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사희에게서 질문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경민은 약간 놀랐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질문을 하는 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민이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혜석그룹의 유일한 손이 정상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는데, 그에 관한 질문을 감히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고, 그랬기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여자, 지금 나한테 아버님이라고 했어? 이런 호칭으로 저를 부르는 사람은 처음이어서 경민의 표정이 잠시 얼이 빠진 듯 멍해졌다.
“아니, 잠깐. 질문은 내가 한 것 같은데?”
경민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되묻는다.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해주고 있는 말을 다시 듣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요. 그럼 면담의 방향도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경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힘도 들이지 않고 툭 대답했다.
“재민이는 날 좋아하지 않아요.”
“…….”
뜻밖에 대답에 놀란 사희가 힐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깎아놓은 것처럼 말끔한 얼굴에 회색빛 우울이 묻어있었다.
“재민이는 자기 부모 앞에서 가장 불행해 해요. 아까 보셨겠지만.”
“아, 아까는……. 죄송합니다.”
“새삼스레 사과받겠다고 꺼낸 말 아닙니다. 그딴 거 추궁하겠다고 태운 것도 아니고.”
경민은 입술을 당겨 픽 웃더니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난 좀 궁금했어요.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 아이가 선생님에게만은 좀 다른 것 같아서. 선생님은 뭔가 재민이에 대해서 다른 걸 알고 있지 않을까.”
“재민이는 제게도 마찬가지예요. 아직은 제가 재민이에게 믿음을 주는 대상은 못 되었나 봐요.”
반성과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하는 혼잣말을 듣던 경민이 말했다.
“웃었어.”
“……?”
반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희가 살짝 고개를 든다.
“재민이가 선생님을 보면서 웃었다고. 난 이제껏 재민이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그 앤, 날 볼 때면 늘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눈을 하거든.”
그 애의 엄마가 그런 것처럼. 경민은 얼음처럼 차가운 세령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눈빛은 너무도 단호하고, 냉정해서 생각만으로도 그의 가슴을 차갑게 굳혔다.
참 이상한 일이지. 차세령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고 생각한 것도 실은 그녀의 눈빛 때문이었는데.
물론 그때의 눈빛은 지금과는 달랐다. 상대를 향한 강한 믿음과 사랑으로 차 있던 따뜻한 눈빛이었지. 애석하게도 그 눈빛의 주인은 내가 아닌 이동하였지만.
자신의 곁에서 세령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따듯한 눈빛을 한 적이 없었다. 이동하가 떠나고 세령은 그 눈빛을 잃었다. 그 대신 얼음보다 차가운 눈동자로 세상을 살았다. 그래서 경민은 세령과 마주할 때마다, 동상이 걸린 것처럼 가슴 언저리가 뻐근해지곤 했다. 핸들을 쥔 경민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사희는 급격히 우울해지는 남자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세상을 다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이 남자에게서 어쩐지 깊은 허전함이 느껴졌다. 우뚝하게 솟은 콧날, 이마에서 인중까지 이어지는 아찔한 각도가 시선을 잡는다.
‘누굴 닮은 것 같은데…….’
사희는 이경민의 실루엣에서 낯설지 않은 기시감을 느꼈다. 딱 꼬집어 어떤 점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었다. 어디에서 봤더라. 멍하니 혼자 생각에 빠져있는데 경민이 고개를 돌렸다. 무방비하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사희와 경민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어색한 기류가 지났다. 사희는 재빨리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곤 흠흠, 얄궂은 헛기침을 했다. 어색해진 공기를 깨기 위해 사희는 재빨리 다음 말을 찾았다.
“그런데요, 아버님. 전 아버님 생각을 여쭤보았는데, 지금껏 계속 재민이의 생각만 대답하신 거 아세요?”
“음?”
“재민이의 생각은 재민이만 알아요. 그건 재민이 몫이에요. 그러니 재민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라는 추측은 재민이 것을 빼앗는 일이에요.”
“…….”
“재민이가 아빠를 싫어한다는 상상, 하지 마세요. 그건 너무 아픈 일이에요.”
경민의 표정이 굳는다.
‘네가 만든 불행은 나 하나면 족해. 재민이까지 그렇게 만들지 말고 제발 정신 좀 차려!’
세령에게 들었던 모진 원망의 말이 본능처럼 떠올랐다. 다시금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칼에 베이는 고통이 느껴졌다.
“저 앞에서 내려주시면 돼요.”
