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잡았어야지. 그냥 보냈단 말이냐?”
내빈실을 물러 나오던 동하는 힐난이 묻어있는 낮은 목소리가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사람이 있었다.
동하는 굽어진 복도의 한 면을 장식한, 기하학적인 무늬의 메탈프레임이 있는 거울을 통해 건너편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듣기 싫다.
거울 속에 쌩하게 말을 끊고 사라지는 윤여화의 뒷모습이 보인다.
윤여화가 떠나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가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길고 가는 목의 절반을 가리는 새하얀 차이나칼라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여자는, 세령이었다.
동하는 거울에 비친 세령을 한구석도 빠짐없이 바라보았다. 못 본 사이, 젖살이 빠져 얼굴이 다소 날카로워졌다. 그럼에도 불구, 세령은 여전히 아름답다. 거울 속 세령은 조금은 서툴고, 모자랐던 어린 날의 그녀를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고, 능숙해 보였다.
세령의 표정 없는 얼굴에 흐르는 차가운 기운이 이 집안의 살풍경한 분위기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이제는 그녀의 얼굴 어디에서도 그가 사랑했던 따스한 온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동하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제 완전한 혜석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한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얼굴에 가슴이 시렸다.
슬픈가? 동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렇다. 이 감정은 필시 슬픔이다.
그렇다면 그 슬픔의 정의는 무엇일까.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옛 연인에 대한 미련인가?
그때, 내빈실 쪽으로 몸을 돌리던 세령과 동하의 시선이 거울 속에서 마주쳤다. 그쪽과, 이쪽 완전히 격리된 공간에 서서 두 사람은 거울 속에 비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섰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동하가 그런 것처럼 세령도, 거울 너머에 서 있는 옛 연인을 보며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흔들리는 눈빛과,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눈썹이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느끼고 있는 슬픔의 정의는 무엇인가.
여삼추와 같은 몇 초가 지나고, 이윽고 세령이 동하를 향해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곤 동하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래, 그래야지. 그게 네가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다시금 가슴 안쪽 깊은 곳이 차갑게 시려왔다.
다시 한번 묻는다. 미련인가?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옛 연인에 대한?
동하는 입안에 뭉근하게 고인 침을 느리게 삼켰다. 그리곤 성큼 발을 뗐다.
잠시 거울에서 자취를 감춘 동하가 이내 세령이 서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동하의 발걸음이 제 앞에서 멈추자 외면하고 있던 세령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다. 세령의 목덜미에 드러난 피돌기가 눈에 보이게 울근불근했다. 맞잡아 단전 아래에 고이 올려두었던 손이 긴장한 것인지 절로 움찔거렸다.
잠시 후, 세령이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
바로 그 순간, 동하가 세령 앞에 공손하게 머리를 숙인다.
느리게 굽혔다 일어나는 남자의 정수리를 보는 세령의 가슴에서 무언가 커다란 돌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동하의 이 인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세령은 느낄 수 있었다. 숨을 참는 여인의 가느다란 목덜미가 강파르게 패였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형수님.”
깍듯한 인사를 마친 동하는 얼음처럼 굳은 세령을 두고 미련 없이 발걸음을 뗐다. 맨발로 서릿발 위를 걷는 것처럼, 발을 디딜 때마다 가슴이 시렸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이 시린 고통은 미련인가?
별채의 문을 열고 나서며 동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이것은 미련이 아니다.
동하는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이는 그저 영원한 안녕을 고하고,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곳으로 돌아선 자의 냉정한 받아들임. 오직 그뿐. 결코 지난날에 대한 부질없는 미련이 아니라는 것을.
***
전쟁 같은 하루가 저물고 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니 앞으로는 조금 더 익숙해질 것이다. 동하는 허리를 조이는 재킷 단추를 풀며 차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마침 불어든 한 줄기 바람이 남자의 재킷 자락을 가볍게 날렸다. 귤빛의 오후 햇살이 드리운 조용한 골목에 동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차 앞에서 기대있던 수찬이 동하를 발견하자 몸을 일으켰다.
“끝났어요?”
동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해 보였다.
수찬이 동하보다 한발 앞서 차 문을 열어준다. 동하는 눈이 부신 사람처럼 가늘게 눈을 뜨곤 수찬을 힐끔 보았다.
“뭐야, 이 낯간지러운 친절은?”
“이제 본부장님이시잖아요. 의전에 익숙해지셔야죠.”
수찬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동하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의도가 다분한 농담이었다.
“이런 거 안 해도 돼. 이런 잔심부름이나 시키려고 너 곁에 두는 거 아냐.”
동하가 밉지 않게 수찬을 흘기며 말했다. 수찬은 이번에는 대답 없이 입술을 꾹 다물어 웃어 보였다. 그 마음, 충분히 안다는 미소였다. 동하를 알아 온 이래, 그가 자신을 한 번도 아랫사람으로 하대한 적 없다는 것, 수찬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알아요. 제가 좋아서 곁에 두시는 거.”
“물론 그것도 아니고.”
