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그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사희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한번 꾹 쥐었다 놓는다.
‘날 떠올렸을 때, 마음이 불편해지면 그때 연락해요. 나, 편한 사람 되기 싫어요.’
그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문제인 걸까. 괜한 도발이었나? 그냥 전화번호만 알려주고 말걸. 막상 연락이 없으니 괜한 소릴 했나 조금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사희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이쪽은 떠올리기만 해도 불편한 사람을, 그쪽은 마냥 편한 마음으로 만나게 되면 그 관계는 평등하기 어렵다. 관심이 있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질질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 누굴 좋아하는 마음이 상대에게 권력이 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의 마음이 저와 같지 않다면,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이쯤에서 자르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언니.”
“응?”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건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어쨌든 나는 후회 안 할 거야.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
서두도, 본론도, 주어도 모두 빼먹은 선문답 같은 말에 강희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사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희야, 너는 정말 예쁘고, 귀해. 네가 무슨 일을 겪었든 그건 변하지 않아. 알지?”
“응. 알아.”
“그래, 역시 우리 사희는 똑똑해. 나는 사희 너만 행복하면 돼. 그럼 더 바랄 거 없어.”
사희는 저보다도 훨씬 작은, 까맣고 앙상한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가 집을 나간 후, 늘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주었던 언니. 강희는 사희에게 언제나 엄마 그 이상이었다. 너만 행복하면 더는 바랄 것 없다는 그 마음이 부담스럽고 지긋지긋해서, 정작 자기 인생에선 매번 발을 헛디디는 언니가 너무도 한심해서 도망쳤지만, 끝내 그 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언니.”
“응.”
“언니도 그래. 언니도 그런 사람이야. 언니가 무슨 일을 겪었든 언니는 정말 귀한 사람이라는 거 절대 변하지 않아.”
“…….”
“그러니까 우리 이제 같이 행복하면 안 될까?”
“…….”
“나는 나만 행복한 것보다 언니랑 같이 행복해지고 싶은데.”
“……미안해. 내가 너한테 짐이 돼서.”
강희의 눈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젖는다. 기어이 언니의 뇌관을 건드린 모양이다.
“아, 됐어. 누가 그런 소리 듣겠대? 암튼 난 이만 갈게. 출근해야 돼.”
그대로 있다간 덩달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사희는 강희를 두고 도망치듯 병실을 나왔다.
“이강희 환자 보호자 분. 잠시만요.”
병실을 나와 뛰어가던 사희를 강희의 담당간호사가 잡는다. 간호사는 곧 사희 앞으로 지로용지처럼 생긴 종이를 내밀었다.
“원무과에서 병원비 중간 정산 요청이 왔어요.”
사희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든다. 용지에는 한눈에 보아도 적지 않은 금액이 적혀있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알면서도 혹시 싶어 사희는 길게 나열된 동그라미를 마음속으로 읽어나간다. 하지만 몇 번을 읽어도 선명하게 찍힌 금액은 바뀌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언니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보험 적용이 거의 되지 않는 병원비는 사희에게 점점 부담이 되고 있었다.
‘괜찮아. 언젠가는 끝나. 분명히 다 지나갈 거야.’
사희는 속절없이 기어 나오는 한숨을 꾹 참아 되삼키며 용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
스포츠센터 층에서 내려 자동문 안쪽으로 들어가던 사희는 사무실 입구에 무리 지어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사무실 직원들이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데 섞여 이야기를 하고 있던 사람들 속에는 정아도 있었다. 심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던 정아가 사희를 발견하고 살짝 손을 들어 인사한다.
“아무튼 그렇게들 알고 계세요.”
사무실 직원의 말을 끝으로 뭉쳤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무슨 일 있어요?”
사희가 가까이 다가온 정아를 보며 물었다.
“으응. 그거, 전에 내가 말했던.”
“구조조정이요?”
“응. 사무실 쪽은 벌써 다 명단이 나왔고, 계약직으로 있던 트레이너들이랑 강사들도 이번에 거의 정리가 되는 분위기야.”
“강사들까지도 전부 다요?”
정제되지 않고 쏟아져 들어오는 충격적 소식에 사희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다. 그러자 정아가 사희의 팔을 잡아당기며 작게 속삭인다.
“쌤은 괜찮아. 사희 쌤은 특별 계약이잖아. 영향 없어, 너는.”
“아…….”
철렁 내려앉았던 가슴이 다소 진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안심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선생님은 괜찮으신 거죠? 일단 계약직 직원들만 정리되는 거면…….”
“적어도 이번에는 쫓겨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나마 괜찮은 거라고 해야 하는 건가?”
“…….”
“아, 앞으로 애들 얼굴을 어떻게 봐. 미우니 고우니 해도 정 많이 들었는데.”
정아가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을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난 정말 이런 거 너무 싫다. 예전에 있던 스포츠센터에서도 갑자기 대표 바뀌면서 직원 물갈이한다는 말이 나왔었거든. 그 말 떨어지자마자 어제까지만 해도 가족 같던 동료들이 서로 자기는 안 잘려보겠다고 눈치 보고 이간질하기 시작하는데. 말도 마. 거의 개싸움이었다니까. 근데 사희 쌤, 진짜 웃긴 건 뭔지 알아?”
사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저었다.
“결국은 다 잘렸다는 거야. 싹 다. 개처럼 싸우던 우리만 우스운 꼴 된 거지.”
