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제가 문제 삼는 건, 이대로라면 차후 5년 안에 마이너스 성장이 뚜렷한데도 그 어떤 대책조차 강구하지 않고 계시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시간이 문제라면 그 시간을 적극적으로 당기면 됩니다. 해오던 것들만 하지 말고,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해야죠.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다, 그러니 일단 지켜보자? 안 됩니다. 안일해요. 지금 노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안일함입니다.”
“…….”
“지금만 해도, 보세요. 회의 일정을 사전 예고해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기 오신 어떤 분도 제대로 된 기획서 한 장 가지고 오지 않으셨어요. 분명히 오늘 경영보고, 실적 관련 전략 회의가 있을 거라고 전달받으셨을 텐데요.”
둘러앉은 임원진들의 표정에 못마땅함이 들어찼다. 젊은 햇병아리 낙하산이 족집게로 집어내듯 노바의 취약점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 불쾌한 기색이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그런 내색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리깔린 그들의 적대적인 시선에 ‘실무 경험도 없으면서.’, ‘애비 등에 업은 애송이 주제에.’ 같은 속마음이 흐르는 것을 동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아직 본부장 취임식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라 저희는 오늘 회의를 그냥 임시 보고 정도로…….”
“취임식?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건 아니지만… 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필요하면 하죠.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합시다. 여러분들께서 지금 저를 향해 보이고 계신 적대적인 태도가 취임식을 한다고 딱히 우호적으로 변할 것 같지는 않지만.”
정곡을 찌른 동하의 말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꾹, 입을 다물었다.
“똑똑히 들으세요. 이윤이 남지 않는 사업을 겉치레 때문에 유지할 수는 없어요. 최근 5년간, 한국에 생긴 메가쇼핑센터 가운데 NOVA보다 더 큰 규모로 스포츠센터를 운영하는 곳은 없어요. 이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잘 벼린 단도처럼 날카롭고 단호한 목소리에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를 볼 뿐,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했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상생 협조를 구하는 중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돈 벌어야죠. 사방이 눈먼 돈인데 그냥 두고 보실 겁니까? 아깝게.”
차갑게 굳어있던 얼굴을 풀고 동하가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 말에 선뜻 따라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내주까지 각 부분 담당들께서는 구조조정 명단을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입점 업체들 가운데 상반기 안에 정리가 필요한 곳들도 즉각 파악해 보시고요. 지금은 짧은 호흡으로 빠르게 시장변화에 맞춰가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다시금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자기가 이야기하진 못하지만 누구라도 나서서 뭐라도 말해줬으면 하며 떠미는 분위기였다.
“더 말씀 없으시면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단호하게 말을 마치고 일어나는 동하를 따라 임원진들도 부스스 엉덩이를 뗐다.
***
재민이는 언제나처럼 정확한 시간에 수영장에 도착했다. 유 선생의 손을 잡고 들어온 아이는 늘 그랬듯 먼발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이답지 않은 건조한 표정이다. 고작 여덟 살인데도 도통 애 같은 구석이 없는 이 사내아이의 긴 속눈썹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짙어 보인다. 오는 길에 한차례 눈물 바람이라도 한 것인지.
사희는 시무룩해 있는 아이를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유 선생에게 물었다.
“재민이가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네, 오전에 놀이 수업 있었는데 거기서 같이 수업 듣는 아이와 다퉜어요. 재민이가 그 애를 물었다는데, 그 바람에 그쪽 학부모 소환되고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유 선생은 한숨이 절반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학부모가 소환될 정도의 싸움이었다면 제법 심각했을 일. 사희는 자연스레 재민 부모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왜인지 오늘은 보이지 않는 차세령도 궁금하고.
“그런데 재민이 어머님은…….”
“오늘 회장님 퇴원하시는 날이라 같이 못 오셨습니다.”
“네, 그렇군요.”
“그래서 그런지 재민이가 더 힘이 없네. 큰 소리가 오가는 바람에 겁을 많이 먹은 모양이에요.”
유 선생은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사희 역시도 큰 눈 가득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가득 담고 있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애련해졌다.
“그럼 오늘은 좀 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사모님께서 일정대로 다 마치고 데려오라고 하시네요.”
“아… 네…….”
“지금 집에 가봤자 반겨줄 사람도 없을 텐데요 뭐. 재민이는 차라리 여기가 나을 거예요.”
“네?”
