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할 말이라는 게 뭐예요?”
“일단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어쨌든 미리 말을 하지 않아 당신의 오해를 키웠던 건 내 잘못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을 속이는 게 재미있어서 말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그런 마음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럼 무슨 마음이었죠?”
“편했어요, 당신이. 그 편안함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편안하다는 동하의 말이 다시 한번 사희의 가슴을 찌른다. 그가 편안함을 느끼기 위해 자신을 속이는 동안, 자신은 매일같이 그를 생각하고 기다리고 설렜다는 사실이 분하고 억울했다. 행여나 저 사람과 더 나은 관계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속에서 하루하루 붕 뜬 풍선처럼 지냈다는 사실도 못 견디게 자존심 상했다.
사희의 눈에 바짝 독기가 어렸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악한 말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에게 모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마구 화를 내고 싶었다.
“편했다고요?”
“그래요. 편했어요.”
사희는 입술을 강하게 짓씹었다.
“그래, 편했겠지. 당신은 내가 편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적당히 즐거울 때까지 즐기다가, 흥미가 떨어지면 자기가 누군지 밝히면 됐을 테니까. 부담이라곤 없었겠죠. 모든 사실을 알면 내가 더 이상 전처럼 당신을 대할 수 없어질 테니 정리도 쉽죠.”
“비약하지 말아요. 맹세코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그때 당신의 마음이 어쨌든 이미 일은 벌어졌어요. 진실이 어디 사후에 알려 한다고 알아지는 건가요? 당신에게 말할 기회는 충분히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하지 않았어. 할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날 속였을 거잖아요. 당신의 그 편안함을 위해서.”
“말했으면요. 그럼 달라지나요?”
동하가 다그치듯 묻는다. 그의 눈에 짙은 안타까움이 묻어있었다. 동하가 사희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말해 봐요. 그랬다면 달랐을까?”
사희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그가 맞다. 그랬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 사실을 담대하게 받아들였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더 빠르게 그에게서 도망쳤겠지.
그러니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것은 그저 구실에 불과하다. 그녀가 지금 느끼는 이 분한 감정은 단순히 그가 자신에게 존재를 숨겼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다는 뜻이다.
동하를 보는 눈이 서리가 들이친 듯 시렸다. 눈이 시리고, 코끝이 시리고, 끝내는 마음이 시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뭉근하게 뒤엉켜 휘몰아쳤다. 동시에 사희의 눈에 뜨겁게 눈물이 고였다.
그제야 사희는 알았다. 지금 자신은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실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수치나 민망함 같은 것은, 몰랐으니까 그럴 수 있다는 말로 위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진짜 참담한 기분은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알게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었다.
사희가 느끼는 분노와 슬픔의 진짜 이유. 그것은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버린 그와의 관계에서, 이제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가져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희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동하는 그녀의 눈물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냥 아주 조금 달라진 것뿐입니다. 내가 보안직원이 아니라 노바의 본부장이라고 해서 우리가 새삼스레 불편한 사이가 될 필요는 없어요.”
동하가 사희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조심스럽고 간절한 할 발자국이었다.
그러나 사희는 이내 남자가 다가온 거리만큼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요.”
멈칫, 동하의 몸이 주춤했다.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서 강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지금껏 이사희를 만나면서 그녀가 저를 향해 이토록 짙은 거부감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마음이 밑받침이 빠져나간 젠가 게임의 나무 블록처럼 일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당신은 날 계속해서 편하게 보는 게 쉬울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에요. 난 이제 당신이 불편하거든.”
뒤로 물러난 사희가, 여전히 그를 외면한 채로 서서 차갑게 말을 이었다.
“부탁이에요. 제발 더 이상 나에게 편한 사이를 강요하지 말아줘요.”
다급히 말을 마친 사희는 그대로 돌아서 방을 나왔다.
“아, 안녕히 가십시오.”
수찬이 황급히 뛰어나오는 사희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넸지만, 사희는 그 인사를 받을 겨를도 없이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
찻잔을 치우러 들어온 수찬은 창밖을 보고 있는 동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뒷모습이 착잡해 보였다. 조금 전, 이 문을 박차고 나간 여자 때문이라는 것은 굳이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언젠가부터 동하의 얼굴에 묘한 미소를 만들고,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를 저토록 초조하게 만들던 한 사람, 수찬은 그게 바로 그 여자였음을 비로소 알아챘다.
