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이쪽입니다, 본부장님.”
임원의 깍듯한 안내를 받는 남자 쪽으로 시선이 간다.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이어서인지 바로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인가보다. 등장과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남자가.
과연 입이 떡 벌어지게 잘난 껍데기가 엄청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정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서서 본부장의 얼굴을 감상하다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문득 이 좋은 구경을 놓친 사희를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아이, 사희 쌤. 5초만 기다렸으면 볼 수 있는 건데.’
저 정도면 얼굴값을 해도 어쩔 수 없이 용서를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
1층으로 내려와 밖으로 나가려던 사희는 출입구 바로 앞에서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아쉬웠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타이밍 문제라면, 그 타이밍을 맞추는 것은 사람의 의지여야 한다. 그래야 조금은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고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확인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쇼핑몰의 후문 쪽 직원 통로로 나간 사희는 어느덧 보안실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그 앞에 서자 마음이 또 흔들렸다.
나, 너무 구질구질한가. 너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것처럼 보이면 어쩌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갈 때, 보안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는 보안실 앞을 얼쩡거리는 사희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며 지나갔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보안실 문틈으로 사무실 안쪽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 안에 왠지 이동하가 앉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사희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떨지 마, 이사희. 여기까지 와놓고 뭘 망설여.’
사희는 숨을 끌어모아 꿀꺽 삼키곤, 보안실 문을 밀었다.
“저기, 이동하 씨 출근했나요?”
안으로 들어간 사희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남자직원들이 일제히 사희를 돌아본다.
사희는 제 쪽으로 시선을 주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검은 수트를 입고 있는 사람들. 그러나 그중에 그녀가 찾는 얼굴은 없었다.
“누구요? 이동하?”
종이컵을 탈탈 흔들어 마지막 한 방울 남은 믹스 커피까지 털어 마신 남자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묻는다.
“네. 이.동.하.”
상대의 석연찮은 반응에 혹시 제 발음이 부정확했나 싶어 사희는 한 글자 한 글자를 정성 들어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그런 사람 없는데.”
“네? 없다고요?”
그게 혹시 오늘은 쉬는 날이라는 뜻인가 싶어 사희는 한 번 더 되물었다.
“오늘은 출근을 안 했나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없다고요. 그런 사람이.”
사희의 얼굴에서 일순간 혼이 쑥 빠져나갔다. 그런 사람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안실 직원으로 일하던 남자가 하늘로 솟았단 말인가, 땅으로 꺼졌단 말인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는데, 그런 사희의 기색을 눈치챈 직원이 먼저 쐐기를 박았다.
“정말 없어요, 그런 사람. 보안 직원 중에 이동하라는 이름을 가진 직원은 없습니다.”
***
피트니스센터 사무실로 들어선 동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늘어선 직원들을 향했다. 그리곤 저를 향해 눈빛을 쏘아대고 있는 직원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훑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명의 얼굴까지 확인한 남자의 짙은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없다. 이 방 어디에서도 이사희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맥이 탁 풀렸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이 빠지니 어쩐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시답지 않게 느껴졌다. 마치 이사희 말고 다른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노바의 경영 재정비와 혁신적인 미래 전략을 위해 전략기획본부장으로 오신 이동하 이사님이십니다.”
부장의 거창한 소개를 받은 동하는 늘어선 미사여구가 거추장스럽다는 듯, 이맛살을 약간 찌푸렸다.
“모두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깊고 날카로운 눈매만큼이나 깊고 낮은 목소리였다. 바닥에 깔리는 굵은 목소리를 들은 직원들이 서로 들릴 듯 말 듯 작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한다.
힐끔힐끔 훔쳐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여러 가지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젊고 잘생긴 재벌3세 출신 본부장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 이쪽과 저쪽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장벽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들이었다.
“자자, 뭣들 해요. 박수.”
부장의 지시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왔다.
무엇을 축하해야 하는지 모르고 치는 형식적인 박수 소리를 가르고 동하가 부장을 돌아보았다.
