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25화 (26/109)

#25

주머니 안쪽에서 우웅, 울리는 진동에 사희가 눈을 떴다. 재민이를 재우다 사희도 설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어느새 강습을 마칠 때에 가까워져 있었다.

“여보세요?”

사희는 자기 청바지에 침 자국까지 남기며 곤하게 잠든 재민을 보며, 아이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 죽여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유 선생이었다. 일이 늦어져 재민이를 픽업하지 못한다는 전화였다. 그녀는 사희에게 재민을 집으로 데려가 줄 것을 청했다.

“제가요?”

나보고 그 집엘 가라고? 혜석그룹 오너가 사는 본가에? 사희는 생각만 해도 불편한 기분에 몸이 빳빳하게 굳는 것 같았다.

-그냥 기사님 차 타고 가서 집에 내려 주기만 하면 돼. 사모님께는 내가 말씀드렸어요.

“그래도 전 좀…….”

그때, 통화 소리에 잠에서 깬 재민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눈을 비비며 이쪽을 물끄러미 보는 재민과 사희의 눈이 마주쳤다.

-강사님도 알잖아요. 재민이, 남자 어른 무서워하는 거. 기사님이랑 둘이 보낼 수는 없어서 그래. 응?

유 선생이 다시금 사희를 설득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막 잠에서 깨어나 기운을 채 차리지 못한 재민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절을 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사희는 입술을 씹으며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집에 데려다줄게요.”

***

회의를 마치고 나온 동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수찬은 룸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동하를 살폈다. 동하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 누른 채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머리 아파요?”

“조금. 혹시 차에 두통약 있나?”

“사다 드릴까요?”

“아냐. 없으면 말아. 좀 지나면 괜찮을 거야.”

동하는 시트에 깊게 몸을 기대곤 탄식 같은 숨을 토했다.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찬의 표정이 안타까웠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여전히 차가 출발할 기미가 없자 동하가 희미하게 실눈을 떴다.

“가자, 늦겠다.”

“괜찮겠어요? 가면 불편한 얼굴들 많을 텐데…….”

“인생이 어디 편한 사람만 보고 살 수 있나.”

딱 끊어 말한 동하는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선배 주변에 편한 사람이 있기는 합니까?”

수찬은 속이 상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이곤 시동을 걸었다.

동하는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묵묵히 바라보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도시 곳곳이 봄꽃축제 영향으로 한산치 못했다.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움직이던 차는 하천변으로 난 도로를 지날 즈음엔 거의 서 있다시피 했다. 손을 잡고 거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동하는 비슷비슷한 높이의 벚나무 사이에서 홀로 우뚝 솟아있는 목련 나무를 발견했다.

새카맣게 타들어 간 꽃잎을 바닥에 흩뿌린 채 어울리지 않는 그림처럼 서 있는 목련 나무. 오래 지켜보았지만 그토록 많은 인파 가운데 누구도 그 나무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저 꽃 말이야. 필 때는 그렇게나 아름다우면서 질 때는 왜 저렇게 초라하고 볼품이 없을까?”

동하의 쓸쓸한 목소리가 들린다.

수찬은 룸미러로 시선을 옮겨 뒷좌석에 앉은 동하를 보았다.

“네? 무슨 꽃이요?”

동하는 대답 없이 그저 창밖만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수찬은 동하의 시선을 따라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후에야 만발한 벚꽃 나무 사이로 시들하게 낙화하는 목련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목련 말하는 거예요?”

“…….”

동하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이 없었다.

그를 따라 꽃나무를 바라보며 동그란 눈을 끔벅끔벅, 몇 번 깜박인 수찬이 흐음, 하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우리 할머니도 그런 말 한 적이 있었어요. 목련은 질 때 유난히 처량하다고. 사실 꽃이란 게 질 때면 다 처량하지만, 목련은 유난히 좀 그런 것 같아요. 너무 하얘서 그런가?”

들릴 듯 말 듯 무어라 혼잣말을 한 동하가 눈을 감는다. 얼핏 듣기로 그 말은 “추해, 너무.” 였던 것 같다. 무겁게 잠긴 쓸쓸한 목소리였다.

***

경민은 정원 쪽으로 난 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창문 앞에는 절정을 지나 시들어버린 목련 꽃잎이 사력을 다해 매달려있다. 뚝뚝 떨어지는 검은 꽃잎은 주검처럼 처참하다.

