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39화 (40/109)

#39

‘왜 웃어? 대체 뭐가 웃긴데?’

남자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아 사희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희가 철모르는 새끼고양이처럼 고개를 갸웃거릴수록 동하의 미소는 더욱 밝아졌다. 날카로운 눈썹과, 굳어있던 입술을 풀고 참 천진하게도 웃는다.

‘이사희! 이사희!’

저쪽에서 누군가 저를 향해 손짓을 하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정아가 그녀를 향해 입 모양으로 무어라 말을 걸고 있었다.

‘인사해, 이사희. 제발 그 망할 손가락은 좀 내리고.’

손가락을 내리라고? 어쨌든 자기가 치켜든 손가락이 여러 사람을 기함하게 하는 이유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사희는 지시에 따라 슬그머니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런데 인사를 하라니, 누구에게?

사희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정아에게 되물었다.

‘누구한테요? 대체 누구한테 인사를 하라는 거예요?’

그때, 사희 앞으로 동하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곤 의아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바라보고 선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노바의 전략기획 본부장 이동하라고 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멍한 표정으로 두 번 느리게 눈꺼풀을 깜박이던 사희의 눈이 번뜩 커졌다.

본부장이라고?!

***

강사 휴게실 안은 종전보다 한층 더 시끌벅적해졌다. 잔뜩 흥분한 이들이 입에 거품을 물며 새로 취임한 본부장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야. 진짜 사람이 뭐 그렇게 생겼냐?”

“그러게. 완전 내 이상형이던데. 내가 가서 확 꼬셔볼까 봐.”

“푸하하하. 네가?”

“뭐야, 그 웃음은. 마치 절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듯 웃는다?”

“내가 올해 들은 이야기 중에서 제일 어이가 없다. 어떤 뇌 구조면 그런 말도 안 되는 망상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

두 사람 모두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한 말인 것 같았는데,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분위기가 점점 묘하게 심각해졌다. 비웃음을 당한 강사의 반반한 미간이 볼썽사납게 구겨지더니, 이내 팩하니 토라진 목소리를 냈다.

“왜 말이 안 돼? 나도 돈 있는 애들 많이 만나봤거든? 사람 무시하지 마.”

“야, 그 남자는 네가 만났던 그런 졸부들이랑은 차원이 다르거든? 혜석그룹이야. 혜석 그룹. 그 남자는 진짜 재벌이라고. 레알. 찐.”

“재벌이면 뭐? 재벌이라도 눈 맞고, 맘 통하면 만날 수도 있는 거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꿈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다. 하여튼 우리나라 드라마가 여자들 다 망친다니까. 재벌이 아무나 막 만나는 줄 알아? 걔들 이미 어릴 때부터 자기들만의 리그가 있어. 오직 그 안에서만 만나고, 연애하고 결혼한다고.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세계 밖의 머글에게 뿅 꽂혀서 당신이 바로 내 운명의 상대입니다, 재벌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난 무조건 당신이랑 결혼할 거야! 하고 손 내미는 그런 일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도 벌어지지 않는다고.”

그녀가 늘어놓는 일장 연설에 곁에서 듣고 있던 강사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도 사랑하면 만날 수도 있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입술을 뚜하니 내민 상대편 강사가 몽니를 부린다.

“사랑?”

그러자 듣고 있던 여자가 콧방귀를 펭 뀐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사랑한다 치자, 그런데 그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결국은 자기들 리그로 돌아가는데. 그리고 막말로 사랑은 하지만, 너랑은 여기까지다. 정해놓은 그 만남이 어떻게 사랑이냐? 엔조이지. 그리고 실상은 그런 엔조이조차도 안 되는 경우가 태반이거든? 걔들은 아무나랑 엔조이 안 해요. 재벌들 전화 한 통이면 연예인들이 줄줄이 대기한다던데 뭐한다고 현실 인간을 만나겠냐.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는 망상이랑 하덜 말아라.”

“아, 상상도 못해? 진짜 김새게 하네.”

“응. 상상도 하지마. 옆에서 보기 애잔하니까.”

왁자지껄 떠드는 강사들의 수다가 휴게실 안에 넘실거렸다.

사희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들의 대화를 듣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니컬한 말들이 귀에 언짢았다. 듣기만 했을 뿐인데, 회초리로 얻어맞는 기분이 들어 불쾌해졌다.

휴게실 한구석에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사희 곁으로 정아가 다가왔다.

“왜 그래 사희 쌤, 안색이 안 좋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런데 왜 다시 왔어?”

“아, 우산을 놓고 가서요.”

사희는 황급히 우산꽂이에 꽂혀있는 우산을 챙겨 들었지만 손이 떨려 그나마도 놓치고 만다. 정아는 사희 대신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주워 건넸다.

“우산이 도왔다. 나 안 그래도 아까 사희 쌤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사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정아를 보았다.

