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솔직히 쉬운 분은 아니죠.”
보이지는 않지만, 움찔하는 그의 뒤통수에서 동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요, 누가 본부장님, 불편하다고 해요?”
수찬이 은은하게 미소가 번진 입술을 꾹 물었다 놓으며 물었다.
동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그리곤 이마에 옅은 주름을 만들며 짙은 눈썹을 치떴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미팅 준비는 다 됐나?”
“네. 그럼요.”
“그래, 알았어.”
동하는 손을 살짝 들어 이제 그만 나가봐도 좋다는 듯 표시를 해 보였다. 수찬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동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나 전혀 안 불편해하지 않나?”
“저야 뭐, 이제는 익숙해졌으니까요. 그래도 솔직히 불편할 때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대체 어디가 불편해?”
동하가 큰 눈을 순하게 뜨고서, 자못 억울함까지 느껴지는 표정으로 묻는다.
“제 대답이 듣고 싶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묻지.”
“글쎄요. 제가 대답한다고 해서 그게 답일까요?”
“뭐?”
“본부장님이 진짜 답을 알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이 아니잖아요, 저는.”
수찬에게 정곡을 찔린 동하의 눈동자가 살짝 움찔했다. 포커페이스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동하가, 이토록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수찬은 못내 반가웠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에 애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 그에게 애쓸 틈이 없을 정도로 집중하는 무언가가 생겨났다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잘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분이 본부장님을 왜 불편해하는지. 누군가가 불편한 이유, 무궁무진하게 많거든요.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에요.”
동하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수찬의 말을 듣다가 이내 고개를 털어냈다. 여전히 영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지금껏 머리로 풀지 못했던 문제가 없던 이에게, 머리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생겨난 것이 적잖이 거슬린다는 표정이다.
“뭐, 굳이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동하가 반짝 빛나는 눈으로 수찬을 본다.
“아무래도 본부장님이랑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
“뭐?”
“불편하시죠? 지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복잡하게 엉겨있는 동하의 눈빛이 그 답을 말해주고 있다.
수찬의 말이 맞다. 함께 있으면 솜 위에 누운 것처럼 편했던 여자가, 지금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몹시 불편해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떻게 한다고 해서 그녀가 전처럼 저를 편하게 대해줄 것 같지도 않다.
지금으로선 가장 미칠 것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와 다시 전처럼 편해질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 그게 그를 몹시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쉽게 말해. 빙빙 돌리지 말고 ”
동하가 조금 짜증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러나 수찬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얄밉게 빙긋 웃을 뿐이었다.
“저도 그 정도밖에는 모르겠네요.”
“최수찬!”
“저 붙잡고 닦달하셔봤자 소용없어요. 정 그렇게 궁금하시면 그분에게 직접 물어보시면 되겠네요. 아무래도…….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수찬은 놀리기라도 하듯 빙글빙글 말을 돌리며 대답했다.
동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턱 근육이 강하게 도드라졌다. 부글부글 화가 끓었지만, 수찬의 말이 그르다고 볼 수 없었으므로 동하는 반박하지 못했다.
“나가.”
그저 불통한 이 한 마디를 뱉어놓는 것밖에는.
***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이다. 사희는 평소보다 더 이르게 집을 나섰다.
매번 성실하지 않은 적 없었지만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다른 마음이었다. 어른들끼리의 감정이야 어떻든 간에 재민이와는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이제야 겨우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희는 재민에게 주려고 사서 직접 포장까지 마친 선물을 가방에 넣었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슬라임 만들기 세트다. 재벌가 아이가 액체괴물 장난감 같은 걸 가지고 놀까 싶어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혼자서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이니 마음에 들어 할 것이라 믿는다.
풀장의 문을 열고 들어간 사희는 데스크에 앉아있는 직원에게 살짝 묵례를 건넸다. 평소라면 그쪽에서도 비슷한 인사가 돌아왔을 터인데 오늘은 왜인지 그녀가 난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강사 휴게실로 들어가려던 사희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네?”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게 무슨…….”
되묻던 사희는 이내 말끝을 흐렸다.
월요일과, 수요일 1시부터 3시 사이. 수질개선을 위한 브레이크 타임. 회원들은 물론 강사들조차 출입이 불가한 시간. 그러나 사실은 오직 한 아이와 그 아이를 담당하는 강사, 그녀만을 위해 개방된 시간. 이 시간에 더 이상 출입할 수 없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눈치챈 것이다.
“죄송하지만 강사님. 오늘부터 이 시간에 풀장 출입을 하실 수 없어요. 이 시간 강습은 다른 강사 분으로 교체되었습니다.”
말을 전한 직원이 사희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출입카드는 제게 반납하고 가시면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사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문다. 그리곤 윗옷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출입카드를 꺼내 데스크 위에 올려놓았다.