저택의 2층 창문 앞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우람한 이 목련 나무는 아름다운 시간이 너무 짧다. 봄을 보낼 때마다 몇 번이고 베어 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목련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꽃이다. 저 나무도 그분 손으로 심었다고 들었다. 무얼 봐도 좋다, 싫다 내색하는 법이 없는 과묵하고 차가운 아버지가 봄이면 저 나무 아래에서 애틋한 시선으로 오래도록 꽃을 올려다보는 것을 경민은 매년 보았다.

어머니는 이 목련나무를 싫어한다. 손수 꽃을 꽂아 집을 꾸밀 정도로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지만 유독 이 목련 나무만은 질색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이 목련이, 실은 그가 가슴에 품은 한 여자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아서 더 그렇다.

32년 전 일이다. 32년 전, 10월 8일. 푸릇하던 나뭇잎이 말라가고 성급한 단풍이 들기 시작하던 가을, 혜석 백화점 그룹의 며느리 윤여화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혜석의 대를 이을 아이가 태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윤여화의 출산은 병원장이 나서 진두지휘를 할 만큼 주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산부인과 병동은 VVIP 고객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온통 긴장 상태였다.

윤여화가 10시간 넘게 지속되는 진통에 지쳐가고 있을 무렵, 도시의 변두리 아주 작은 병원에서 또 여인이 진통과 싸우고 있었다. 여인은 홀로였다. 보호자도 없었고, 축하해주는 이도 없었다. 모든 과정이 은밀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였던 데다, 당시 그녀는 전도유망한 신인 배우였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아이를 데려갈 사람만을 비밀리에 병원으로 보냈다.

아이를 받은 의사마저도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다. 아이가 어디로 가게 될지도 몰랐다. 다만 아이를 건네주는 대가로 받은 빳빳한 지폐가 가득 든 봉투를 보며, 아이의 부친이 누구인지 자신은 알 필요도 없으며, 설령 알게 된다 하더라도 영원히 입을 다물어야만 한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그 주, 여성창간지에서는 혜석그룹의 며느리가 건강한 쌍둥이를 낳았다고 보도했다. 아이의 이름은 각각 이경민, 이동하. 그 기사는 혜성처럼 등장해 촉망받던 신인배우 소윤혜의 은퇴 소식과 나란히 잡지 1면을 장식했다. 소윤혜는 당시 혜석 백화점의 광고모델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사랑한 여자. 목련을 닮은 흰 얼굴에 고혹적인 눈웃음을 가졌던 그 여자, 소윤혜. 그 여자가 바로 동하의 생모였다.

하나둘, 집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 보인다. 이종학 회장의 퇴원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이사진들과, 친인척이었다. 여러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가장 앞서 들어오는 사람은 경민의 외삼촌이었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깍듯한 태도가 현재 혜석에서의 그의 입지를 짐작케 했다.

이 회장이 건강의 이유로 실무에서 물러나 있는 사이, 그의 입지가 그토록 커진 것은 약삭빠른 두뇌 덕도 있지만 무엇보다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외삼촌이 가진 그 힘은 결국 경민을 위해 쓰일 것이다. 이는 모두 윤여화의 큰 그림이었다.

심드렁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경민의 이마가 불편하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던 외삼촌의 얼굴도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 앞에 걸어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남자 때문이었다.

“이동하…….”

경민은 머금고 있던 그 이름을 혼잣말로 내뱉는다.

이동하. 소윤혜가 낳았으나 윤여화의 아들이 되어, 자신의 쌍둥이 형제라는 가면을 쓰고 이 집에 뿌리 내린 저 화근의 씨앗. 자신의 몫이었던 행복에 기생하여 기어이 숙주의 불행을 야기한 기생충.

경민은 부서질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동하를 불러들인 아버지의 속내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나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와 뻔뻔하게 고개를 들이민 저 새끼의 꿍꿍이도 알듯 말듯 희미해 계속해서 경민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다.

동하는 노골적으로 저를 적대시하는 이사진들과 친척들을 향해 빠짐없이 인사를 마쳤다. 계단을 오르면서 동하가 자신이 있는 2층 창 쪽을 힐끗 올려다보는 듯했다. 경민이 어느 곳에서든 저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하나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경민은 미쳐 날뛰는 맥박을 느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입안에서 까득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손님들 오셨습니다.”

고 비서가 경민을 불렀다. 경민에게서 즉시 대꾸가 없자 고 비서는 잠깐 망설이다 다음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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