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28화 (29/109)

#28

“…재민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 해서…….”

사희가 더듬더듬 변명을 꺼내 보지만,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세령이 말허리를 잘랐다.

“재민이 이리 보내고, 그만 돌아가세요.”

세령이 재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나 재민은 엄마에게 가까이 가기는커녕,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더니 이내 사희의 다리 뒤로 숨었다.

“재민아, 이리와. 어서!”

다그치며 가까이 다가오려는 세령의 발짝이 한 걸음 바닥에서 떨어졌을 때, 사희는 종아리 아래쪽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놀라서 내려다보니 청바지 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재민이 사희의 다리를 부둥켜안은 채로 그대로 오줌을 싸버린 것이다.

사희는 아이의 목구멍에서 차마 울음이 되어 터지지 못한 설움이 끅끅하는 기이한 소리가 되어 터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사희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재민아. 괜찮아. 선생님 여기 있어.”

***

뛸 듯이 걸어 내려가는 사희의 발이 바쁘다. 조금 전 목격한 일 때문에 혹시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재게 움직여도 도저히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미쳤지. 거기가 어디라고 그 집엘 함부로 들어가. 그래.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이 사단을 만드느냐고, 멍청하게. 사희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자신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사희는 두 사람 사이에 차갑게 흐르던 냉기와, 적대감을 보았다.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재민이 때문에 묶여있을 필요 없으니 언제든 버리고 싶으면 버려.’라는 말만큼은 분명히 들었다. ‘너, 재민이,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잖아.’ 라고도 했다.

그들 부부의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라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목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VIP 고객들의 사생활에 관한 것이라면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들은 척, 아는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모르는 척 하겠다던 결심이 이런 식으로 흔들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여간 마음이 복잡했다.

-빵.

등 뒤에서 부드러운 경적 소리가 들렸다. 사희는 얼른 길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왜인지 차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지 않고 사희의 보폭과 같은 속도로 천천히 그녀 옆을 따라왔다. 짙게 코팅이 된 고급 세단의 창을 힐긋 한번 본 사희는 조금 더 길가로 몸을 붙였다. 그러나 차는 피하지 않고 되레 그녀 곁에 조금 더 붙어 서더니 창문을 내렸다.

매끄럽게 열린 창문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조금 전에 본 그였다.

혜석 유통의 부사장, 이경민. 다듬어 놓은 것처럼 날카롭고 짙은 눈썹에, 오만한 콧대를 가진 자다. 가끔 뉴스나, 사보에서 얼굴을 본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실물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오늘이 처음인데,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이니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재민이 수영 선생님이시라고요?”

“아, 네. 안녕하세요.”

사희는 허리까지 꾸벅 숙여 인사하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네?”

이경민이 윤곽이 또렷한 붉은 입술을 열고 물었다. 예상과 다르게 제법 친절한 목소리였다. 조금 전에 보았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평온한 얼굴이기도 했다. 초조해하는 자신과는 달리.

이 집 사람들은 원래 잘 놀라지 않는 편인가? 들키지 말아야 할 모습을 들킨 사람들은 저쪽인데, 왜 더 당황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나여야 하는가. 이런 것도 권력의 연장선인가? 무언가 상당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말씀이세요?”

“여기 누가 또 있나?”

사희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담 높은 저택이 늘어선 그 길에는 확실히 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경민은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고개를 한번 까딱했다.

“타세요. 가시는 데까지 데려다드리죠.”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제안인가. 혹시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본 자신을 어디 한적한 곳에 묻어버리겠다는 속셈인 건가.

사희는 찜찜한 기분이 들어 황급히 거절했다.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지하철 타고 가면 되거든요.”

“그럼 지하철역까지.”

“…….”

뭐가 이렇게 집요해. 이봐요. 내가 지하철을 타고 가겠다고 말한 건 당신의 차에 탈 이유가 없다는 의미의 완곡한 거절이라고.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애초에 눈치 같은 걸 보고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 무시하는 거야?

사희는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원래 이들이 이렇게 자기와 별로 상관도 없는 사람들과 쉽게 말을 섞기도 하는 존재들인가.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소위 재벌이라는 사람들은 사람 알기를 뭣같이 알던데.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겁니까?”

