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전략기획본부. 딱딱한 이름이 새겨진 아크릴 팻말이 붙은 문 앞에서 크게 한번 숨을 고른다. 불투명한 자동 유리문의 열림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문이 열리자, 좁고 짧은 복도가 보였다. 그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도니 벽 한 면이 유리로 된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공간의 왼편으로 두 명의 비서가 앉아 업무를 보는 데스크가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들이 앉은 자리 대각선 너머로 검은색 문이 있었다. 그 커다란 문 상단 3분의 1지점에 본부장실이라고 적힌 팻말이 붙어있다. 사희는 잠시 그곳에 서서 웅혼한 검은 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 여비서가 사희에게 물었다.
“본부장……님을 찾아왔습니다.”
사희는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 호칭을 힘들게 대답하곤 마른침을 삼켰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물 빠진 청바지에, 티셔츠, 소매 부근에 보풀이 조금 핀 카디건을 걸친 사희의 자유로운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녀의 표정에 의심이 어려 있다. 누가 저를 어떤 시선으로 보든, 위축된 적이 없는 사희였지만 오늘은 왠지 그 의심스러운 눈길 앞에 기가 죽는 느낌이 들었다.
“약속이 되셨나요?”
사희가 대답이 없자, 비서가 다시 물었다. 상냥한 어투였지만, 그 확인 질문이 마치 안에 있는 사람은 함부로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일러주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또한 자격지심이겠지만.
그때 검은색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훤칠한 남자가 나왔다.
굳은 듯 서 있던 사희가 흠칫, 놀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안에서 나온 사람은 이동하가 아니었다.
“유민주 씨, 북카페 플로어 공사 현장 총괄 책임자에게 본부장님 미팅 내일 오전 8시라고 전달해주세요.”
본부장실을 나온 남자와 사희의 눈이 마주쳤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사희는 빠르게 기억을 굴려 어디서 그를 보았는지를 기억해 냈다.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맞다. 기억이 확실하다면 언젠가 엘리베이터에서 이동하를 마주쳤을 때, 그의 곁에 서 있던 남자였다. 갑자기 뛰어든 사희의 무례를 유난히 예민하게 굴었던 남자. 본부장실에서 나와 일정을 지시하는 것을 보니 이동하의 곁에서 그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사람인 듯하다. 비서겠지. 이제야 그가 그날 저를 그렇게 예민하게 다그쳤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그 앞에서 헛소리를 늘어놓았지. 그런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다시금 못난 자격지심이 차올랐다.
그쪽에서도 사희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눈이 조금 커졌다. 호기심이 섞인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그도 지금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부장님을 찾아오셨다고 하셔서요.”
여비서가 사희를 지칭하며 수찬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 네. 그러잖아도 방금 말씀 들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수찬은 우두커니 선 사희 앞에서 길을 터주며 검은 문 쪽을 손으로 안내했다.
사희는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문을 한 번 더 보았다. 긴장 때문인지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사희는 젖은 손바닥을 허벅지 위에 스윽 문질러 닦는다. 그리곤 땀이 가신 손을 꽉 접어 단단하게 쥔 뒤 마침내 한 걸음을 뗐다.
***
본부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에 그가 서 있었다. 방의 한 가운데에 출입구 쪽을 바라본 채로, 창을 등지고 서 있던 남자는, 문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희를 고정된 시선으로 주시했다.
사무실에서는 새 물건 냄새가 났다. 모든 것이 새것으로 반짝거리는 그 공간에 그는 익숙한 모습으로 서 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이 그의 자리였던 양, 조금의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그때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이다. 그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의 위치를 함부로 오해한 자신의 착오가 있었을 뿐.
차라리 그가 문을 등지고 있었다면 잠깐이라도 숨을 고를 여유가 있었을 텐데, 사희는 준비되지 못한 마음으로 즉시에 그를 독대하게 된 상황이 숨 막혔다. 무얼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음이 못내 불편했다.
그가 불편하다. 지금껏 그에게 느꼈던 불편한 느낌과는 또 다른 느낌의 거북함이다. 그간의 감정이 그와의 사이가 익숙지 않음에서 오는 불편함이었다면, 지금은 익숙함에서 오는 불편함이었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익숙한 감정이다. 세상엔 따로 배우지 않았어도 익숙하게 아는 불편함이라는 것이 있다. 일테면 학생 시절에 교장실을 들어서는 기분 같은 것이나, 길에서 경찰차를 보면 괜히 조심스러워지는 마음 같은 것들.
