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어떤데, 네 마음은? 좋아하는 거야, 그 사람?’
정아의 질문이 떠올랐다.
순간, 사희의 손끝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사희는 재빨리 고개를 털어냈다.
안 믿겠지만.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닐 거예요. 처음엔 그냥 좀 궁금하고 신경 쓰였을 뿐이고, 나중엔 그냥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던 것뿐, 다른 건 아니에요.
왜냐면요.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거든요. 그냥 오가며 몇 번 만난 게 다예요. 아는 거라곤 고작 이름뿐. 우리는 그 흔한 전화번호도 몰라요. 한 번만 엇갈려도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런 사이일 뿐이에요. 겨우 이런 사이에, 그것도 이렇게 쉽게 누굴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단지 그냥, 그런 것뿐일 거예요.
그런데요, 이상하죠? 나 이 사람, 왜 이렇게 뿌리칠 수가 없을까.
물 먹은 종이에 떨어트린 물감이 번지듯, 화한 느낌이 퍼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싸르르, 통증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때, 은은하게 밝아있던 수영장 조명이 꺼졌다. 순식간에 어둠이 사방을 뒤덮는다. 비상구 계단을 표시하는 안내등과, 수영장 벽장식에 붙어있는 오렌지색 보조 조명만 남은 실내 분위기가 한층 더 은밀해졌다.
어두워져서인지 어깨에 기댄 남자의 얼굴의 음영이 더욱 짙게 느껴진다. 선 굵은 그의 얼굴이 마치 흑과 백으로 그려놓은 솜씨 좋은 그림 같았다.
“저기……. 곧 문을 닫으려나 봐요.”
사희가 조심스레 동하를 흔들어 깨웠다.
소리를 들은 동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린 동하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요. 내가 강사님 불편하게 했어요.”
깍듯하게 떨어지는 사과를 듣자, 순식간에 둘 사이의 거리가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어깨를 누르던 남자의 무게가 사라지자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해졌다.
사희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빙긋 웃었다.
“좀 무겁기는 했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아무튼 그만 가죠. 늦었는데.”
동하는 분주하게 짐을 챙기는 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급할 것 없어요. 나 있잖아, 여기 보안요원.”
“몸 사려요. 그랬다가 진짜 윗사람한테 들키면 그땐 진짜 잘릴 수도 있거든.”
사희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핀잔을 준다.
“특히 이런 행위. 사람이 말이야, 겁도 없이. 다시는 이러지 말아요.”
사희가 빈 맥주 캔을 동하의 눈앞에 흔들어 보이곤 빠직, 구겨 비닐봉투에 담았다.
큭, 동하는 단발의 웃음을 터트리며, 여전히 저를 보안직원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희의 의심 없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동하는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그리곤 한결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다.
“강사님. 내가 그때, 언젠가는 노바를 가질 거라고 했던 거 기억해요?”
“갑자기 그건 왜요?”
“만약 내가 정말 노바를 가진다면 말이에요. 그때도 나랑 이렇게 편하게 앉아 맥주를 마셔줄 수 있겠어요?”
사희는 도통 모를 소리를, 도에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게 말하는 동하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곧 아랫입술을 쑥 내밀더니 애잔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혀만 안 찼지, 그 눈빛은 거의 비웃음에 가까웠다.
“오늘의 주제는 망상인가요?”
“망상?”
“그래요. 지난번에는 식상한 질문을 했잖아요. 오늘은 망상 게임인가 해서요. 그럼 오늘은 더 터무니없는 망상을 하는 쪽이 이기는 건가요?”
빈정거리는 사희의 말을 들은 동하가 입술을 당겨 웃는다.
“그래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치고 대답해 봐요. 그때에도 우리가 지금처럼 이렇게 서로를 편하게 볼 수 있을까?”
대답해 봐요. 나를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나를 어려워도 않고. 내가 당신을 속였다고 분해하지도 않고. 지금처럼 이렇게 나를 그냥 사람으로 대해줄 수 있겠어요?
동하는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눈으로 대신했다.
사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동하를 본다. 그의 눈빛에 짙은 바람이 묻어있었다. 사희는 조금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쪽은 내가 편해요?”
동하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듣는 사희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편한 사람. 당신에게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나는 당신, 전혀 편하지 않은데.’
사희는 속에 있는 말을 꾹 눌러 감추곤 아랫니로 입술을 쓰윽 긁었다. 그리곤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는 입술화장을 손등으로 마저 지워냈다. 함께한 시간이 다른 온도로 적히는 것을 목도하는 일이란 참 서글프다. 허탈한 한숨까지 마저 뱉어낸 사희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과장되게 끌어당겨 빙긋 웃었다.
“이상하네요. 나 원래 남들에게 그렇게 편한 사람 아닌데 날 그렇게 느낀다니.”
“대답해요, 말 돌리지 말고.”
“그럼 반대로 물어볼게요. 당신이 정말 노바를 갖게 된다면, 그때도 날 만나고 싶을까?”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
사희는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 동하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눈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사희는 더 혼란스러웠다.