“아까 그 본부장 보자마자 사희 쌤이 보고 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거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던데, 그 남자는 예외더라. 그치?”

정아가 싱글싱글 웃으며 사희의 팔을 툭 친다. 피도 눈물도 없다던 그 세계 사람을 욕하던 기억은 그새 모조리 잊은 듯 보였다.

사희는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 창백했다. 무릎 아래가 사라진 것처럼 다리가 덜덜 떨리는 걸 감추느라 허벅지에 힘을 꾹 주었지만 떨림은 여전했다.

저쪽에서 다시 웃음이 터졌다. 이번엔 본부장이 연예인 누구를 닮은 것 같더라는 영양가 없는 잡설이었다. 모두들 알고 있는 연예인 이름 몇몇을 들먹이며 신이 나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처럼 태연하게 농담하고, 가볍게 웃고 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그 사람 두고 시답잖은 상상이나 늘어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희는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하긴 그를 대상으로 그런 걸 안 한 것도 아니지.

사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동하를 향해 품었던 온갖 기대와, 상상과, 바람 같은 것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그에게 사심을 품고, 그와의 다음을 약속을 기약하고, 그에게 넌지시 여지를 흘리고, 그와 함께 하는 시간에 설레고 가슴 벅차했지. 그의 손길에 떨고, 그의 진의를 궁금해하고, 그의 연락을 기다렸지.

정신이 아찔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수치가 마음을 뒤덮는다.

움츠러드는 자신을 달래기 위해 사희는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

‘그야 몰랐으니까! 난 아무것도 몰랐어. 그 사람이 그저 노바의 보안직원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품었던 마음이지, 그가 혜석그룹의 사람인 줄 알았으면 그런 얼토당토않은 꿈은 절대로 꾸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나 그런 항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되레 자신이 스스로 본인의 급과 한계를 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그런 변명은, 그와 자신이 절대로 한 손에 묶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설령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

그 날카로운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깊게 찌른다.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가 늘어놓던 말들을 왜 단 한 번도 의심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왜 시답잖은 농담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답도 머잖아 떠올랐다. 답은 간단하다. 그런 일은 내 인생에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이벤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마음이 바닥을 모르고 끝도 없이 무너진다.

“이사희,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금방 쓰러질 것 같아.”

정아가 내내 말없이 서 있는 사희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묻는다.

“아니에요. 전 이만 가볼게요.”

당장이라도 무릎이 꺾일 것처럼 휘청했지만, 사희는 최선을 다해 걸음을 뗐다. 지금은 오직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비척비척, 지친 걸음으로 센터를 나오는데 사희의 전화기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겨우 통화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귓가에 붙였다.

“여보세요.”

힘없는 사희의 목소리 뒤에 곧 바닥에 착 깔리는 낮고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나예요.”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사희는 단숨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순간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 사희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놀랐을 거 압니다. 미안해요.”

전화 너머 남자가 정중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차분한 남자의 음성에는 자신이 느끼는 것만큼의 당혹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물며 태연자약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항상 그랬다. 이리저리 출렁거리는 저와는 다르게 그는 늘 균형 속에 있었다. 돛대가 부러진 배처럼 위아래로 오르내린 것은 오직 저뿐이었다. 기대한 것도, 기다린 것도, 애가 탄 것도 오직 저뿐이었다. 눈물이 날 만큼 분했다.

“만나요, 지금. 할 말이 있어요.”

사희에게서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동하가 다시 말했다.

“난 할 말 없어요.”

사희는 어금니를 꽉 물고 차갑게 대답했다. 목이 멘 소리가 났다.

“난 있어요.”

“뭐라고요?”

남자의 당당함이 기가 막혔다.

“난 있습니다. 해명해야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필요 없어요. 듣고 싶지 않아요.”

“내가 당신 있는 쪽으로 갈게요.”

전화통을 붙들고 사희를 설득해보았자 소용없을 거라 판단했는지 동하가 의지 분명한 말을 꺼냈다. 그냥 한번 해 보는 말투가 아니었기에 사희는 덜컥 겁이 났다.

“오지 말아요!”

사희는 버럭 소리쳤다. 복도를 지나가던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사희를 힐끔거리며 스쳐 갔다.

사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감싸듯 짚었다. 남자는 침묵하고 있었지만 전화는 여전히 끊지 않은 채였다.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사희는 무거운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그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주기를 바랐던 때가 있었다.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기다렸는데. 그러나 이제는 그가 이곳으로 온다는 말이 너무도 두려웠다.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어지러워 멀미가 났다.

“강사님.”

“내가 갈게요.”

무언가 말하려는 동하의 말을 자르고, 사희는 짧게 대답했다.

어차피 한번은 당면해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오늘이 나을 것이다. 내일이면 마음이 약해져버릴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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