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구조조정이요?”
“사무실 쪽은 지금 그것 때문에 비상이야. 사무실 직원들 정리되면, 강사들이라고 가만히 두겠어. 이쪽 정리도 시간문제잖아. 그거 관련해서 이야기 좀 나누다 보니 지금까지 남아있었네. 아우, 피곤하다.”
정아가 팔을 들어 쭉 늘리며 우는소리를 했다.
“아무튼 이번에 잘려나가는 사람 꽤 많을 거야. 원래 관리자들 한 번씩 바뀔 때마다 크든 작든 바람이 한번 불거든. 그런데 이번 바람은 꽤 크지 싶다.”
“왜요?”
“새로 오는 관리자가 거물급이거든.”
“거물이요?”
“응. 혜석 차남이래. 계속 미국에 있다가 이번에 한국 들어오면서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가하는 거라더라. 뭐 사무실 직원들 말로는, 짧은 시간 안에 대외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파격적인 조직개편을 시행하는 거라고 하대? 그래야 자기 앞으로 콩고물이 좀 떨어질 테니까.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물려받는 재산 규모도 좀 달라지지 않겠어?”
“콩고물이라면…….”
“상속 말이야. 혜석 회장님이 병원 신세 진 지 좀 됐잖아. 다시 복귀하기는 영 힘드신 것 같고. 그러니 그 아들도 재산 받으러 왔겠지. 뭐, 장남이 승계받는 건 거의 정해진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재벌 콩고물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콩고물이겠어? 엄청나겠지. 아무튼 고래 싸움에 연약한 새우등만 터지는 거지.”
그러고 보니 혜석의 승계문제에 회장님 건강문제가 겹쳐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하다고 했던 유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워낙 이런 쪽으로는 관심도 없고, 관심이 없는 만큼 정보도 없는지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이야기다. 그럼에도 뉴스나 신문에서만 듣고 보던 구조조정이란 단어를 실제로 접하니 어쩐지 오금이 떨렸다.
“그나저나, 사희 쌤, 웬일로 치마를 다 입었어? 아까는 이 옷 아니지 않았나?”
정아가 갑작스레 방향을 전환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쏜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희는 치맛단을 끌어 내리며 얼른 고개를 피했다. 그리고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척 대꾸했다.
“아까 입은 옷에 뭐가 좀 묻어서요.”
“그래서 집에 가서 갈아입고 온 거야? 아니. 얼마나 중요한 약속이기에 옷까지 갈아입고 나와?”
“중요한 약속이라서가 아니고, 옷에 뭐가 묻었다니까요?”
사희는 발끈해서 외쳤다. 난 그저 오줌이 묻은 바지를 입고 나올 수 없어서 옷을 갈아입은 것뿐이라고. 하필이면 눈에 보이는 자리에 치마가 걸려있어서 입은 거고.
사희는 옷장을 홀딱 뒤집어 거울 앞에서 옷을 몇 벌이나 갈아입었던 사실은 얼른 기억에서 지웠다.
정아는 슬금슬금 눈을 피하는 사희를 이상하다는 듯 보며 락커로 향했다. 정아는 옷을 다 갈아입고 오도록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는 사희 쪽으로 다시 걸어왔다.
“안 갈 거야?”
“가요, 곧.”
“이상하네. 이사희. 오늘 뭔가 행동이 상당히 낯설고 어색한데.”
“제가 뭘요. 선생님 기분 탓이겠죠.”
정아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는 사희의 팔을 잡는다.
“이사희, 화장도 했네?”
정아가 사희의 얼굴 앞으로 코가 닿을 정도로 바짝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사희는 틴트를 바른 선홍빛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저었다.
“입술이 터서 립밤 좀 바른 거예요.”
“입술만 바른 게 아닌데? 볼터치도 한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러세요.”
집요하게 캐묻는 정아를 피해 도망치는 사희의 얼굴이 온통 붉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누가 보면 꼭 몰래 데이트라도 하러 가는 줄 알겠네.”
“데이트는 누가 데이트를 한다고 그러세요!”
사희가 소리를 빽 지른다. 생각했던 것보다 목소리가 컸다. 놀란 눈으로 사희를 보던 정아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좁아졌다.
“맞구나? 데이트.”
“아니라니까요.”
“이야, 이사희. 얌전한 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벌써 부뚜막에 올라가 있었구나? 지난번에 물을 때만 해도 남자 그런 거 키워서 뭐하냐고 하더니. 어쩐지 너무 정색하는 게 이상하다 했어. 누구야? 어떤 사람이야?”