“여기 있는 직원이 센터에서 일하는 모두입니까?”
“아, 아마 그럴 겁니다. 전부 모인 거 맞지?”
부장이 사무실 직원에게 묻자, 사람들을 휘 둘러본 직원 하나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부 맞습니다.”
전부일 리가. 심지어 나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빠졌는데. 동하는 수박 겉핥기로 건성건성 대답하는 직원들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서 이사희의 존재에 대해 묻는다면 그건 더 이상한 일일 테니까.
동하는 애꿎은 휴대전화를 주무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솔직했을 텐데. 경솔했던 선택이 훗날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던가. 스치고 말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이토록 그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붙들어 매는 존재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마른 날 논바닥처럼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동하의 속마음이 어떤지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향해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보이며 웃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사희. 너를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까.’
***
멍하게 거리로 나온 사희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 비!”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사희는 대책 없이 비를 맞고 나서야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휴게실에 두고 온 우산을 떠올랐다.
사희는 노바 건물을 올려다보며 잠깐 망설였다.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 서 있는 노바는 오늘따라 더욱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 기분 탓인지 왠지 저 안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가다가 하나 살까.’
하지만 한 푼이 아쉬운 이런 때에 허튼 데에 돈을 쓸 수는 없다. 결국 사희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돌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스포츠센터 층 사람들이 모두 사무실에 몰려가 있어서 그런지 조용했다. 얼른 우산이나 가지고 나가야겠다 싶어, 사희는 조금 서둘렀다.
그녀가 강사 휴게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나오는데 사무실에서 박수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새로 온 본부장을 환영하는 박수이리라. 다들 자기 목숨이 파리 목숨인 줄도 모르고, 박수를 쳐대고 있구나.
이봐요들, 거기 있는 그 사람, 당신들 잡아갈 저승사자야. 그렇게 격렬하게 박수 칠 것 없다고요. 그런 박수 좀 받는다고 그 사람이 감사나 할 것 같아?
미지의 대상에 대한 삐딱한 마음의 소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무실 쪽으로 한껏 조소를 날린 사희가 막 안내데스크 앞을 지날 때였다. 사무실 안쪽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발소리를 피해 황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아, 강사님! 그래, 강사님이 빠지셨던 거구나. 역시 뭔가 허전하다 했어.”
사무실 직원이 그녀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한 것이다. 사희는 도망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멋쩍게 돌아섰다.
“아, 네. 그게…….”
사희는 ‘저는 이제 여기에 볼일이 없어진 사람이어서요’, 라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희의 눈이 저 앞에 선 한 남자에게 꽂혔다.
‘어?’
이동하였다. 분명 이동하, 그 남자였다.
반가운 마음이 반짝, 그리고 뒤이어 엄청난 의아함이 밀려들었다. 방금 전, 보안실 직원 중에 이동하라는 이름을 가진 직원이 없는 말을 분명 듣고 왔는데. 그럼 저 앞에 서 있는 저 남자는 뭐지? 무슨 이유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당신 뭐야? 왜 여기에 있어?’
사희는 저도 모르게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으로 물었다.
그러자 왜인지 모르지만 남자의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그리곤 사희를 향해 앞다투어 이상한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얼핏 짐작하기로는 사희에게 빨리 그 손가락을 내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희는 자신의 손가락을 한번, 그리고 자신을 향해 열렬하게 손짓, 발짓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곤 자신의 손가락을 조금 더 들어 보였다. 그녀의 눈빛이 말한다.
‘이거 뭐? 내 손가락이 왜?’
이힉, 어디선가 요상한 신음이 터졌다. 단말마의 탄성은 비단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그녀를 보고 있는 거의 대부분 사람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뭐야,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데. 알 길이 없는 사희의 표정은 점점 아리송해져만 간다.
바로 그 순간, 줄곧 굳은 표정으로 사희를 보고 있던 동하가 입술을 끌어당겨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