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36화 (37/109)

#36

임원들이 떠나고, 본부장실에 홀로 남은 동하는 창 앞에 섰다.

오전에 비가 왔던 탓일까. 정오를 향해가는 도시가 한결 투명해 보인다. 노바를 들고 나가는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과, 주차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늘어선 차들의 행렬을 오래도록 보다가, 고개를 조금 들어 도시를 가로지르는 미월천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천은 남북으로 가로질러, 구와 구를 연결하는 대교 위에는 올해 이 도시의 새 상징마크로 선정된 조형물을 세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정체불명의 조형물과, 새로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교량의 철제 구조물이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번쩍번쩍 빛났다. 모르긴 몰라도 밤이 되면 대낮처럼 불 밝힐 교량과 더불어 저 조형물도 빛을 뿜어낼 것이다.

‘굳이 저렇게까지 밝고 화려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가끔은 낮은 낮답게, 밤은 밤답게 두던 때가 그리워요. 이 도시는 이제 너무 반짝거려서 부담스럽거든.’

반짝이고 화려해지는 것들이 부담스럽다던 사희의 말이 떠올랐다. 사희의 그 말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이 자신에게 익숙한 모습 그대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처럼 들렸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은 그녀가 알던 모습이 아닌 자신은 어떠할까. 나를 보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지러운 상념에서 빠져나온 동하는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곤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번호를 찾아냈다. 지난 며칠간, 수도 없이 반복했던 일이기에 이제는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늘 그랬듯 통화버튼을 누르는 마지막 동작까지는 이어가지 못했다.

‘할 말이 있어요. 사실은 내가 당신이 알던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 나는…….’

사실 나는 뭐? 대체 사실 나는 무엇이지? 당신이 알던 그 사람과,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다르지? 대체 어떤 말로 나를 설명해야 하지?

그런 해명이 우습기도, 구차하기도, 또 부질없기도 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기어이 오늘에 닿았다.

동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대신 비서실 내선 버튼을 눌렀다.

“수찬아, 잠시 들어와.”

어차피 어려운 일이라면, 전화보다는 직접 만나는 편이 좋을 것이다.

***

재민의 수영을 지도하는 내내 사희의 신경은 물 밖에 앉아있는 세령에게 향해 있었다. 그 날의 일도 있고 하니 오지 않겠지 싶었던 사희의 예상과는 다르게 세령은 오늘도 재민의 수업을 참관했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재민이 역시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수업에 참여했다. 이 상황을 불편해하는 것은 오직 사희 하나뿐인 듯했다.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수업이 끝났다.

“받아요.”

물 밖으로 나온 사희를 향해 유 선생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하얀 봉투였다.

“선생님이 그 날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해주신 것에 대한 사례로 사모님께서 주시는 거예요.”

의아하게 보는 사희에게 유 선생이 설명했다. 사희는 손끝에 닿은 봉투를 밀어내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받아요. 어서.”

유 선생이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기색에는 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조금 망설이던 사희는 어쩔 수 없이 봉투를 받아들었다. 단순히 업무 외 수당이라고 하기에는 봉투 안에서 느껴지는 양감이 꽤 두터웠다.

‘무슨 의미지? 고맙다는 뜻인가.’

사희는 어정쩡하게 봉투를 들고 선 채로 풀장을 나가는 세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그녀는 이미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요, 그 날?”

세령과의 거리가 멀어지자 눈치를 살피던 유 선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멍하니 있던 사희가 정신을 차리고 유 선생을 본다.

“네? 아,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이상하네. 그럼 왜 그러시지?”

“왜요?”

“아니, 새 수영 강사를 알아보라고 하셔서 말이야.”

“네?”

사희의 눈이 번쩍 커졌다.

“재민이도 수업에 만족하고, 사모님도 그러셨던 것 같아서 이번엔 좀 오래 하나 했는데. 갑자기 새 강사를 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난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했지 난. 뭐 짚이는 일이라도 없어요? 행여 무슨 실수를 했다든지.”

“실수……요?”

사희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되물었다.

“응. 보통은 이러이러한 게 마음이 안 드신다는 말씀이라도 해주시는데 이번엔 그런 것도 없어서 말이에요. 뭔가 단단히 언짢으신 눈치긴 한데, 내가 알기론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아서. 그래서 혹시 내가 없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 해서 묻는 거예요.”

“…….”

짚이는 것이 있었지만 말로 꺼내놓을 수는 없다.

