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세령의 어깨에 부딪쳐 사희는 뒤로 조금 밀려났다. 사희의 하얀 목덜미와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사희는 바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을 쥐고도 손 떨림이 멈추지 않아 얼른 손을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앙다문 턱이 분으로 울근불근했다.
참아야 해. 참아야만 해. 이사희.
사희는 스스로에게 하염없이 주문을 걸었다. 그러나,
“불쌍해.”
사희의 입술 사이로 기어이 참아내지 못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세령의 걸음이 멈칫한다. 미간을 찡그린 얼굴로 느리게 돌아선다.
“뭐라고?”
사희는 저를 향해 돌아선 세령의 오만한 얼굴을 향해 또박또박 외쳤다.
“당신 같은 사람, 엄마로 둔 재민이가 불쌍하고 안됐어요.”
세령의 눈에서 번쩍 불똥이 튄다. 또각또각, 구두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더니 세령이 이내 사희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곤 뺨을 칠 기세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 손바닥이 공기를 가르기 전, 사희가 먼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세령의 가느다란 팔목이 사희의 커다란 손안에 완벽히 붙들렸다. 사희는 손아귀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한 줌에 잡힌 세령의 손목이 핏기를 잃고 하얗게 변했다.
“저한테 그러셨죠? 힘이 없으면 억울해진다고. 그런데요, 사모님. 요즘 같은 세상엔 힘 있다고 그걸 함부로 휘둘렀다간 진짜 큰일이 나는 수가 있어요.”
“……!”
세령이 온몸에 힘을 실어 버둥거렸지만, 사희를 상대하기엔 힘에 부쳤다. 지금은 그저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희를 노려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모님께선 재민이가 얼마나 지쳐있는지 모르시죠?”
“……?!”
“얼마나 불행한 일이에요. 고작 몇 달밖에 못 본 남도 느끼는 걸 엄마인 당신이 모르는 게.”
“너 진짜 미쳤구나?”
“네. 미쳤어요. 이 세상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미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거든요.”
사희는 분노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세령을 애잔한 눈빛으로 보다가 이래 털어내듯 그녀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 힘에 뒤로 휘청 밀려난 세령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푸른빛이 돌았다.
사희는 묶고 있던 머리끈을 풀어 긴 머리를 거칠게 흩뜨렸다. 흘러내린 머리칼이 울긋불긋하게 달아오른 목을 덮었다. 후, 입술로 바람을 불어 머리칼을 날려 넘긴 사희는 세령을 꼿꼿하게 노려보았다.
“또 한 번 내 앞에서 힘이니 뭐니 운운하셨다간, 진짜 힘들어지실 겁니다. 저는 잘 안 참거든요.”
사희는 저를 노려보고 선 세령의 어깨를 밀치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마치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듯 계산된 행동이었다. 세령이 사희가 흔들렸던 것보다 더 많이 밀려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
아침부터 몰아치듯 일을 처리했더니 정오가 지나서부터는 심심할 정도로 할 일이 없어졌다. 지난주 내내, 동하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일을 만들어댔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일에 매달렸다. 잊고 싶은 것이 생기면, 무리할 정도로 일에 매달리는 그의 악습관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질주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는 혼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속도를 아랫사람들이 버거워하는 상황에선 혼자 질주한다고 될 일은 아니니, 적당한 절제가 필요했다.
“하아.”
조금 전까지 네 번도 넘게 반복해 읽었던 서류를 접어놓으며 동하는 심란한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힘을 주고 뜨고 있었던지 눈이 피로했다. 손에서 일이 떠나자 다시 잡스러운 생각이 꾸역꾸역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사희. 오늘도 그 이름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바쁜 일과 중에 있을 때는 조금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는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잠시라도 일에서 벗어나면 불청객처럼 어김없이 이사희가 떠올랐다.
동하는 테이블 위에 놓은 휴대전화를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린다.
“날 떠올렸을 때, 마음이 불편해지면 그때 연락해요. 나, 편한 사람 되기 싫어요.”
그녀가 남겼던 말이 여전히 귓가에 쟁쟁하거늘. 그러나 사희는 여전히 동하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다. 좀 더 지나선 아예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말만이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을 뿐이다. 그를 향한 확실한 거절이었다.
