다. 그의 무의식에 새겨진 본능적인 방어기제였다.
“정말 이경민 차가 맞아?”
“네. 확실해요. 몇 번 봐서 얼굴도 익고. 차 번호도 진작 외워놨죠. 제가 워낙 암기력이…….”
수찬은 젠체를 하려다, 강하게 일그러지는 동하의 표정에 까무룩, 기세를 잃고 입을 다물었다. 동하의 눈에서 불길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눈빛이 이토록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수찬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수찬은 차가 사라진 방향을 한번 보곤, 동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그러세요?”
“이경민, 이 개새끼가 설마…….”
동하의 입술에서 갈라진 쇳소리와 함께 단발의 욕설이 튀어나왔다.
동하는 부서질 듯 세게 주먹을 쥐었다. 기름에 불티가 옮겨붙듯 화르륵, 마음이 불타올랐다. 마음이 이제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불편해졌다.
***
차는 도시 한 가운데 있는 산 중턱에 으리으리하게 자리 잡은 H호텔에 섰다.
입구까지 마중을 나온 호텔 매니저에 의해 안내된 곳은 호텔 16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투명한 빛을 뿌리며 공간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매니저는 프라이빗 룸이 있는 복도 앞까지 사희를 안내하더니 짙은 고동색 문 앞에서 멈췄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말을 마친 남자가 문을 당겨 열더니 사희를 향해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도 내내 멍해있던 사희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이경민 부사장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불편한 기분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훅 끼쳐왔다. 그렇다곤 하나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조금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되레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반항심 같은 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될 대로 돼라.’
어차피 그들과 더 이상은 갑을이라는 관계로 얽혀있지도 않으니, 이제는 무서울 것도 없었다.
사희는 가방끈을 양손으로 잡아 단단히 고쳐 멘 뒤, 룸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린아이 키만큼 높은 생화다발을 가운데 꽂아둔 넓은 테이블이 보인다. 그리고 뒤이어 입구를 등지고 앉아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살짝 고개를 틀어 사희 쪽을 본다.
“왔어요?”
경민이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하더니 사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한번 훑어 내린다.
그의 시선이 마치 저를 감상하는 듯해서 사희는 조금 불쾌해졌다.
“오랜만이죠?”
경민이 다시 묻는다.
사희는 물음에 대답을 하는 대신, 멀뚱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를 보며 반갑게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오늘 그녀가 겪은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지만 저들은 얼마든지 가면을 쓸 수 있는 사람들. 사희는 그의 친절해 보이는 표정을 믿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사희에게서 돌아오는 인사가 없자 경민의 표정이 황당해졌다.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마주보기도 싫다는 듯, 팩하니 돌아가는 고개는 자못 냉정하기까지 했다. 경민의 미간이 팽팽하게 좁아진다.
“혹시 못 들으셨나? 내가 방금 인사했는데.”
“들렸어요.”
사희는 짧게 대답했다.
“어…….”
다른 곳을 보며 시큰둥하게 서 있는 사희를 보는 경민의 입술에서 이상한 추임새가 흘러나왔다. 너무 황당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 담긴 소리였다.
이사희는 왜인지 모르지만 몹시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경민은 살짝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경민은 답지 않게 약간 머뭇거리기까지 했다. 여자를 대할 때, 무슨 말부터 걸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던 적이 거의 없던지라 경민은 조금 버벅거렸다.
경민이 겸연쩍은 듯 뒷머리를 살짝 긁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손수 의자를 빼주었다.
“일단 앉으시죠.”
그런데 사희는 경민이 빼준 의자를 힐긋 보더니, 마뜩잖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이내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경민은 저의 호의를 면전에서 휴지조각 구겨버리듯 무시해버리는 사희의 태도에 진심으로 당혹스러워졌다.
이봐, 내가 의자를 빼줬다고. 나 혜석그룹 부사장 이경민이.
“저기, 강사님?”
경민이 사희 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여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른다.
“절 왜 보자고 하셨죠?”
사희가 마치 싸움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쌀쌀맞게 되물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네가 뭔데 저를 보자고 하냐는 식이었다.
내가 보자면 보는 거지, 꼭 무슨 용무가 있어야 하나?
욱, 하는 마음이 치솟았지만 경민은 일단 조금 마음을 누그러트렸다.
“아, 뭐……. 그냥 강사님께 식사를 좀 대접하고 싶어서요.”
“왜요?”
“네?”
“왜요. 왜 저한테 밥을 사주시는데요?”
몰아치는 기세가 따갑다. 경민은 마치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로 달려드는 사희의 얼굴을 황망한 표정으로 보았다.
“아니 뭐……. 그날 고마웠던 일도 있고. 또 재민이를 잘 지도해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하!”
경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희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제 말을 이토록 하찮게 구는 여자를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자신에게 늘 차가운 세령조차도 그를 대할 때 맹수를 대하듯 조심하는데.
‘이 여자, 도대체 뭐야?’
경민이 당황한 눈을 크게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