이럴 때면 무슨 질문을 해도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수찬은 그저 그의 등 뒤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한편, 조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오래도록 그를 짓누르고 있던 숙명의 짐을 잊고, 새로운 고민에 빠져있기 때문이었다.
동하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았다. 그보다 한 학년 선배였던 동하는 늘 외따로 떨어진 섬 같았다. 상류층 집안 아이들의 전당이었던 사립고에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입학했던 수찬이, 저와 너무도 다른 환경의 아이들 사이에서, 누구에게도 마음 둘 곳 없이 외톨이로 지내야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고독이었다.
동하는 그와 달리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혜석그룹의 아들이었고, 외모며, 성적이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뒤지기는커녕 늘 가장 처음이었다. 모두가 그를 궁금해했고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늘 혼자였다. 동하와 자신의 공통점이라곤 오직 하나, 그가 이 학교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실세와 정반대 선상에 서 있다는 점뿐.
아이러니하게도 동하의 반대 선생에 서서 그를 외톨이로 만든 사람은 그의 형, 이경민이었다. 쌍둥이라지만 얼굴도 성격도 닮은 곳이 거의 없는 두 사람은 마치 지구의 양극 같았다. 그 분위기를 만든 것은 형인 이경민이었다. 소문으론 한때는 두 사람이 사이가 좋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는데, 왜인지 언젠가부터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모두 쉬쉬하고는 있지만 모두가 그것이 이경민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다.
모든 면에서 동생보다 앞서나갈 수 없었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함께 걷는 선로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한번 선을 이탈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점점 뻗어나갔고, 형제의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러다 결국엔 집 밖에서 서로를 보아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사이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하와 수찬이 가까워진 것도 아이러니하게도 이경민 때문이었다. 당시 수찬은 경민의 뒤를 따라다니는 조무래기들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사회배려자인 수찬은 배려받아야 할 사람이 아닌, ‘괴롭혀도 도와줄 이 없음’이라는 딱지를 이마에 붙인 제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눈을 뜨는 매일이 지옥 같았다.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죽어주마.
그날 학교 옥상 난간에 선 수찬의 마음속에 드는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죽음으로 복수하겠다. 그가 난간 밖으로 한 발을 내밀었을 때,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 인정사정없이 바닥으로 던져버린 사람이 있었다. 이동하였다.
그와 똑같은, 아니 그와는 전혀 다른 외톨이.
“네가 죽는다고 그것들이 눈 하나 꿈쩍할 것 같아? 괜한 개죽음 될 뿐이야. 머저리같이 굴지 말고 이 악물고 살아.”
그 뒤부터였다. 수찬이 동하를 따르기 시작한 것은.
물론 동하가 수찬을 대하는 태도는 그 뒤로도 똑같았다. 그 뒤로도 그는 수찬에게 특별히 관심을 베풀지도, 곁을 내주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수찬이 자신의 곁을 따라다니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그게 이동하 방식의 애정이었다.
그렇게 동하의 한발 뒤에서 함께한 세월이 어느새 10년도 훌쩍 넘었다. 그 세월 동안 수찬은 동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실은 이경민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사실도, 그로 인해 형제로부터 기생충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도, 친모라고 생각했던 그의 어머니가 실은 친자의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를 존재를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남편의 내연녀가 낳은 자식을 호적에 들였다는 것도.
그리고 그 무정한 세월, 깊은 외로움 속에서 이동하가 겨우 개죽음을 면한 삶을 이 악물고 버텨내고 있다는 것도.
그의 어깨 위에는 늘 무거운 운명의 짐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짐은 해를 거듭할수록 무거워져만 갔다. 누구도 그의 짐을 덜어 메줄 수 없었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할 수 있다면 그와 함께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저조차도.
그런데 살아있는 모든 순간 오직 그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그 무거운 짐만을 생각하던 그가 처음으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고민에 빠져있는 것을 보는 것은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다.
“본부장님, 식품 파트 담당자들과의 미팅 10분 전입니다.”
수찬은 하고 싶은 말 대신, 담담히 다음 스케줄을 전했다.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동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수찬아.”
자리를 돌아나가려던 수찬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네.”
“내가 불편해?”
수찬이 눈썹을 살짝 치뜬다.
“네?”
“내가 불편한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