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왔네요?”
“오라는 뜻 아니었어요? 난 그렇게 이해했는데.”
“맞아요. 그런데 알아들었을 줄 몰랐어요.”
“사람을 너무 얕잡아 보셨네.”
동하는 자리에 서서 사희가 앉아있는 곳을 한참 바라보았다. 말간 얼굴에, 반짝거리는 검은 눈이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하루 종일 불편한 적대감과 싸우던 동하에게는 그저 저를 반가워하는 그 표정만으로도 깊은 위로가 되었다.
동하는 곧 손에 들고 있던 비닐 봉투를 들어 보인다.
“뭐예요, 그게?”
“맥주.”
“여기서 맥주를 마시자고요?”
사희의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뭐 어때요. 내 회사에서 내가 맥주 마시겠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보안 직원이 이래도 돼요?”
“난 돼요. 다른 사람은 안 되는데, 난 돼.”
동하는 모를 소리를 하며 사희에게로 가까이 걸어갔다. 사희와의 사이에 놓인 의자에 맥주를 올려놓곤 그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나란히 앉은 남자의 옆모습이 몹시 피로해 보였다. 때꾼하게 꺼진 눈꺼풀과 날카롭게 패인 뺨의 선이 도드라졌다.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마른 것도 같다.
“피곤해 보이네요.”
“그런가?”
“바빴나 봐요?”
“이래저래 일이 많았어요, 오늘.”
동하가 마른세수를 하며 눈을 꾹 감았다. 숱이 많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잠시 후, 눈을 뜬 남자가 살짝 몸을 기울이더니 사희를 돌아본다.
“강사님은 오늘 어땠어요?”
음, 난 어땠더라. 사희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바쁘긴 했지만 특별히 나쁠 건 없었다.
“난 뭐 그냥 그럭저럭.”
“그게 좋았다는 뜻인가, 나빴다는 뜻인가?”
“음, 뭐 나쁘지는 않았어요.”
“다행이네. 좋은 날만 보내요, 강사님은.”
조금 웃은 동하는 갑갑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댔다. 장신의 몸이 대각선으로 기울자, 앞자리 등 받침대에 무릎이 닿는다. 남자는 지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그 틈을 타 사희는 동하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낮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디테일이 눈에 들어왔다. 격식에 맞게 차려입은 슈트, 포마드를 마른 듯 단정하게 넘긴 머리카락, 커프스링크까지 꼼꼼하게 챙긴 셔츠 자락에서 평소와 다른 이질감이 풍겼다.
“오늘 뭔가 좀……. 달라 보이네요?”
사희의 말에 동하가 오른쪽 눈만 살짝 떠 여자를 돌아본다.
“뭐가요?”
“그냥, 전이랑은 좀 달라요.”
“뭐가 어떻게 다른데?”
“음, 뭐라 할까. 엄청 거창해 보이네요. 누가 보면 보안실 직원이 아니라 무슨 재벌 3세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픽, 동하가 입술을 터트려 웃었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그 말이 우스워 사희도 남자를 따라 웃는다.
“재벌 3세 모습이란 게 뭐 따로 있습니까?”
“있죠.”
“어떤 모습인데요.”
“함부로 다가가기 어렵고, 나 같은 사람이랑은 말도 한마디 안 섞을 것 같은 그런 모습?”
“지금 내가 그래요?”
동하가 다시 사희를 돌아본다. 사희를 바라보는 눈이 피로에 젖어 조금 풀려있었다.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워 보여요, 내가?”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아무튼 좀 달라요. 오늘.”
“그럼 어떤 모습이 더 나은데?”
동하의 질문에 사희는 잠시 골똘하게 생각해 보았다. 딱히 어떤 모습이 더 낫다고 결정하지는 못하겠다. 어차피 어떤 모습이든 지금 그녀에게 이동하는 조금은 어렵고, 조심스러운 상대라는 것은 똑같았으므로.
“그런 거 없어요. 어차피 이동하 씨는 이동하 씨니까. 다 똑같아요.”
“다 똑같다……. 마음에 드네요, 그 대답.”
동하의 시선이 느리게 사희의 얼굴을 훑는다. 느슨한 눈빛이었지만 정작 사희는 그의 눈길이 닿는 자리마다 뜨거운 낙인이 찍히는 느낌을 받았다.
동하의 시선이 사희의 입술에 오래 머무른다. 한참 그 입술을 바라보던 동하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가 뜨더니 고개를 뒤로 조금 젖혔다. 그리곤 의아한 점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오른쪽 눈썹을 조금 치떴다. 그러자 짙고 긴 눈썹이 활시위처럼 당겨졌다.
동하의 시선이 마치 화살처럼 자신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사희는 겸연쩍은 마음에 입술을 살짝 핥으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왜요?”
“강사님도 오늘은 좀 달라 보이는데?”
“내가요?”
“응. 빨개요, 입술이.”
홧홧한 기운이 순식간에 온 얼굴에 번졌다. 사희는 군고구마처럼 달아오른 두 뺨을 손으로 감싸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 입술이 좀 터서 그래요.”
“입술이 텄어요? 왜, 어디가 아픈가?”
동하가 확인하려는 듯, 사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거리가 좁아지자 남자에게서 묵직한 머스크향이 풍겼다. 사희는 티셔츠 목덜미 깃을 끌어올려 황급히 입술을 가렸다.
“워낙 물에 자주 들어가니까, 건조해서 그래요.”
“그렇군요.”