차에 올라탄 동하는 녹초처럼 늘어진 몸을 자동차 시트에 깊게 기댔다.
“어디 가서 진탕 술이라도 마실까요?”
운전석으로 돌아온 수찬이 뒷좌석으로 몸을 돌리며 묻는다.
“무슨 소리야?”
“스트레스 풀자고요. 오늘 이래저래 불편한 사람들 사이에서 힘들었잖아요. 진탕 취하고 좀 잊어보면 어때요?”
수찬의 말에 동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도 이런 때에 실없는 농담이라도 걸어주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 싶다.
“너랑은 술 안 마셔.”
동하는 눈 감은 채로 단호하게 대꾸했다.
“왜요?”
“너 취하면 말 많아지잖아.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술 먹고 나한테 풀어놓은 네 변변찮은 사랑의 역사만 해도 그게 몇 개야? 그것도 매번 짝사랑. 그 지긋지긋한 레퍼토리를 또 들으라고? 절대 사양한다.”
정곡을 찔린 수찬이 민망한지 귓불을 붉힌다.
“짝사랑만 했던 건 아니거든요? 쌍방통행도 있거든요?”
“어쨌든. 너랑은 안 마셔.”
“나랑은 안 마시면 누구랑 마실 건데요?”
“누구든. 어쨌든 넌 아냐.”
“저 아니면 한국에 술 마셔 줄 친구도 없잖아요.”
수찬이 벌게진 얼굴로 발끈한다.
동하는 전혀 아쉽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수찬이 어리광부리듯 몇 번을 더 청했지만 동하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한번 그러겠다고 마음먹으면 웬만해선 결정을 돌이키는 법이 없는 동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수찬은 결국 포기하고 시동을 걸었다.
동하는 시무룩해지는 수찬의 등줄기에 조금 미안해졌지만 마음을 돌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수찬의 마음을 몰라서 한 거절은 아니었다. 다만 수찬과 함께 술을 한다면, 결국은 서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될 테고, 그것들이 끝내는 그를 울적하게 할 것임을 알기에 오늘은 그것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술을 마신다면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사람과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답잖고, 무겁지 않은, 평소의 이동하라면 결코 하지 않을 그런 이야기나 나누면서.
일테면 그날, 그 밤 그녀와 보냈던 시간처럼.
‘오늘 밤에도 그 시간에 근무하나요?’
까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조심스럽게 물어오던 이사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저 그 얼굴과 그녀와 함께했던 짧은 시간을 떠올렸을 뿐인데, 아프도록 긴장되어 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동하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뜬다. 그리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찬아, 넌 무슨 색깔 좋아하니?”
“네?”
“봄여름가을겨울 중엔 어떤 계절을 제일 좋아해?”
“지금 그거, 질문이에요?”
동하가 통 하지 않는 시답잖은 질문을 하는 것이 이상했는지 수찬이 괴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식, 동하가 느슨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은 점차 남자의 붉은 입술을 타고 번지더니 곧 뺨에 희미하게 보조개를 만들며 깊어졌다.
***
“사희 쌤, 뭐야? 왜 다시 왔어?”
정아가 강사 휴게실로 돌아온 사희를 발견하고 놀라 물었다.
이 시간이면 강사 휴게실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희는 갑자기 등장한 정아를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근처에서 약속이 있어서. 갈 데가 마땅치 않아서 잠깐 들어왔어요.”
“별일이네. 수업 끝나면 붙잡아도 꼬리 떼고 도망가기 바쁜 이사희가 굳이 약속 시간 전에 시간을 때우려고 풀에 돌아왔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그 거짓말에는 그다지 신빙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희는 괜히 다이어리를 넘기며 바쁜 체를 했다.
“마침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서요.”
부리나케 무언가를 적는 시늉을 하며 정아를 따돌리려 했지만, 눈치 빠른 정아가 쉬이 넘어가 주질 않았다.
“뭐 하는데?”
“강습일지 적어요.”
“강습일지? 언제부터 그런 걸 썼어?”
“원래부터 썼어요. 기록에 남겨두면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그랬구나. 좀 봐도 돼?”
“아니요. 안돼요. 회원 개인정보라서.”
사희가 두 팔로 황급히 다이어리를 가렸다. 행여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것을 정아가 알면 낭패였다.
“깐깐하기는. 그나저나 벌써 9시야. 조금 있으면 풀장 문 닫을 텐데.”
“네, 갈 거예요. 근데 선생님은 왜 이 시간까지 남아 계세요?”
“응, 나도 일이 좀 있어서.”
다행히 정아는 대화 주제를 돌리려는 사희의 의도에 걸려들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여기 스포츠센터에 큰 바람이 불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노바에 새로운 관리자가 파견됐다는데, 그 사람 오면서 대대적인 조직개편이 있을 거래.”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큰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희를 본 정아가, 키득 웃으며 말을 덧붙인다.
“자르고, 다듬고, 붙이고 한다고. 실적 부진한 곳부터 시작해서 대대적으로 수술에 들어간다는 거지. 일명 구조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