경민의 목소리에 옅은 짜증이 묻었다. 인내심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어서 타요.”

남자는 숫제 명령하듯 말했다. 당장 제 뜻대로 하지 않으면 재미없을 거라는 그의 태도가 사희의 심기를 건드렸다.

“제가 타라면 타야 하는 사람인가요?”

잡을 틈도 없이 사희의 입에서 진심이 튀어나왔다. 말을 해놓고 스스로가 더 화들짝 놀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희는 떨고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입술을 힘주어 꾹 다물었다.

그런 사희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경민은 그녀의 그 표정을 단호함의 발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남자의 짙은 눈썹이 눈에 보이게 일그러졌다가 곧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

“선생님과 면담을 하려면 미리 초청장이라도 보내야 하나? 왜 그렇게 경계를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난 그저 재민이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겁니다.”

삐딱한 말투였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되레 그는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입가를 씰룩이는 웃음이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면담이요?”

“그래요. 재민이 선생님이라면서. 아들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아…….”

“이제 타겠습니까?”

이제는 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게 더 우스운 그림이어서 사희는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났다.

“그럼…….”

반 바퀴를 돌아 조수석 근처까지 갔다가, 아무래도 남자와 나란히 앉는 그림은 너무 다정한 것 같아서 사희는 앞문 대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사희가 뒷문을 여는 것을 본 경민이 몹시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본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타라고 하셔서 타는데요.”

“지금 내가 운전하는 차의 뒷자리에 탄다는 겁니까?”

경민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저는 단지.”

사희는 여러모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는 변명을 꺼내려다 말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 이토록 소심하게 몸을 사렸다는 게 생각해 보니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인 것 같다. 그렇다고 일개 계약직 직원 따위가, 부사장이 운전하는 차의 뒷자리에 앉아 가는 것도 이상한 그림이고.

사희가 어찌할까 잠시 망설이고 섰는데, 기다리다 못한 경민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성큼성큼 조수석으로 걸어와 직접 차 문을 열더니 사희를 향해 어서 타라는 손짓을 해 보인다.

“타세요.”

왜 이래. 부담스럽게. 사희의 얼굴이 이 어색하고 민망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살짝 구겨졌다. 이거 어째 혹 떼려다 혹 하나를 더 붙인 기분이다.

“이만하면 예의는 충분히 갖춘 것 같은데. 직접 태워드리기까지 해야 하나?”

사희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경민이 그녀를 재촉했다.

사희는 결국 마지못해 차에 올라타려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빠꼼 고개를 들었다. 경민은 또 뭐가 문제냐는 듯 짙은 눈썹을 치뜬다.

“가까운 지하철역 앞에서 내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희는 다시금 확인을 시켜주기 위해 또박또박 분명하게 말했다. 경민은 픽,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살짝 까딱했다.

“굳이 뭘 또 확인까지.”

“아, 그리고…….”

“또 뭐요? 아직도 뭐가 남았나?”

경민이 이제 정말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역은 홍서역이에요.”

어쩐지 재벌이 지하철 노선을 소상하게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사희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마친 사희는 한결 개운한 표정으로 폴짝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엉덩이에 닿는 고급차 시트의 아늑함에 감탄하느라, 경민이 몹시 황당한 얼굴로 저를 한참 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재민이에 대해 듣고 싶어요.”

경민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떤 것에 대해서요?”

“뭐든.”

사희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다소 어렵다는 듯 이마를 찡그렸다.

“제가 재민이와 함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그 얼마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선생님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말해주면 됩니다.”

사희는 다시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주에 2번 1시간의 수영강습을 하면서 그녀가 재민에게서 본 것들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것들뿐이었다. 방어적이고,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모습들.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부분들까지. 그것들은 어떤 말로 포장해 들려주어야 부모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것일까?

“포장하지 않아도 돼요.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사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경민이 정곡을 찔러 말했다.

“포장하는 말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해주고 있으니까 선생님까지 그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아버님이 보시기에 재민이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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