다행히 동하는 더 이상은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동하는 맥주 캔을 따 사희 앞에 놓아주곤 제 몫의 맥주를 들어 벌컥 크게 몇 모금을 들이켰다. 식도를 치고 넘어가는 탄산의 상쾌한 느낌에 지쳤던 몸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취기가 오르는 건지, 아니면 열이 오르는 건지 몸이 나른해지고 정신도 조금 몽롱해졌다. 하루 종일 그를 괴롭히던 긴장과 피로가 사라지니 비로소 참고 있던 졸음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전쟁 같은 현실 속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이 아늑한 평화 속에서 조금만 쉬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을 가지 못하게 묶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동하는 느리게 술을 삼켰다.
사희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물 밖에서도 물속에 있는 것처럼 이토록 고요한 평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곁에 앉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적당한 긴장감 덕분에 완연한 평화 속에서도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자꾸만 애가 탈 뿐이었다.
이럴 때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아무렇지 않은 척 떠들어라도 보겠는데, 오늘 그는 왜인지 평소보다도 더 과묵했다. 맥주를 넘길 때마다 하아, 하고 나는 소리만 한숨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어둑하게 내려진 조명, 풀장의 잔잔한 물결,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은 말없이 제 몫의 맥주를 비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는 맥주를 넘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적요가 찾아왔다.
기나긴 침묵을 지키는 것에 지친 사희가 급히 아무 말이나 생각해 고개를 돌렸다.
“맞다, 나 오늘 되게 엄청난 곳에 다녀왔…….”
사희의 말이 맺음을 다하지 못하고 잦아든다. 사희의 눈에 곤하게 잠든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동하는 잠들어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미동도 없이. 대체 낮 동안 얼마나 고단한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 수 있을까. 눈 감은 남자의 얼굴이 파리해 보였다.
다소곳하게 모은 손으로 잡고 있는 맥주 캔이 당장이라도 바닥에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다. 사희는 얼른 몸을 기울여 동하의 손에 들려있는 맥주 캔을 빼 들었다. 손끝에서 맥주 캔이 빠져나가는데도 남자는 깨어날 줄 몰랐다.
사희는 동하의 옆자리로 조금 더 당겨 앉아 그의 팔을 잡아 살며시 흔들었다.
“이동하 씨,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어요.”
그 순간, 흔들린 반동에 중심이 흐트러진 동하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깜짝 놀란 사희가 남자를 잡아보았지만 그 커다란 장신을, 그것도 정신이 없는 상태의 성인 남자의 무게를 두 팔로만 버텨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스르륵, 미끄러지듯 무너진 동하의 고개가 사희의 목덜미에 닿는다. 동하의 숨이 사희의 쇄골 언저리에 부드럽게 닿았다. 어디선가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었다.
당황한 사희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심장이 얼마나 크게 뛰는지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점점 더 중심을 잃고 아래로 미끄러지는 동하의 코와 입술이, 벅차게 오르내리는 사희의 가슴팍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다간 그때는 아찔한 그림이 펼쳐질 것이다.
사희는 하는 수 없이 동하의 가슴을 받쳐 조금 일으켜 세운 뒤, 그의 고개 밑으로 제 어깨를 받쳤다. 으음, 자세가 편해지자 남자가 나른한 숨소리를 냈다. 토해내는 숨의 온도가 높다. 어깨에 닿은 이마도 뜨끈뜨끈했다.
사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동하의 이마를 짚어 보였다. 몸이 불덩이였다.
“어디 아파요?”
어깨에 기댄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하는 대답 없이 그저 더운 숨을 느리게 뱉으며 시들하게 기대있을 뿐이었다.
“열이 있는 것 같은데 병원에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희가 다시 물었다. 동하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강하게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긁듯이 풀어놓는다.
그 모습을 보는데 사희는 어쩐지 속이 상했다.
“이렇게 아프면 뭐 하러 왔어요. 안 오면 안 오나 보다 하고 좀 기다리다 갔을 텐데.”
원망의 말을 늘어놓던 그때, 따듯한 무언가가 사희의 손가락을 잡았다. 사희는 전기에 오른 듯 굳은 채로 눈동자만 조금 움직여 얽혀있는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동하의 손이 사희의 손가락을 잡고 있었다.
“잠깐만…….”
처음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를 조심스럽게 잡았던 동하의 손이 조금 움직이더니 이내 사희의 손등 전체를 감싸 쥔다. 흡사 저를 두고 떠날까 봐 최선을 다해 붙들고 있는 아이의 모습 같았다.
당황한 사희의 몸이 빳빳하게 굳는다. 머리는 그 손을 뿌리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왜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잠깐만 신세 좀 질게요…….”
어깨에 기대 눈을 감은 남자의 숨이 조금씩, 조금씩 느려진다. 잠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정을 찾는 그의 숨소리에 비해 사희의 숨소리는 점점 리듬을 잃고 흐트러졌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목 밑이 벌떡거릴 지경이었다. 달뜬 호흡을 달래기 위해 사희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가슴이 크게 오르자, 기대있던 남자의 고개도 같이 움직인다. 고개가 떨어질 것 같아서, 사희는 반대 손으로 얼른 남자의 뺨을 감싸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손끝에 닿은 뺨의 촉감이 예상과 다르게 보드라웠다. 사희의 손이 한층 과감해졌다. 그녀는 살그머니 손을 움직여 동하의 머리카락에 살며시 손을 얹는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카락의 결이 손끝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사희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와 깔끔하게 다듬어진 구레나룻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 가슬가슬한 촉감을 손끝으로 가만 어루만지는데, 갑자기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