동하는 미간을 좁게 찌푸렸다가 곧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쉰다. 목이 갑갑해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내렸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를 생각하는 일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불편해지고 있다.
톡톡톡, 펜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동하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본부장님, 어디 가십니까?”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서둘러 나온 동하를 본 수찬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따라올 것 없어.”
짧게 지시한 동하가 본부장실을 날듯이 뛰어나갔다.
동하는 엘리베이터 하행 버튼을 부서질 듯 세게 눌렀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그녀가 강습을 위해 노바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으니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직접 만나야 한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속도가 더디게 느껴졌다. 젠장할, 목구멍 안쪽에서 상스런 욕이 치민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손동작이 하염없이 초조해 보였다.
이윽고 승강기가 그가 있는 층에 도달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동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스포츠센터가 있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
“아악!!!”
등 뒤에서 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령이 내지르는 악에 받친 절규였다. 흡사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짐승이 내는 소리 같았다.
사자가 들개에게 물어뜯긴 자리가 고통스럽다며 울부짖고 있다. 발길질 한 번에 저를 죽일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사자를 물어뜯어야만 했을 때, 들개가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사자는 모른다. 사자의 목을 물었을 때, 들개는 자신의 죽음을 각오했음을. 그저 한낱 들개 따위에게 고귀한 살을 물린 것이 자존심을 다쳐서, 죽여 버릴 수도 있는 조그맣고 하찮은 짐승에게 허점을 보인 것이 화가 날 뿐. 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 고약한 소리에 놀란 사무실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왔다.
“뭐야? 무슨 소리야?”
개중에 몇이 사희를 향해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사희는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풀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소리를 등지고 사희는 계속 걸었다. 악을 쓰는 세령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도망치듯 뛰어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사희의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울컥하고 무언가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갈비뼈가 들썩일 정도로 감정이 끓어올랐지만 사희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울 것 없어. 내가 사는 세상에선 운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거든.’
그러나 그녀의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타 있던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애써 버텨온 그녀의 다짐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동하…….
엘리베이터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남자가 사희를 보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빛이 꺼진 듯, 허무하게 비어있던 그의 눈동자가 사희를 보자 반짝하고 빛났다. 0.5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가 진심으로 저를 반가워하고 있음을 사희는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허물어졌다.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싫다. 날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밝아지는 당신 눈빛이 싫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친근한 목소리가 싫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는 그 태연함도 싫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싫은 것은, 그를 본 순간, 마음속에 피어났던 반가움이다. 그와 동시에 하염없이 약해져 버린 자신의 마음도 싫었다. 그에게 기대서 엉엉 울어버리고 싶다는 부끄러운 욕구와, 당신은 그래도 그 모진 사람들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기대. 그게 싫다.
‘당신은 왜……. 왜 자꾸만 내 바닥을 보는 거야. 당신이 뭔데. 대체 당신이 뭔데.’
***
동하는 당황했다. 그녀가 화가 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를 보자마자 그렇게 와락 울음을 터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또 너무 무례했던 걸까? 저를 피하려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공사가 한창인 층으로 데려온 충동적인 행동이 그녀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동하는 하고 싶었던 말도 모두 잊은 채, 그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합니다. 울지 말아요. 제발.’
그 말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 간질간질 올라왔지만, 왜인지 그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한 마디였다. 머저리 같기는. 이 순간에도 자존심을 챙기려는 거야?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원망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싫어……. 정말 싫어……. 그러니까 제발 다가오지 마.”
그 외에도 알 수 없는 말 몇 마디를 더 하긴 했지만, 동하의 귀에는 오직 그 말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차가운 말을 쏟아낸 사희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곤 그를 두고 미련 없이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견딜 수 없다는 듯, 마치 1초도 더는 그와 같은 공간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여자는 비상구 문을 열더니 사라져버렸다.
동하는 멍한 표정으로 사희의 뒷모습을 보았다. 얼이 빠져있던 남자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전기에 오른 것처럼 찌릿, 강한 충동이 일었다.
잡아야 한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이렇게 놓쳐버리면, 어쩌면 다시는 이 여자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다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