나와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세계의 사람을 만났을 때, 결코 그 관계가 편하지 못할 것이란 것을 직감한 순간 느껴지는 어려움. 오늘은 그런 이유에서 그가 불편했다. 나무뿌리를 씹은 것처럼 입맛이 썼다.
“앉아요.”
동하가 소파를 손으로 안내하며 말을 붙였다.
사희는 최대한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 채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실 말씀이란 게 뭐죠?”
“앉아서 이야기해요.”
“그쪽, 아니. 본부장님과 한가하게 노닥거릴 마음 없어요.”
사희는 ‘본부장님’이라는 호칭과 ‘노닥거릴 마음’이라는 구절에 유독 힘을 주어 말하곤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힘을 가진 사람인지는 몰라도, 나의 의지까지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는 의도를 담은 차가운 거절이었다.
그리고 사희의 그런 동하에게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기에 동하는 입술을 당겨 조금 웃었다. 태연하려 했지만 쓴 기운을 다 숨길 수는 없어서, 입술 끝이 조금 떨렸다.
천천히 몸을 돌려 데스크 쪽으로 걸어간 동하가 사희 쪽을 향해 물었다.
“바쁜 일 있습니까?”
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 할까요? 뭐가 좋아요? 커피, 아니면 홍차?”
“시간이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뭘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요?”
사희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옮겨, 태연자약하게 질문하는 동하를 노려보았다.
동하는 데스크에 살짝 걸터앉은 채로 원망으로 젖은 사희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곤 사희에게 시선을 유지한 채로 전화기의 내선 버튼을 눌렀다.
“여기 차 좀 부탁해요. 홍차, 커피 둘 다.”
사희는 기가 찼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상대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끝내 하고야 말겠다는 듯 행동하는 남자의 행동에 화가 났다.
“뭐하시는 거예요, 지금?”
“강사님 흥분한 것 같아서. 일단 그걸 좀 가라앉혀야 할 것 같아요.”
“됐으니까 하실 말씀이나 하세요.”
“강사님이 뭐에 화가 났는지도 알겠고, 어떤 기분인지도 알겠어요.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은 하든 그 어떤 것도 믿지 않겠다는 각오를 한 사람에게는 나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동하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아닙니까? 그런 생각하고 있던 거.”
사희는 역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이 맞다. 사희는 이곳에 오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다짐했다.
‘그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돼. 그의 눈을 보아선 안 돼. 그의 말에 내 사심을 넣어 해석해서는 안 돼. 내가 믿고 싶은 대로, 함부로 믿어서는 안 돼. 이제는 그런 실수, 다시 해서는 안 돼.’
그렇게나 다짐했는데. 칼같이 냉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다짐이, 동하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너졌다. 그저 저를 한번 지긋이 바라보았을 뿐인데, 그를 향해 갈았던 마음의 칼날이 무딘 칼처럼 이지러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사희는 마음이 급했다. 사희의 머릿속에서는 째깍째깍, 타이머가 돌았다.
곧, 노크 소리와 함께 남자 비서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분주히 시선을 굴려 사희와 동하의 상황을 파악해 보려는 것 같았다.
톡톡, 동하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강하고 분명하게 두 번 쳤다. 동시에 힐끔거리던 비서의 등줄기가 전기에 오른 듯 곧추서더니, 이내 허둥지둥 인사를 남기고 나갔다.
다시 두 사람만 남겨진 본부장실에 정적이 감돈다.
“둘 중에 더 좋은 거로 마셔요. 남은 건 내가 마실게요. 뭐, 둘 다 마셔도 상관없고.”
동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걸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하곤 조금 웃었다.
뺨에 올라붙는 남자의 미소를 본 사희가 이를 꽉 물었다.
“재미있으세요?”
동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뜰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본부장님은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으신가 본데, 전 아니에요.”
“그 본부장이란 호칭, 일부러 따박따박 강하게 강조해서 부르는 거 그만해주면 좋겠어요. 듣기 거북합니다.”
“나한테 명령하지 말아요.”
“명령한 적 없어요. 그걸 명령이라고 받아들이는 당신의 비뚤어진 마음이 있을 뿐이지.”
줄곧 변화 없던 동하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 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지금 이 상황, 전혀 재미있지 않습니다. 내 기분 함부로 추측하지 말아요.”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서 깊은 언짢음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강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마치 먼저 눈을 감으면 지는 싸움처럼 최선을 다해 서로를 노려보다가, 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