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아직 수업이 남았어요.”
돌아서려던 세령의 걸음이 멈칫한다.
“뭐라고요?”
“아직 수업이 한 주 남았습니다. 일방적인 변심이시니 수업료 환불은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남은 수업에 재민이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세령은 하얀 이마가 묘하게 일그러트렸다가, 곧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시작된 웃음이 몇 초간 이어지는 동안, 사희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여자를 보았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똑똑히 보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어제까지 부렸던 사냥개도 다음날 자비 없이 잡아먹을 수 있는 세계의 사람을. 사희는 그 잔인하고 거만하고 역겨운, 권력의 민낯을 똑똑히 눈에 새겼다. 그리곤 그 추악한 얼굴을 향해 외쳤다. 비록 씹다 버린 껌처럼 뱉어졌다 하더라도, 얌전히 잡아먹히지는 않겠다.
“뭐하자는 거예요? 지금 나랑 기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세령이 떼쓰는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사희는 건조한 눈빛으로 세령의 시선을 마주했다. 사희의 눈빛에는 비록 받은 만큼 돌려줄 힘은 없다 하더라도, 멍청하게 서서 모든 것을 뒤집어쓰지는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제가 약자일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이렇게 쫓겨나듯 계약 종료를 통보 받을 만큼 무의미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모님께서 마땅히 지켜야 할 자존심이 있었듯, 제게도 지켜야 할 자존심이 있습니다.”
“뭐?”
세령의 얼굴에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차가워진 그녀의 눈이 사희를 찌를 듯이 노려본다.
“그리고 제게는 책임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재민이와 약속한 시간을 지키고 싶습니다. 제가 이 계약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게 해주세요.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사희는 정중하고 단호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곤 여전히 무언가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얼빠져있는 세령을 두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
“대박! 특종!”
강사들끼리 오종종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는 강사 휴게실 안이 시끄러워진다. 산비탈을 구르는 도토리처럼 가속이 붙은 채로 휴게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어린 강사 하나가, 몸놀림만큼이나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떴어, 떴어!”
어울려 수다를 떨고 있던 이들은 물론, 잠깐 눈을 붙이고 있던 사람까지 눈을 떠 일제히 그녀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락커를 정리하고 있던 사희도 무슨 일인가 싶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뭐가 떠?”
“새로 온다는 그 본부장 말이야. 혜석 그룹 아들이라는! 나 방금 그 사람 봤다니까.”
“진짜? 어디서?”
심드렁하니 있던 강사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관심을 증폭시킨다.
“방금 임원들이랑 같이 지나가는 거 봤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새된 목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진짜? 어때?”
“되게 젊어. 기껏해야 30대 초중반?”
“오!”
“그리고 진짜 잘생겼어. 임원들이랑 서 있는데 주변 사람들을 자동으로 오징어로 만들더라. 오버 아니고 후광이 비치더라니까.”
“진짜? 나도 볼래. 나도 보자. 어디로 갔어?”
단순한 호기심이었던 분위기가 금세 다른 방향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뭐가 대단한 일이라도 생겼나 했던 사희의 관심은 이내 시들해졌다. 새 본부장이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싶다. 관심도 없는 사람 잘생기면 뭐할 거야. 당장 밥벌이가 끊기게 생긴 마당에. 지금은 한가하게 앉아서 남자 외모를 감상할 처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 사람, 혜석그룹 차남이랬지? 혜석그룹 사람이란 생각을 하자, 이가 뿌득 갈렸다. 정도의 차이만 있다뿐이지 하나같이 제멋대로인 그 집안 식구들. 더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있는 놈들의 오만, 돈이면 사람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천박한 습성 어디 가겠느냔 말이다.
‘꼴도 보기 싫은 것들. 내가 여기 나가면 이쪽으로는 고개도 안 두고 잘 거야!’
가방을 챙기는 사희의 손길에 감정이 실린다. 퍽퍽, 수영복과 세면용품이 가방에 거칠게 처박혔다.
너나 할 것 없이 휴게실을 나가려던 강사들이 마침 문을 밀고 들어온 사무실 직원 때문에 다시 안으로 쪼르르 밀려 들어왔다.
“강사님들, 잠시만 사무실로 모여주시겠어요? 새로 오신 본부장님이 취임 인사 오신대요.”
“와! 개이득. 미남이 제 발로 굴러들어온대!”
강사들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참새들처럼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우르르 몰려나갔다.
강사들이 사라지자 휴게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희 쌤은 안 가봐?”
정아가 홀로 남은 사희를 불렀다.
“제가 거길 가서 뭐해요.”
사희는 심드렁하게 대꾸하곤 가방 지퍼를 닫았다.
사희가 하루아침에 해고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들어 알고 있는 정아의 표정이 이내 씁쓸해진다. 특별채용이라 가장 안전할 거라고 믿었던 사희가, 여기 있는 다른 강사들보다 더 먼저 목이 잘리게 된 상황이 그녀로서도 어지간히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사모님은 왜 갑자기 그러는 거래?”
“그 사람들한테 무슨 이유가 있나요? 싫으면 자르는 거지.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어제까지 키우던 사냥개도 오늘은 잡아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서요. 그런 건가 보죠.”
“그래도 그렇지.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다는 게 말이 돼?”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은 욕구는 들지 않았다. 털어놓고 같이 욕이라도 하면 잠깐 마음이 홀가분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런다고 이미 잘린 목이 다시 붙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결국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한방에 잘려나가는 값어치 없는 모가지라는 걸 스스로 인증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아무리 하찮게 취급당하는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는 데까지는 지키고 싶었다.
