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넓은 방안으로 오후 햇살이 길게 밀려들어 와 있었다. 섬세한 나뭇조각 프레임을 두른 으리으리한 침대에 누운 이 회장의 창백한 얼굴 위로 햇살이 드리운다. 햇빛이 남자의 주름 사이사이로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시원한 이마와 우뚝한 콧날을 찍어놓은 것처럼 닮은 그의 두 아들이 침대의 양옆으로 나란히 섰다.
“동하의 거취는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상의 없이 일을 결정해 언짢겠지만 사안이 급했다. 내가 수술을 받다 죽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살았으니 별수 없지. 싫어도 당분간은 내 뜻에 따를 수밖에.”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하는 위악한 농담에는 뼈가 있었다.
어금니를 세게 문 경민의 마른 턱선 위로 강인한 근육이 꿈틀거린다.
“동하, 혜석에 큰 도움이 될 거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아버지 그 결정, 정말 혜석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아니면?”
“저 자식을 위한 겁니까?”
동하는 이글거리는 경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투 바라본다.
낯설지 않은 눈빛이다.
모든 것이 뒤바뀐 그날. 동하가 윤여화가 낳은 자신의 친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경민은 줄곧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았다. 자신의 삶에 파고든 칡처럼 여기며 핍박하고, 감시하고, 증오했다. 최선을 다해 동하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려 노력했다. 심지어 동하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을 때조차도.
그중에서도 경민이 가장 집착을 한 것은 아버지 이종학 회장의 인정이었다. 이 회장의 시선이 동하에게 닿을까 늘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살아왔던 그가 지금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일에 마주 서 있으니 경민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제 어머니를 기만한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의 인정을 갈구해야만 하는 운명은 또 얼마나 가여운가. 그랬기에 동하는 되도록 그를 측은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회장은 잠깐의 침묵 끝에 곁눈으로 동하를 슬쩍 본다.
“동하, 잘할 수 있겠지?”
“네.”
동하는 망설임 없이 짧게 대답했다. 이 회장은 동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경민을 올려본다.
“답이 됐니?”
“도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대답은 네가 판단해라. 어차피 내가 무얼 말하든, 너는 네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할 게 아니니.”
빠득 이를 간 경민이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나가버린다.
이 회장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길고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잠깐 사이, 남자는 100년쯤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바짝 마른 고목 나무처럼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저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동하가 무겁게 닫혀있던 입술을 뗐다.
“그래, 가 봐.”
이 회장은 파리한 얼굴로 동하를 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 잘 챙겨라. 끼니 거르지 말고. 일하는 사람 힘은 다 밥에서 나온다.”
“명심하겠습니다.”
동하는 머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동하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 회장은 이미 눈을 감은 뒤였다. 탈바가지를 쓴 것처럼 현실감이 없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동하는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
자켓에 거칠게 팔을 쑤셔 넣으며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경민은 계단 끝에 서 있는 세령과 마주쳤다. 그녀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민은 본체만체하며 지나쳤다. 그런 모습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 세령은 남편 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어머님께서 별채로 가라고 하세요.”
경민이 콧방귀를 뀌며 세령을 힐긋 돌아본다.
“어때? 기분이?”
무슨 기분? 세령이 말 대신 눈짓으로 물었다.
“아, 아직 못 만났나 보네? 찾아봐. 이 집 어딘가에 있을 텐데. 이동하.”
빈정거리는 경민의 목소리에 세령의 가지런한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어떤 기분일까? 죽고 못 살 만큼 사랑했던 남자를 7년 만에 다시 만나는 소감은.”
윤곽이 선명한 입술을 이죽거리며, 경민은 세령을 도발했다.
잠시 흐트러졌던 세령은 그러나 곧 평정을 찾았다. 경민을 향해 몸을 조금 돌려 선 세령이 웃음기 섞이지 않은 빤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내 기분은 잘 모르겠고, 지금 당신 기분이 어떤지는 잘 알겠네요.”
“…….뭐?”
“떠는 것 같은데, 당신.”
경민의 안색이 순식간에 납빛으로 식는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게 질투인지, 분노인지 그것까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신 떠는 게 너무 눈에 보여서 안쓰러워.”
“차세령!”
“아니면 두려운가?”
“입 닥쳐!”
경민이 세령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더니,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세령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별채로 가요. 이사들이 다 모여 있어. 그 어느 때보다 당신 편에 둬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단호하게 말하는 세령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경민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의 얼굴 쪽으로 제 얼굴을 바짝 붙였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손바닥 한 뼘 만큼 가까워졌다.