손이 허전하다. 가지고 있을 때는 그게 특권인줄 몰랐는데, 막상 잃고 나니 특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닌 척했지만 사실 그것에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에게 그토록 반감을 보였던 이곳 강사들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면 우스울까. 이제 저도 똑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면 자길 조금은 덜 밉게 봐주진 않을까. 별 우스운 생각이 다 든다. 기분이 서글프고 입맛이 썼다.
돌아서려던 사희는 문득 재민을 위해 준비해 온 선물이 생각났다.
“혹시 이것 좀 전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희가 가방에서 투박하게 포장한 선물 상자를 꺼내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차세령과 재민, 그리고 유 선생이 서 있었다.
“어머, 강사님이 왜…….”
유 선생이 당황한 표정으로 사희를 한번, 뒤이어 차세령의 표정을 살폈다.
“제가 분명히 잘 말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유 선생은 안절부절못하며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사희는 싸늘한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는 세령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수업 때문에 왔습니다.”
“강사님, 제가 그때 그날이 마지막이라고 말했었잖아요.”
유 선생이 다그치듯 이야기하며 눈을 찡긋했다. 제발 자기를 난처하게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담긴 신호였다.
“네, 그런데 제가 사모님께 따로 부탁을 드렸던 게 있어서요.”
사희는 차분하게 말하곤 세령의 얼굴을 보았다.
사희와 눈이 마주치자 세령은 연할 갈색 아이섀도가 곱게 칠해진 눈꺼풀을 살짝 찌푸렸다.
“뭐하고 있어? 어서 재민이 데리고 들어가.”
세령은 마치 투명인간을 대하듯 사희를 무시한 채, 유 선생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네, 사모님.”
유 선생이 다급하게 재민의 손을 잡아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재민이 그 손을 뿌리치더니 사희 앞으로 다가와 섰다. 무슨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희를 올려다보는 눈빛에 서운함이 가득 차 있었다.
‘정말 마지막이에요?’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저를 향해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사희는 살짝 무릎을 굽혀 재민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재민아, 앞으로는 다른 선생님이 재민이 가르쳐주실 거야.”
“…….”
재민의 커다란 눈동자가 일그러진다.
“물에서 힘 빼는 거 잊지 마. 그것만 기억하면 금방 물에 뜰 수 있을 거야.”
사희는 재민의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한번 쓸어 넘겨주었다. 강아지 털처럼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빠져나간다.
“아, 그리고 이건 선생님이 주는 선물.”
가방을 내려놓은 사희는, 그 속에서 포장한 상자를 꺼내 재민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재민은 선물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사희를 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이거 액체괴물 만들기야. 요즘 엄청 유행이라던데?”
사희는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를 내며 재민의 손을 잡아 상자를 들려주었다. 재민은 곧 제 손에 들린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서운한 마음 한편에, 선물에 대한 기대감이 엿보였다. 어쩔 수 없이 아이는 아이였다.
“이거 만들어 봤어?”
사희가 묻자 재민은 가만히 도리질을 했다.
고사리 같은 손이 선물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바라보는데,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울컥했다. 사희는 뻐근하게 아파오는 목구멍을 달래려 마른침을 꾹 삼켰다. 그리곤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빙그레 웃었다.
“한번 해 봐. 만들기 어렵지 않대. 잘 모르겠으면 아빠, 엄마한테 물어보면…….”
“이재민.”
사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령의 냉랭한 목소리가 재민을 부른다. 그 소리에 움찔, 어깨를 움츠린 재민이 기죽은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가자, 재민아.”
유 선생이 재빨리 재민의 손을 잡아끈다. 그 서슬에 재민이는 들고 있던 선물 상자를 놓쳤다. 재민이 얼른 그것을 주워들려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이를 가로막았다.
“이재민! 어서 들어가지 못해!”
아이의 얼굴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사희는 야속한 마음에 세령을 돌아보았지만, 세령은 사희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차가운 표정으로 재민을 노려볼 뿐이었다. 상황이 심상찮음을 느낀 유 선생이 후다닥 재민을 데리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결국 사희는 아이를 대신해 선물상자를 주워들었다. 사희가 다시 그것을 재민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다가서는데, 세령이 빠른 걸음으로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세령이 사희의 손에 들려있던 선물상자를 손등으로 툭 쳐낸다.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지우듯, 무정한 손길이었다. 상자가 바닥으로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이어 세령의 구둣발에 차인 선물상자가 구석에 처박힌다.
세령은 황당해 얼이 빠진 사희의 얼굴을 스캔하듯 위아래로 느리게 한번 훑더니, 애잔하다는 듯 픽, 조소했다. 낮게 읊조린 살찬 한 마디가 사희의 귓가에 꽂힌다.
“삼류 수영강사 주제에 시건방지게.”
세령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사희를 지나쳤다. 마치 그녀와는 단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차갑고 매몰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