사희는 짐을 다 챙겨 넣은 가방을 등에 멨다. 락커에 있는 것을 모두 챙겨 넣었는데도 어깨가 허무하게 가뿐하다. 몇 개월을 일했어도 가지고 나갈 것이 없어 가벼운 가방이 노바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상징하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씁쓸했다.
사희에게서 끝내 대꾸가 없자 정아가 다시 물었다.
“그 여자는 뭐래? 남은 수업 다 보내 달라고 했다며. 순순히 보내주겠대?”
“그야 모르죠. 전 그냥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왔어요. 오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사희 쌤. 정말로 그 수업을 해줄 생각으로 한 말이야?”
“네. 그 사람들 돈, 한 푼도 그냥 받기 싫어요. 구차하고 더러워요.”
“이사희, 아무튼 진짜 대단해. 거기서 어떻게 그렇게 받아칠 생각을 했어? 수업료 환불이 안 되니 수업 다 보내라니.”
“틀린 말 아니잖아요.”
“틀린 말 아니지. 그래도 어디 그런 말 하기가 쉽나. 궁금하다. 그 여자 어떻게 하려나? 그런 말 들으면 남은 수업에 보내도 지는 거고, 안 보내도 지는 거잖아. 그 사모, 이사희한테 완전 제대로 한 방 먹었네. 어떤 표정이었을까? 궁금하다, 야.”
정아가 생각할수록 우습다는 듯 키득거린다.
부들거리며 저를 노려보던 세령의 눈빛이 떠오른다. 자기가 받은 모욕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그 오만한 눈빛에 사희는 다시금 질렸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사희 쌤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다른 일 찾아봐야죠. 저 능력 있어요. 나름 국가대표 출신이라.”
“그건 그런데……. 그래도 이만한 보수 다시 찾기 힘들 텐데.”
“돈 벌고 싶으면 몸 좀 더 움직이면 돼요. 저 워낙 튼튼해서 몸 쓰는 거 안 무서워요. 그동안 몸을 너무 안 쓴 덕에 에너지도 많이 쌓였고.”
사희는 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락커를 닫았다.
“아무튼 사무실에는 선생님이 대충 말해주세요. 지금은 도저히 거기 들어갈 기분이 아니에요.”
정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은 함께 휴게실 밖으로 나왔다. 괜찮다는 걸, 정아는 굳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사희를 마중했다. 그리곤 빳빳하게 굳어있는 사희를 달래려는 의도로 슬쩍 장난을 건다.
“그래도 새로 오는 책임자, 얼굴이라도 좀 보고 가지? 잘생겼다잖아. 대한민국에서 미남은 희귀동물이야. 기회가 있을 때 봐줘야 한다고.”
“관심 없어요. 못생기면 꼴값하고, 잘생기면 얼굴값이나 하는 게 남자 놈들이지.”
사희는 이를 뿌득 갈았다. 잊고 있던 얼굴값 하는 어떤 남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사희는 여전히 입술에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 밤의 흔적을 본능적으로 더듬었다. 단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뱃속이 간질간질하더니 일순 몸이 뜨겁게 달았다. 손끝이 저릿한 게 꼭 전기가 오른 기분이었다.
‘키스는 또 왜 그렇게 잘해가지고…….’
사희는 불가항력으로 그의 부드러운 입술과 혀를 떠올린다. 정중했던 첫 입맞춤부터, 맹수처럼 덤벼들던 뜨거운 애무까지. 그 뜨거운 시간이 그저 한순간의 욕망일 뿐이었을까. 사희는 저를 바라보던 그의 진지했던 눈빛이 단지 한순간의 욕망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남자, 그렇게 가벼운 사람 같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대체 왜 연락이 없는 거냐고!
속이 타는 기분에 사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번 더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휴대전화는 여전히 잠잠했다. 사희는 도통 울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전화기를 꽉 쥔다.
‘오늘까지만이야.’
오늘까지만 기다리고 내일부터는 완전히 잊을 것이다. 어차피 노바에 오는 것도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으니, 이렇게 된 김에 그 남자도 잊어버리면 된다.
‘인생은 타이밍이야. 날 놓치는 네가 바보지. 난 이제 아쉬울 거 없어.’
사희는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남자를 향해 마음속으로 힘껏 소리쳤다.
“그거 꼭 누굴 지칭해서 하는 말 같다? 사희 쌤, 그 썸남이랑 잘 안 되는 거야?”
사희의 애타는 속을 알 리 없는 정아가 장난스럽게 그녀를 떠본다. 사희는 대답하지 않고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암튼 주변에 좋은 자리 있는지 나도 알아볼게. 너무 걱정하지마. 다 잘 될 거야.”
사희의 굳은 표정이 갑자기 일자리를 잃어서라고 판단했는지, 정아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편이든 저편이든 둘 다 기분이 상하지만, 차라리 그쪽으로 오해받는 것이 남자 때문에 속상해서 그런다고 밝히는 것보다는 낫기에, 사희는 변명하지 않았다.
“네, 부탁드려요. 선생님. 그럼 저 갈게요.”
사희는 인사를 마치고 미련 없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정아가 막 사무실 쪽으로 돌아서려는데, 조금 전 사희가 타고 내려간 엘리베이터의 바로 옆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알음알음 얼굴이 익은 임직원 몇과 함께 낯선 남자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