사희는 지하철역을 손으로 가리키곤, 안전벨트 버클을 풀었다. 인사를 마친 그녀가 차에서 내리려던 찰나, 깊은 침묵에 잠겨있던 경민이 사희를 본다.
“내가…….”
사희는 내리려던 동작을 멈추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내가 아이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겁니까?”
경민의 눈빛이 구름 낀 하늘처럼 어두웠다. 잠시 그 눈을 바라보다가, 사희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요. 아버님께서요. 아버님께서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
별채에 마련된 내빈실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이슈로 어수선했다. 한자리에 모인 이사들은 앞앞에 놓인 산해진미를 본체만체, 제일 가운데 자리에 앉은 윤재화 이사에게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사회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일을 처리하실 수가 있답니까? 심지어 노바 이사들도 이동하 상무의 본부장 선임을 당일에서야 보고를 받았다고요.”
“회장님이 이미 결정하신 일인데, 이사회를 거친다고 결과가 달라집니까? 민감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회장님 마음이 좀 급하셨겠지. 왜 안 그렇겠나?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계신데.”
싱싱한 육회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윤재화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설마 회장님께서 승계에 대한 뜻을 바꾸신 걸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저 몸이 약해지시니 마음도 약해지신 게지. 어쨌든 이동하도 회장님 자식이요. 본인 돌아가시고 나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일게 빤하니, 그전에 손을 쓰신 거죠.”
윤재화는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하곤 약주 잔을 들었다.
“우리는 그저 해오던 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의 목표야 언제나 그랬듯 혜석의 발전이지요. 자, 어수선한 생각들은 이제 그만하고 잔들 들자고. 혜석의 무궁과 발전과 회장님의 건강을 위하여.”
이사들의 표정에 석연찮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경민 부사장의 최측근인 윤 이사가 저토록 담담한 이상 자기들이 나서서 무얼 어쩔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똑똑,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잠시 후 내빈실의 미닫이문이 열리고 동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을 들고 있던 이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응, 동하, 아니 이제 우리 이 상무라고 불러야 하나? 어서 와 앉아라.”
윤 이사가 빈자리를 가리키며 동하를 반긴다.
“경민이는?”
동하는 대답 대신 입술을 굳게 다물며 살짝 눈을 깔았다.
동하의 표정을 본 윤재화는 곧 어떤 상황인지 짐작한다는 듯, 쩝,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저는 지금 다시 회사로 복귀합니다.”
“아이고, 우리 조카. 아주 열심이네. 노바에 청소할 것들이 그렇게 많나? 앉아 식사도 못할 만큼, 응?”
윤 이사가 짓궂게 농담하며 껄껄 웃자, 부근에 앉아있던 노바의 대표이사 김종하의 표정이 굳었다. 눈치 없는 농담인지, 아니면 이러한 껄끄러움을 의도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튼 윤 이사의 말이 상황을 유쾌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확실했다.
“제가 실무경험이 부족해 몸으로 좀 더 뛰는 것뿐입니다.”
“그래, 열심히 해주면 좋지. 노바는 알다시피 이경민 부사장이 공들여 기획한 혜석의 핵심사업이야. 형님이 기획한 프로젝트를 아우가 든든하게 뒷받침해 꾸려주면 기업 이미지에도 아주 좋겠지. 아마 회장님도 그 그림을 염두에 두신 걸 테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라. 나를 비롯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울 테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윤 이사의 질문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적당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하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이사들을 독려하는 윤재화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영민하고 노련한 경영인. 여당의 당 대표를 역임한 바 있는 4선 국회의원의 아들이자, 혜석 그룹 이종학 회장의 처남. 현재는 이경민 부사장과 함께 혜석 그룹 경영 전반을 지휘하는 실세다.
이경민 부사장이 전면에 나서고 있지만 혜석의 모든 사업의 진행과 수습 모두 그가 하고 있다. 그 사실은 여기 앉아 있는 이사들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니 결국 이경민 라인에 선 그들의 지지는 사실 윤재화 전무의 것인 셈이다.
윤재화, 그는 단지 킹메이커일까? 저 인심 좋은 웃음 뒤에 모두가 알지 못하는 다른 모습을 숨겨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의 야망은 어디까지일까.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지나갔다.
“그럼 어서 가 보고. 조만간 식사나 한번 하자.”
윤재화 전무가 한 번 더 동하를 향해 인자하게 웃어 보인다. 눈주름이 보기 좋게 잡힌, 온후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동하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