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동하도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버선발로 나가 그 새끼를 맞이하기라도 해야 해?”
경민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고 비서가 그런 뜻으로 말을 했을 리 없지만 지금으로선 차오르는 분노를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다. 경민의 그런 모습은 이미 익숙한 듯, 고 비서는 대답 없이 잠자코 서 있을 뿐이다.
“차세령은 어디 있어?”
잠시 후, 경민이 예민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모님께선 별채에서 손님들 식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차세령도 이동하가 온 걸 아나?”
“두 분은 아직 마주치지 않으셨습니다.”
경민은 안도인지, 불안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주머니 속에 거칠게 주먹을 쑤셔 넣었다. 손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동하를 부른 아버지의 속셈은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 일이다. 녀석에게 혜석의 일부를 떼어줄 마음인 게다. 본래대로라면 모두 자기의 것일 그것을, 멋대로. 나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아버지가 자신을 못 미더워한다는 것을, 아버지의 신뢰는 지금껏 언제나 이동하 쪽으로 기울어있다는 것을 경민은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혜석은 꼼짝없이 이동하의 손에 쥐어졌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라 생각하는 녀석은 내가 아니라 이동하니까.
내색은 안 해도 언제나 이동하라면 아픈 손가락처럼 애틋해 견디지 못해 하던 아버지다. 이 모든 비극의 희생양이 오직 이동하 하나라는 양, 그 녀석을 보면 아련해지는 아버지의 눈빛이 경민은 너무도 싫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혜석은 나의 영역, 나의 왕국이다. 혜석이 아닌 무엇이라도, 이경민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곧 나의 것이다.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 침범한다면, 그것이 아버지라 해도 용인할 마음이 없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이렇게 흥분할 필요 없지. 왕국의 주인이 굴러들어온 돌에 흥분할 필요가 있는가. 이대로 아래층에 내려가 녀석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태연한 모습으로 이동하를 맞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짝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하가 사라지고 비로소 잠잠해질 수 있었던 자신의 마음에 또다시 큰 파장이 일어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말라비틀어진 목련 꽃잎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동요된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조용해진 정원으로 크고, 작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작은 실루엣의 주인공은 아들 재민이었다.
그럼 저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지?
경민은 아들인 재민보다, 그 아이가 손을 꼭 잡고 있는 여자의 존재가 더 궁금해졌다. 그도 그럴 게, 재민의 반응이 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재민은 늘 남에게 가느다란 손목을 붙들려 주체 없이 이끌려 다니기만 했지, 스스로 남의 손을 잡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아이는 이제껏 엄마의 손도, 아빠인 자신의 손도 먼저 잡지 않았다. 때때로 재민은 수많은 사람 중에서 부모인 그들에게 더욱 냉정한 것 같았다.
경민의 시선이 두 사람이 맞잡고 있는 손에서 자연스레 여자의 얼굴로 향한다. 화려한 이목구비는 아니었지만 모난 데 없이 반듯한 말간 얼굴이었다. 가르마 없이 쓸어 넘긴 머리카락과, 화장기 없는 얼굴 때문에 앳되어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린 것 같지도 않은 인상.
키가 제법 컸고, 몸은 늘씬했다. 아주 오래 운동을 해 온 사람처럼 다부져 보인다. 입고 있는 큼직한 흰 셔츠와 물 빠진 데님이 이 집의 무거운 분위기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서 그녀가 마치 아예 다른 차원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경민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도 잠시 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낯선 여자와 재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빈 정원을 한참 서성거리던 여자는 지루했는지 화단 가까이로 걸어왔다. 그러자 여자의 얼굴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덕분에 경민은 큰 노력이 없이도 여자의 얼굴을 편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여자는 바닥에 떨어진 목련 꽃잎을 수염처럼 코에 붙이더니 멀뚱히 선 재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재민이 웃었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지만 경민은 분명 아이의 작은 입술이 달싹이며 옅은 미소를 만들어낸 것을 보았다.
“고 비서!”
경민이 여전히 시선을 창밖에 둔 채로 고 비서를 불렀다.
“고 비서, 저 여자, 누군지 알아봐. 재민이랑 같이 있는 여자.”
고 비서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경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빳빳하게 굳었다.
돌아본 그 자리엔 고 비서와 함께 이동하가 서 있었다.
녀석이 그를 보고 있다. 아버지의 여자를 꼭 빼다 박은 검은 눈으로.
동하는 경민의 얼굴에 감돌아 있던 화색을 느꼈다. 자기를 보자마자 홀연히 사라져버린 표정이긴 했어도 그가 조금 전 분명히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하의 시선이 자연스레 창밖으로 향했다. 자신이 선 그 자리에선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창밖에 누군가 그를 웃게 한 존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금 전, 여자, 라고 했던가?