당신의 진짜 마음은 뭐야? 왜 모든 것이 가정(假定)이야? 일어나지도 않을 그런 일을 상상해서 하는 제안 말고, 그냥 지금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야?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거기 누구 계십니까?”
그때, 아래층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두워진 풀장에 플래시 불빛이 어른거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서로의 얼굴로 향했다가 의자에 어지럽게 놓인 맥주 캔으로 향했다. 이 상황을 남에게 들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희는 조심조심 숨죽여 빈 깡통을 비닐봉투에 주워 담았다. 다급한 손가락에 걸려 의자 귀퉁이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다행히 동하의 손이 순발력 있게 캔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받아냈다. 긴장으로 굳은 사희와 동하의 눈이 마주친다. 크큭, 어찌해볼 틈도 없이 목 안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사희는 재빨리 제 입을 틀어막고, 역시 터지기 직전인 동하의 입술도 마저 막았다. 하지만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는 수영장의 특성상, 웃음소리는 곧 큰 울림이 되었다. 아래층을 맴돌던 플래시 불빛이 그들이 있는 2층 관람석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묻는 목소리가 한층 더 삼엄해졌다. 뒤이어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꼼짝없이 들켰다 생각하고 있던 그 순간, 동하가 사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재빨리 내려가는 반대쪽 계단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두 사람이 막 코너를 돌아 몇 계단을 내려갔을 때, 반대쪽 저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있어요?”
동하가 뛰어 내려가려는 사희를 잡았다. 워낙 세게 끌어당긴 통에, 그 반동에 중심을 잃은 사희의 몸이 휘청 뒤로 넘어왔다. 동하의 팔이 재빨리 사희의 등을 받쳐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좁은 계단 위에서 남자의 몸이 중심을 잃고 비틀렸다. 그대로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는 위기였다. 동하는 두 팔로 사희를 안은 채 순간적으로 몸을 난간 벽 쪽으로 돌렸다.
동하의 등이 먼저 벽에 부딪히고, 다음으론 사희의 얼굴이 남자의 가슴팍에 부딪힌다.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는 사희를 동하의 팔이 저지했다. 무언가 말하려던 것도, 입술에 가만히 올려붙이는 동하의 동작에 의지를 잃었다.
쉿.
플래시 불빛이 어지럽게 배회하는 것이 보인다.
“왜, 무슨 일인데?”
아래층에서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행인 듯했다. 행여 저 사람이 이쪽 계단으로 올라오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정말 낭패였다.
사희는 바짝바짝 차오르는 긴장감에 손가락이 곱는 기분이 들었다. 되는대로 아무거나 잡는다는 게 남자의 재킷자락이었다. 사희는 촉감이 좋은 재킷의 앞섶을 조금 당겨 양손으로 쥐곤 눈을 꼭 감았다.
어릴 때부터 TV에서 심장이 쫄리는 장면이 나올라치면 이불부터 뒤집어쓰고 보는 은근한 겁보였다. 세상 겁날 것 없다는 듯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타고난 천성은 바뀌질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서.”
“그거 수영장 물 정화하는 소리야. 여기 밤이면 원래 별소리 다 나. 빨리 내려와. 주임님이 족발 시켰어. 얼른 가서 먹자.”
다행히 2층을 점검하던 보안요원은 실체 없는 소리를 확인하는 것보다, 야식에 더 마음이 끌렸던 모양이다. 채근하는 목소리와 함께 플래시 불빛이 꺼졌다. 긴급한 상황은 이대로 일단락이 되려는 모양이다.
보안요원들이 자리를 뜨는 소리를 들은 동하는 이제 괜찮다고 말해주기 위해 사희를 내려다보았다. 무어라 말하려던 동하가 달싹였던 입술을 다물고 눈앞의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희는 동하의 품에 코알라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눈을 얼마나 세게 감았는지 속눈썹이 눈두덩에 눌려서 아찔한 각도로 서 있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무리를 빠져 나온 속눈썹이 도톰한 애교 살 밑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어쩐지 목이 조금 졸리는 느낌이 들어 보니, 사희가 그의 재킷을 잡고 있었다. 얼마나 긴장을 하며 쥐고 있는지 재킷 앞섶을 잡은 손끝이 하얗게 질렸을 지경이다.
참 이상하지. 이 여자는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이다. 어느 날은 쇠꼬챙이처럼 빳빳하게 굴다가, 어느 날은 비 맞은 참새처럼 처량했다가, 또 어느 날엔 솜사탕을 손에 쥔 아이처럼 천진하더니, 오늘은 또 이렇게 왁, 하고 놀래면 당장이라도 왕, 하고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순진한 겁쟁이 같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 하고, 또……. 또 사랑스럽기도 해서 동하는 소리 없이 조금 웃었다.
잠시 후, 여자는 터질 듯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에서 치아를 뗐다. 도톰한 입술이 여자의 하얗고 고른 잇새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곧 붉고 연한 혀가 질끈 물고 있던 자리를 살짝 핥는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 그 위를 느리게 지나가는 선홍색 혀. 그리고 뒤 이어지는 하아, 하는 옅은 숨소리.
그 모든 동작이 동하의 눈과 귀에 가감 없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