건너 듣는 이야기일 뿐인데, 자신의 자존심이 다친 것처럼 불쾌해졌다. 일종에 동족 의식 같은 거랄까. 비슷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당한 우롱이 아주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우리 기준에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은 일이, 그 세계 사람들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더라고. 아마, 이 폭탄을 던져놓으신 그 재벌 3세님도 여기 직원들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모를걸? 관심도 없을 테고.”
“…….”
“막말로 저야 사람들이 얼마가 잘려나가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그저 자기 실적 올리고 대외적으로 회사 잘 굴리고 있다는 평판만 얻으면 그만일 텐데.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어제까지 키우던 사냥개도 오늘은 미련 없이 잡아먹을 수 있는 거. 그게 그 세계 사람들의 생각 아니겠니?”
입술을 뚜 내밀며 한탄을 늘어놓는 정아 옆에서 사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곧 날벼락을 맞을 사람들 앞에서 저 역시 자기는 그 칼날을 피했다고 안도하지 않았던가. 정아 말마따나, 너무 싫다. 사람을 구차하고 비겁하게 만드는 이 기분.
그리고 동시에 이토록 사람의 바닥을 보게 만드는 그 미지의 존재에 대한 반감이 새벽안개처럼 짙어져 사희의 마음을 뒤덮는다. 그 세계에 사람과 부딪히는 일은 결코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무겁게 발걸음을 뗐다.
***
본부장실은 노바 건물의 가장 위층 서편이었다. 해가 직접적으로 들지는 않았지만, 벽 하나가 통유리 창으로 뚫려있으니 일조량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해가 직접 들이치지 않는 덕분에 낮 동안 창을 가려놓지 않고 지내도 좋을 것이다.
사무실 안 구조는 단순하다. 커다란 창이 있는 넓은 사무실 앞쪽으로 여덟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베이지색 소파가 놓여있고, 그 앞은 유리테이블이 있었다. 유리테이블 위에는 본부장 취임을 축하하는 각종 화분들이 놓여있었지만 오늘 오후면 모두 치워질 것이다. 너저분하고, 질서 없는 것은 질색이다.
본부장 취임식은 약식으로 진행되었다. 본부장실에서 임원들과 가벼운 티를 마시며, 축하 인사를 받고, 그에 맞는 감사 인사를 전달하는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다.
“구조조정 플랜은 어느 정도 갖춰졌습니까?”
찻잔을 내려놓은 동하의 질문이 떨어졌다. 어색한 웃음을 늘어놓고 있던 임원들의 표정이 굳는다. 화기애애한 취임식은 애초에 기대한 바 없었다는 듯, 금시에 자리를 고쳐 앉는 모습들이 지난번 미팅 때와는 사뭇 달랐다. 새 본부장의 확고한 의지에 맞춰 그들도 긴장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현재 부문별로 약 50% 이상 진행되었습니다.”
“속도를 좀 더 내셔야 할 겁니다. 이달 안에 구조조정 플랜을 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각 파트별로 경영정상화 방안도 준비하세요. 관련 사항에 대한 미팅은 언제든 응할 겁니다. 상시 보고를 받을 수 있도록 늘 긴장해 있겠으니 어려워 마시고 언제든 찾아오세요. 제가 있는 이 본부장실 문턱, 아주 낮아질 겁니다.”
좌중을 둘러본 동하가 입가에 조금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그의 말이 그냥 하는 겉치레 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본부장실의 입구부터, 무겁고 엄숙하게 꽉 막힌 벽을 뜯어내고, 유리문과 자동문으로 대체케 했다. 언제든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겠다는 그 뜻은, 그저 그런 낙하산에 머물러 있을 생각이 없다는 의지 표명이기도 했다. 바꿔 말하자면 노바 안의 모든 것에 그의 시선이 닿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전직원 대상으로 하는 취임 인사는 대연회장에서 진행하는 것이 좋을까요?”
“직접 나가겠습니다.”
“네? 직접이요?”
“구조조정 관련 소문 이미 어느 정도는 퍼졌을 테고, 사내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에 직원들을 오라 가라 할 수 없죠. 그 앞에서 서서 무슨 연설을 늘어놓은들 들어주는 이나 있겠습니까. 각자 바쁜 시간 그렇게 소비할 필요 있나요. 현장 분위기도 살필 겸, 방해되지 않는 시간에 직접 나가 가볍게 인사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어벙벙한 사람들과는 달리 동하의 표정은 차분했다.
“하지만 취임식도 생략하셨는데…….”
조선 사람은 거절해도 두 번은 더 물어봐야 한다는 통념을 따르려는 것인지 임원 하나가 포기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싫어합니다. 허례허식.”
동하는 무지르듯 뚝, 말을 끊었다. 살얼음이 생길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일순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싸해지는 공기에, 동하는 자기가 직원들을 너무 무안하게 몰아붙였나 싶어 살짝 눈동자를 굴려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둘러앉은 사람들 모두가 그와 눈 마주치기를 꺼려하며 황급히 시선을 거둔다. 저를 쉽게 생각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임직원들이 저를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것도 앞으로의 업무에 좋을 것이 없다.
동하는 헛기침을 한번 큼,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낯을 가려요, 제가.”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던 사람들이 동하의 말에 슬쩍 고개를 든다.
“부끄럼 탑니다. 사람 많은 자리 가면.”
코밑을 훔치며 정말 쑥스러운 듯 이야기하는 동하를 멍하니 지켜보던 사람들이 픽, 웃음을 터트린 것은 잠시 후였다. 덕분에 싸했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또렷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좌중을 바라보며 말하는 동하의 목소리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