“뭐야?”
경민이 동하의 시선을 가로막고 쌀쌀맞게 물었다. 동하는 금세 궁금해하던 눈빛을 지우고 경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께서 찾으셔.”
“무슨 꿍꿍이야. 왜 돌아온 거야.”
“미국 생활이 좀 싫증 나서. 7년이면 그럴 때도 됐지.”
대답을 마친 동하가 입술을 당겨 조금 웃었다. 경민은 온몸의 피가 뜨겁고 빠르게 도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뭐라든 넌 혜석에서 아무것도 가질 수 없어. 내가 너에겐 먼지 한 올 조차도 허락하지 않을 거니까.
“내가 언제 형의 것을 욕심냈던 적이 있던가? 내 기억엔 언제나 그 반대였던 것 같은데.”
동하는 느린 한숨이 섞인 말로 심드렁하게 대꾸하곤,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는 경민을 빤하게 바라보았다. 동하의 눈빛이, 칠흑처럼 검고 깊은 눈동자가 저를 늪처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러니 그나마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기 싫으면 납작 웅크리고 있어.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져주면 더 좋고. 네 어미처럼.”
비웃음을 남긴 경민이 동하를 지나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이 스칠 때, 경민의 어깨가 동하를 세게 치고 지나갔으므로 동하는 뒤로 조금 떠밀렸다.
수없이 들어왔던 모욕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생모에 관한 것은. 그녀의 존재는 동하의 심장 어디쯤에 은밀하게 박혀있었다. 심장에 너무 가까워, 함부로 빼내어 버릴 수도 없는 단단한 옹이가 되어.
동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게 시든 목련 잎이 낙하한다. 자신의 친모와 닮아, 아버지가 사랑하고 계모가 증오했던 목련 나무는 그가 떠나있던 지난 7년간 더 많은 가지를 뻗었다.
‘추해, 너무.’
동하는 추악한 것을 본 양 눈을 질끈 감았다.
청아한 목련을 닮았다던 친모의 존재는, 이미 오래전, 동하의 가슴 속에 타버린 검은 꽃잎이 되어 깊게 묻혔다. 누구도 검게 썩은 꽃잎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구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아들인 자신조차도.
씁쓸한 감정에 젖어 들어 있던 동하의 시선이 목련 나무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우거진 가지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젊은 여자와 어린아이인 것만은 확실했다.
화단에 옹색하게 쪼그려 앉은 두 사람은 바닥에 떨어진 검은 목련 꽃잎을 줍고 있었다. 사뭇 진지하게.
“이사님, 내려가시죠.”
그 한적한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동하는 고 비서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화단 속 두 사람에게 던졌던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
“회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윤재화 이사의 선창에 맞춰 뒤에 서 있던 다른 이사들도 한 마디씩을 덧붙였다.
이 회장은 허리를 굽히며 제 앞으로 다가오는 이사들을 향해 손을 들어 힘없이 인사했다.
“호들갑 떨지 말라니까, 들.”
“호들갑이라니요. 당연히 찾아뵈어야지요. 무탈하게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회장님.”
“이제 그만들 가.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파리가 끓는 법이다. 가서 일들 해.”
이 회장은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거드는 사람들을,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쫓는다. 그 곁에 꼿꼿하게 서 있던 윤여화 여사가 이 회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럼 되나요. 일부러 바쁜 시간 내주신 분들인데. 식사하고 가세요.”
병색이 짙은 이 회장과는 다르게, 윤 여사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짧은 새였지만 방문한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확인하는 여인의 눈빛이 매처럼 빛나고 있었다.
좌중을 훑던 윤 여사의 눈과 동하의 눈이 마주친 것도 그때였다. 동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공손히 목례했다. 뉴트럴 베이지 빛깔의 립스틱이 칠해진 윤 여사의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준비됐나?”
윤 여사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곤 곁에 서 있는 가정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별채에 자리 마련해두었습니다.”
“모두 그쪽으로 모셔.”
그때, 이 회장이 동하와 경민이 불러 세웠다.
“동하, 경민이는 잠시 남아.”
윤 여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언짢아진다. 윤 여사는 굳은 얼굴로 이 회장의 팔에 손을 넌지시 얹는다.
“회장님, 오늘은 무리하지 마세요.”
“당분간 나 안 죽어. 오늘 아니면 내일 해.”
이 회장의 단호한 한 마디가 떨어진다. 지금 막아선다고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는 듯 굳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