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가깝다.
그제야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약간의 틈을 주고 밀착되어있음이 느껴졌다. 여자의 등과 허리를 안고 있는 팔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등줄기부터 시작된 뜨거운 열감이 남자의 얼굴 위로 훅 끼쳐 올랐다. 입술과, 귓바퀴가 금시에 붉게 달아올랐다. 설명할 수 없는 폭발적인 충동이 남자의 내밀한 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때, 바르르 떨리는 사희의 눈꺼풀에 아까부터 매달려있던 속눈썹이 뺨으로 떨어졌다. 동하는 입술을 모아 여자의 뺨 위로 후, 하고 옅게 숨을 불었다.
긴장해있는 얼굴 위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알코올 냄새가 섞인 포근한 온기가 뺨에 닿는 느낌에, 사희는 꼭 감았던 눈꺼풀에 긴장을 풀고 스르르 눈을 떴다.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숨의 주인이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갔어……요?”
사희가 숨이 많이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응, 동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우리도 가요, 라고 말해야 하는데 왜인지 선뜻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희미한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하염없이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을 뿐이었다.
속이 바짝 탔다. 입술의 물기까지 마르는 것 같아, 사희는 혀로 살짝 입술을 핥았다.
바로 그 순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사희의 입술에 닿았다. 사희의 눈이 반짝 커졌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뛰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동하의 입술은 잠시 내려앉았다가 바람에 날아가 버린 마른 꽃잎처럼 떨어졌다. 함지박만 하게 커진 사희의 눈을 남자의 짙고 검은 눈이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사희의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어떻게 해야 할까. 사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자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는 아직도 조금 전의 그 느낌이 남아있다.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은 부드럽고, 정중했던 그 입맞춤을 다시 한번 나누고 싶다고 달싹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왜 이러냐고 밀어내야 하나. 이 입맞춤에 담긴 뜻은 무엇이냐고 따져야 하나. 아니면 우리가 무슨 관계냐고, 우리는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되는 거냐고 물어야 하나. 아니야,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런 궁색한 질문은 지금의 분위기에 어울리지도 않아.
정형화된 관계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갖지 못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느낌에 충실하고 싶다는 충동이 마음속에서 수도 없이 부딪혔다.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사희의 마음이 빠르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사희가 움켜쥐고 있던 동하의 재킷 자락에 힘을 주었다. 그 힘에 이끌려 그의 고개가 사희 쪽으로 기울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남자의 입술에 제 입술을 묻었다. 지금은 그저 이 짜릿한 순간에 매몰되고 싶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동하는 처음엔 가볍게 한번을, 그리고 뒤이어 두 번을 연달아 사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접촉이 반복될수록 입술이 조금씩 벌어져, 사희의 윗입술이 동하의 입술 새에 먹혀들었다.
동하는 입을 조금 움직여 닫혀있는 사희의 턱을 열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것이 사희의 입안으로 침범해 들어온다. 어찌 해 볼 새도 없이 남자의 혀가 사희의 것을 얽었다.
남자가 사희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발이 바닥에서 조금 들리는가 싶더니, 동시에 균형을 잃은 그녀의 몸이 남자 쪽으로 더욱 밀착되었다. 남자는 옷자락을 쥐고 있는 사희의 손을 풀어 자신의 목 위로 감기게 했다. 둘 사이를 막고 있던 손이 사라지자 사희의 가슴이 동하의 가슴팍에 완전히 붙었다. 풍만한 윤곽이 짓눌리며 남자의 가슴을 덮는다.
정중했던 키스는 달아오르는 분위기와 함께 점차 거칠어졌다. 동하는 사희의 입술 안쪽, 여리고 매끄러운 점막을 혀로 긁으며 거칠게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주춤하는 사희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당긴다.
비틀거리는 사희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넣자 두 사람의 다리가 교차로 엉켰다. 서로의 아랫도리가 완벽하게 맞붙자 뜨거운 피가 울컥 몸의 한 부분으로 몰려든다. 오래도록 그 안에서 숨죽어 있던 욕망이 무섭게 고개를 들었다. 빳빳해진 몸의 일부를 여자의 허벅지에 강하게 밀착하며, 동하는 여자의 턱으로 입술을 옮겼다. 말랑말랑한 귓불을 입술로 잘근잘근 물다가, 소라껍데기 같은 귓바퀴 안에 하아, 하고 더운 숨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동하의 목을 끌어안은 사희가 바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푸른 피돌기가 도는 새하얀 목덜미를 혀끝으로 핥자 사희의 입술에서 야릇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사희의 허리를 쥐고 있던 동하의 손이 블라우스 안쪽으로 파고든다. 그의 손가락 끝이 브래지어 와이어 밑을 더듬던 그 순간, 사희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곤 애절하게 매달려있던 팔을 풀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아, 하아. 불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두 사람의 입술에서 뜨거운 숨소리가 번갈아 터졌다.
모로 외면한 사희를 바라보는 동하의 눈이 뿌옇게 풀려있었다. 이가 맞물릴 만큼 강한 아쉬움이 밀려들었지만, 사희의 망설임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기에 동하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이만 가는 게 좋겠어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사희가 짧게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동하를 외면한 채였다.
“설령 무례였대도…….”
동하의 입술에서 무겁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희는 외면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동하를 올려다본다. 흐트러졌던 남자의 눈동자는 다소 이성을 찾은 듯, 예의 그 짙은 검은 빛을 내며 사희를 향해 있다.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동하는 입안에 남았던 말을 흘렸다.