“하긴 뭐. 이제 와 그런 이유 찾아서 뭘 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수업은 오늘까지만 해주시면 되겠어요. 강사님. 그동안 고생했어요.”

심장이 쿵 떨어진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결국은 그 날의 일이 사희의 발목을 잡으려는 모양이었다. 우려했던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고 본다면 그날 그 자리에 사희가 있게 된 것이 사희의 뜻은 아니었지 않은가.

재민이를 집으로 데려와 달라고 한 쪽은 차세령, 그녀였다. 재민이를 들여보내고 이만 돌아가겠다는 사희를 잡아, 잠깐 자기가 나갈 때까지 재민이와 있어 달라고 했던 것도 그녀였고. 이랬다, 저랬다 입맛에 맞게 사람을 부릴 때는 언제고, 이렇게 하루아침에 해고를 통보하는 행동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니까 지금 이 돈 봉투가 일종에 위로금 같은 건가?

봉투를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선생님?”

저를 부르는 유 선생을 뒤로하고 사희는 빠르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모님, 잠시만요.”

실외로 통하는 문을 밀고 나온 사희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세령을 부른다. 수영복 차림으로 물기도 닦지 않은 채 뛰어나온 사희를 본 수행원이 즉시 그녀를 가로막았다.

“먼저 차에 가 있어요.”

세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수행원은 깍듯한 인사를 마시고 자리를 피했다.

두 사람이 남은 공간에 묘한 정적이 흐른다. 수모를 벗은 사희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곤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새 강사를 알아보신다고요. 저는 오늘까지만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요?”

“제 강의에 불만족하신 부분이 있나요?”

사희의 질문에 세령이 가늘게 눈시울을 좁혔다.

“내가 그걸 왜 설명해야 하지?”

“설명하셔야죠. 해고에는 분명한 사유와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전 그걸 알아야 할 권리가 있고, 고용인께서는 그걸 설명해 주셔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세령의 이맛살이 강하게 찌푸려든다.

“의무?”

“그렇습니다.”

“그런 과정이 필요할 줄 몰랐네. 알겠어요. 사람 시켜서 제대로 절차 밟으라고 할게요.”

차갑게 말을 마친 세령은 더는 볼일 없다는 듯 냉정하게 돌아섰다.

돌아서는 세령을 향해 사희가 다급히 외쳤다.

“혹시 그날 일 때문이시라면 전 억울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제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전 사모님께서 시키신 일을 하느라 거기에 갔을 뿐이고…….”

“어쨌든 있었잖아!”

강하게 짓이겨진 목소리가 사희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껏 무서우리만큼 이성적이던 세령이 이토록 자제력을 잃은 목소리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저를 쏘아보는 세령의 서슬 퍼런 눈빛에 놀란 사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렸다.

“내가 네 억울함까지 고려해야 해?”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사희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달려드는 세령을 그저 넋 빠진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조금 이성을 찾은 세령은 무섭게 부라리던 눈에서 불길을 지웠다. 그리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괜한 입씨름은 그만하죠. 강사님. 억울한 마음 모르지는 않는데,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그래요. 힘이 없으면 그렇게 억울해져요.”

“…….”

“유감이에요, 나도. 집안일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거 워낙 예민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강사님이 좀 이해해요.”

그렇게 말을 마친 세령은 더는 실랑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사희에게서 돌아섰다.

사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일을 끝낼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해결해야 할 일들이, 그녀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그녀의 책임을 기다리는 의무가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은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절대 누구에게도 아무 말 않겠습니다. 못 본 것처럼 잊을게요.”

사희가 간청하듯 외쳤다.

그러자 다급해하는 사희의 목소리를 들은 세령이 피식 조소를 터트렸다. 그리곤 살짝 고개를 돌려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보듯 사희를 잠시 보았다.

“미안해서 어쩌지? 난 사람 안 믿는데.”

“…….”

미소와 말투는 더할 나위 없이 상냥했지만, 그것은 분명 조롱이었다.

사희는 저를 내려다보는 것이 분명한 그녀의 오만한 눈빛에서 모욕감을 느꼈다.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뱃속에서 끓어오른다. 명치를 뜨겁게 달군 바늘로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사희에게는 받은 만큼 돌려줄 힘이 없었다. 그저 치욕스러움을 억누르기 위해 주먹을 꽉 쥐는 것밖에는. 차세령 말대로 힘이 없으면 억울해지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세령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희에게 애잔한 눈빛을 한 번 더 던지곤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사희가 짓씹던 입술을 풀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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