몇 번이고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이미 그렇다고 확신을 내린 정아를 말릴 수는 없었다. 민망해 붉어진 사희의 불을 가볍게 톡톡 두드린 정아가 빙긋 웃는다.
“표정이 왜 그래? 난 이사희 연애하는 거 보기 좋기만 한데.”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아직은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아직은 아니면? 앞으론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사희는 큰 눈을 깜빡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은 정아보다 사희가 더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를 불확실한 사이인데 혼자 내내 들떠 있다는 것이 못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몰라요, 나도.”
사희는 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착잡한 듯한 사희의 목소리를 들은 정아가 흐음, 낮은 한숨을 쉰다.
“이사희 마음은 어떤데?”
“내 마음이 뭐요?”
“원래 상대 마음은 내가 알 수 없는 거잖아. 그치만 적어도 내 마음은 내가 알 수 있지. 어떤데, 네 마음은? 앞으로 발전하고 싶은 거야?”
사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그의 마음을 궁금해하느라 자기 마음이 어떤지 곰곰이 살피지 않았다. 하루 종일 떠오르는 그 얼굴을 억지로 지워내려고 애쓰기만 했지.
“좋아하는 거야, 그 사람?”
정아는 심각해지는 사희의 얼굴을 보며 다시 묻는다.
“내가요? 아니요. 말도 안 돼.”
사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럼 뭔데?”
“뭐 그냥……. 오며 가며 알게 된 가벼운 친분 정도?”
“단지 그거야?”
“네, 그냥 그것뿐이에요.”
사희는 시침을 뚝 떼며 새침하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치, 뭐야 시시하게.”
정아는 도통 재미가 없다는 듯 입술을 뚜 내밀더니 돌아섰다. 그런데 그쯤하고 돌아설 것 같던 정아가 기습적으로 다시 묻는다.
“근데 그 남자, 잘생겼어?”
“그건 왜요?”
“아니, 들어봐서 영 별로인 것 같으면 내가 얼른 다른 남자 소개해주려고 그러지. 나한테 사희 쌤 소개해달라고 한 남자가 제법 잘생겼거든.”
정아의 말을 듣는 사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왜인지 그 미소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사람이 더 잘생겼을걸요.”
“그래? 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데?”
“음. 눈썹이 짙고요. 눈이 큰데 그냥 크기만 한 게 아니고 되게 날카로워요. 특히 눈동자가 엄청 까맣고 반짝거리거든요? 그래서 자꾸만 보게 되는 그런 눈이라고 해야 하나. 코는 이렇게 높아가지고, 꼭 그려놓은 것 같이 그래요. 특히 이마에서 콧대로 이어지는 선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러어어케 높아요.”
사희가 직접 손을 들어, 제 이마와 콧날 부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안 웃게 생겼는데, 막상 웃으면 뭐랄까. 아이 같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키가 엄청 커요. 몸이 커서 처음엔 운동선수인 줄 알았다니까요. 아마 어깨도 여기에 있는 강사들보다 훨씬 더 넓을걸요? 아무튼 여기 강사들이랑은 비교가 안돼요.”
열심히 설명하는 사희의 눈에 반짝 생기가 돈다. 물 먹은 꽃처럼 싱그러워지는 그 표정이 미지의 상대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결코 별것이 아닌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정작 다른 사람도 아는 그 마음을 그녀 자신만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아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사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구나. 그럼 다른 사람 소개해줘 봤자 안 되겠네.”
정아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선다. 그런데 순순히 포기하려나 싶던 정아가 문을 나서려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려 사희를 보았다.
“그런데 사희 쌤.”
“네?”
“오며 가며 알게 된 가벼운 친분이라면서, 어쩜 그렇게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묘사를 잘해? 꼭 매일 매일 생각한 사람처럼.”
사희는 기습적으로 파고드는 정아의 질문에 할 말을 잃고 두 눈을 크게 뜬다. 어버버,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정아의 얼굴에 그러면 그렇지, 하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아는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하려는 사희를 향해, 입술을 손가락으로 막는 시늉을 하더니 찡긋 윙크를 한다.
“잘해봐. 응원할게.”
***
10시 57분. 전광판 시계가 막 56분에서 57분으로 바뀌었다. 벤치에 앉아있던 사희는 얼른 주머니에서 팩트를 꺼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얼굴을 살폈다. 화장이 좀 모자라나 싶어 분첩을 들어 몇 번 더 볼을 두드렸다.
다시 주머니 속에 팩트를 집어넣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3미터쯤 떨어진 곳에 남자가 서 있었다.
10시 58분. 약속한 그 시간이었다. 사희는 가슴이 들썩이는 기분에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