“너는?”
“……?”
“차세령, 너는 누구 편이지? 나야, 이동하야?”
“또 시작이야? 도대체 언제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쓸 생각이야?”
“그땐 이동하에게 아무것도 없었으니 날 선택했다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잖아. 어때, 마음에 좀 동요가 생기나?”
세령은 대답할 가치를 느낄 수 없다는 듯, 애잔한 눈빛으로 경민을 쏘아보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경민은 저를 무시하고 돌아서는 세령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어깨를 움켜쥔 그의 악력이 살을 꿰뚫을 것처럼 거셌다.
“감히 내 앞에서 등을 돌려?”
“이거 놔요!”
“대답해!”
세령은 있는 힘을 다해 경민의 손을 뿌리치고 그에게서 도망치듯 멀어졌다. 하나 몇 발짝 가지 못하고 다시 경민에게 붙들렸다. 우악스러운 그의 손에 세령의 팔이 꺾였다.
“앗!”
날카로운 신음이 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소란을 듣고 가정부 둘이 달려왔지만, 그들은 이내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시선을 돌려 자리를 피해버렸다.
세령의 흰 얼굴이 순식간에 수치로 붉어졌다. 경민의 팔에 붙들려 흐트러진 블라우스 자락을 바로 정리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미쳤어?”
“대답하라고!”
“별채에나 가 보라고! 당신 밥그릇 챙겨주려고 당신 어머니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알면, 적어도 판은 깨지 말아야 할 것 아니야!”
“설마 네가 나를 위하는 건 아닐 테고. 고도의 두뇌플레이야? 대놓고 이동하 편에 설 수 없으니 연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한심해.”
세령의 목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이죽거리던 경민의 눈빛이 멈칫 흔들렸다.
“네가 이 모양 이 꼴이니까 회장님이 동하를 부른 거야. 네가 이렇게 네 손끝에 매달린 거스러미밖에 못 보는 한심한 인간이니까. 넌 징징거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네 엄마, 네 삼촌이 차려놓은 밥상 앞에 앉아서 숟가락 드는 것도 못 해? 겸상한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다 차려놓은 밥상까지 뒤집어 엎어야겠어?”
“…….뭐라고?”
“넌 네가 불쌍하고, 안쓰러워 미치겠지? 너만 불행하고, 너만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 네가 너 자신을 안쓰러워하느라 함부로 휘두른 칼날에 베인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지?”
“야, 차세령!”
“네가 만든 불행은 나 하나면 족해. 재민이까지 그렇게 만들지 말고 제발 정신 좀 차려! 어리광 그만 부리고.”
세령의 팔을 잡고 있던 경민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세령은 저를 보는 경민의 눈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허를 보았다. 차가운 눈밭을 맨발로 선 아이처럼 시려 보였다. 그 눈빛에 세령은 조금 당황했다.
내 말에 상처라도 받았다는 것인가? 지난 7년간, 최선을 다 해 서로를 냉대하고, 증오하는데 익숙했던 두 사람이 아니었던가. 세령은 한순간 불길이 꺼진 것처럼 식어버린 그의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령의 팔을 완전히 놓아준 경민이 그녀에게서 한 걸음 크게 물러났다. 그의 손이 떠나간 자리가 찬바람이 닿은 것처럼 쌀랑해졌다. 목 뒤로 오한이 든다.
“한심…하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경민이 힘 빠진 얼굴로 웃으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한심한 내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지.”
경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쓸쓸한 목소리였다.
“네 말이 맞아. 난 모두를 불행하게 해. 내가 이동하만큼만 잘났다면 내 어머니도 불행하지 않았을 거야. 한심한 내가 널 불행하게 했고 그리고 이제 내 아들까지 불행하게 하겠구나.”
“재민 아빠!”
“그래서 후회해? 네 선택을? 이동하가 아니라 날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가 널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거야?”
세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경민의 이런 의심과 억측에 시달릴 때마다 세령은 온몸의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이죽거리는 경민을 모멸의 눈으로 바라보던 세령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제발 그만 좀 해.”
“내가 틀린 말 했어?”
“제발, 그만!”
“재민이 때문에 묶여있지 않아도 돼. 버리고 싶으면 버려. 너, 어차피 재민이,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잖아.”
바로 그 순간, 현관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경민과 세령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얼굴이 굳었다.
그 자리에는 재민이 서 있었다. 그리고 당황한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재민의 수영강사, 이사희가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