사희는 입안에 뭉근하게 남은 단침을 긁어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나 역시 원했던 무례였으니까.”
“…….”
“먼저 갈게요.”
동하를 두고 걸어 나가던 사희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몸을 돌려 그가 있는 쪽으로 다시 걸어왔다.
사희의 손이 동하의 재킷 안쪽으로 파고든다. 멈칫하고 놀라는 동하의 품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녀가 꺼낸 것은 재킷 안주머니에 꽂혀있던 동하의 만년필이었다.
동하의 손을 잡은 사희는 그의 손바닥에 거침없이 자신의 번호를 적었다.
“날 떠올렸을 때, 마음이 불편해지면 그때 연락해요. 나, 편한 사람 되기 싫어요.”
***
창밖으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둑한 하늘 때문에 아침인데도 꼭 저녁 같았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에 병원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다.
6인 병실은 조용했다. 환자들 대부분은 책을 읽거나 자기들끼리 보드게임 같은 것을 하며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신과 병동이라곤 해도 영화에서나 봄직한 특유의 으스스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가 겉으로만 보아선 일반인들과 다른 바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병원에 가면 으레 볼 수 있는 링거도 매달고 있지 않은 데다, 붕대를 감고 있는 것도 아니니, 환자와 보호자를 환자복으로 구분해야만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다. 오히려 틈만 나면 휴대전화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보호자들이 더 아픈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오랜만에 비 보니까 좋다. 봄비는 쌀 비라던데, 올해는 통 비 보기 힘들었지? 흉년들려나 봐.”
창을 마주하고 앉아 막대사탕을 물고 있던 강희가 혼잣말을 한다.
그 곁에 나란히 앉아 비를 보고 있던 사희가 힐긋 강희를 보았다.
“별 게 다 걱정이야. 언니 먹을 쌀 없을까 봐?”
“원래 옛날부터 농부들이 행복해야 나라가 행복하다고 그랬어.”
“농부 걱정 말고, 언니 걱정이나 해. 농부들은 알아서 자기 행복 잘 찾고 있으니까 언니나 언니 행복 찾으면 된다고.”
강희가 퉁명스럽게 말하는 사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너는? 사희 너는 네 행복을 찾았어?”
“어, 나는 행복해.”
“정말?”
“응. 행복하지 않을 게 뭐 있어. 몸 건강하지, 일 잘하고 있지. 그거면 됐지, 뭐.”
“일은 재미있어?”
“재미랄 게 있나 뭐. 매일 하는 일 뻔하지.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 돈을 많이 받거든, 이번 일은.”
돈 이야기가 나오자 강희의 표정이 반사적으로 조금 어두워졌다.
“내 병원비 때문에 혹시 너,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니야?”
“병원비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언니는 그런 걱정 하지 말고 빨리 낫기나 해.”
먹다 남은 과자부스러기를 툭 털어 넣으며 사희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언니는 자기가 동생을 힘들게 만든다는 것에 강박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앞에서 힘든 내색을 조금이라도 하면 언니가 다시 우울해질 것 같아서 사희는 두려웠다.
잠시 후, 언니는 조금 남은 사탕을 와작 씹으며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수아는 잘 있어?”
“잘 있지. 잘 있어.”
“수아가 나 보고 싶다고 안 해?”
“아니. 그런 말 안 하던데? 엄청 잘 지내는 것 같더라. 이번에 보니까 머리카락도 예쁘게 잘랐던데. 솔직히 언니가 데리고 있을 때보다 낫더라, 뭐.”
사희는 새집 지어 엉켜있던 수아의 머리카락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그 거짓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강희의 눈에 반짝 화색이 돌았다.
“그래? 머리카락을 잘랐어? 별일이다. 수아는 긴 머리 좋아하는데. 사진 없어?”
“사진? 아, 내가 미처 사진을 못 찍었네. 다음에는 꼭 찍어올게.”
“응, 꼭 좀 찍어다 줘. 너무 보고 싶어.”
강희의 눈에 애끓는 그리움이 가득 찼다. 그 언저리에는 강한 죄책감도 함께 있었다.
“수아 보고 싶으면 거울 보면 되지. 언니 딸, 언니랑 똑같이 생겼잖아.”
사희는 어두워지는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급히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강희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던 눈으로 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걘 어쩜 그렇게 날 닮았니? 나 말고 널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너 닮았으면 뽀얗고 예뻤을 거 아냐. 키도 키고.”
“언니 눈에는 내가 예뻐?”
“예쁘지, 그럼. 내 눈엔 TV 나오는 배우들보다 네가 더 예뻐.”
“거짓말.”
“정말이야. 내가 어디 거짓말하니? 이렇게 예쁜데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 없어?”
“많지. 너무 많아서 귀찮아.”
사희는 젠체하며 새침하게 눈을 깜박였다.
“정말? 어떤 사람들인데?”
“일일이 말하자면 입 아파. 그냥 뭐 일단 눈만 마주쳤다 하면 다 좋대. 아, 이놈의 인기.”
“내 동생이지만 이건 좀 재수 없다.”
강희는 입을 가리며 헤헤헤, 웃었다. 사희도 강희를 따라 픽 웃음을 터트린다.
“그중에 네 맘에 드는 사람은 없어?”
“나?”
사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잊고 있던 이동하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