“지금 그 집에 재민이를 신경 써줄 사람이 하나도 없거든. 회장님 건강문제에 그룹 후계자 승계문제까지 겹쳐서 살얼음판이에요. 이런 때에 괜히 갔다가 발길에 차이기나 하지 뭐. 안 그래도 예쁨 받는 손주도 아닌데……. 어머나,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선생님.”
유 선생은 이제 와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말들을 후회하는 척을 하며 입을 틀어막는다. 안 그래도 시무룩했던 재민의 어깨가 더욱 시들해지는 것 같았다.
사희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아니, 애가 이렇게 힘이 없는데 오늘 같은 날에도 꼭 스케줄을 완수해야 하는 거야?’
어이가 없지만 어쩌랴. 사희로서는 도리가 없었다.
“암튼 난 지금 다시 거기로 가서 일을 좀 마무리 지어야 해요. 재벌 갑질이니 뭐니 하면서, 인터넷에 올린다고 난리라 가서 빨리 수습해야 해. 재민이 강습 마치는 시간에 맞춰서 돌아올 테니까, 혹시 좀 늦어지면 선생님이 재민이 좀 챙겨주세요.”
유 선생이 떠난 자리에는 사희와 재민, 둘만 남았다. 석 달 가까이 강습을 해왔지만 이렇게 둘만 남겨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잖아도 큰 풀장이 더욱더 황량하게 느껴졌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어져서일까 재민의 어깨가 좀 전보다 더 움츠러들었다.
“수영복 입고 나올 수 있겠어?”
사희가 물었다. 재민은 대답이 없었다.
“선생님이 도와줄까? 너만 괜찮으면 선생님은 도와줄 수 있는데.”
아이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아무래도 창피하지? 그럼 선생님이 남자 선생님한테 불러서 도와달라고 할게. 그렇게 할래?”
“…….”
재민은 대답하는 대신 더욱더 어깨를 움츠린 채 발끝만 꼼지락거린다. 싫다는 뜻이 분명했다.
이를 어째야 하나. 고민하던 사희는 휴대전화를 꺼내 사무실 전화번호를 찾아보다 이내 관두었다. 대신 쪼그라들다 못해 단추만큼 작아질 것 같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오늘 땡땡이치자. 재민아.”
발끝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재민이 움찔 놀라더니 슬그머니 사희를 올려다본다. 도통 생기가 없기는 했어도 한눈에 보아도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잘생긴 아이였다. 그 반듯반듯한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다정하게 바라보던 사희가 일부러 더 과장되게 활짝 웃어 보인다.
“재민이 너, 한 번도 땡땡이쳐본 적 없지?”
“…….”
“너 비밀 지킬 수 있겠어?”
“…….”
“대답을 안 하면 땡땡이치고 싶은 건지, 아닌 건지 선생님이 알 수가 없는데. 어떡하지? 그냥 수영할까?”
“…….”
재민은 끝내 대답하기를 거부하곤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사희의 얼굴 가득 띄웠던 웃음이 시들하게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도무지 아이의 닫힌 마음을 열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수아는 이모가 이렇게 웃으면 같이 웃어주던데. 넌 어쩜 그 예쁜 얼굴로 한번을 웃어주질 않니.’
됐다. 그만두자. 갑작스럽게 친한 척을 하니 애가 적응을 못하잖아.
사희는 복잡한 마음에 머리를 흩트려 넘기며 한숨을 내뱉는다. 재민의 수영가방을 챙겨 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옷자락이 조금 당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돌아보니 재민이 사희의 셔츠 밑단을 잡은 채로 서 있었다.
그게 아이의 대답이었다. 미약하지만, 간절한.
사희가 재민이에게 받은 첫 반응이기도 했다. 사희는 괜스레 가슴이 벅차올라서 이번에는 억지가 아닌 진심으로 우러난 큰 미소를 띠며 재민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역시 땡땡이가 낫겠지? 그럼 우리 뭐할까?”
갑자기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지레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재민이가 말해 봐. 뭘 하고 싶은지.”
“…….”
“난 수영밖에 할 줄 모르거든. 재민이가 선생님한테 뭐가 재미있는 건지 알려줄래?”
사희는 포기하지 않고 아이와 시선을 맞추려 노력했다. 그녀가 포기하지 않으니 이리저리 몸을 피하던 아이도 결국 저항을 멈추고 잠잠해졌다.
“재민이는 뭘 잘해? 선생님한테 자랑해 봐.”
“…….”
“아, 맞다. 오늘 놀이 수업했다고 했지? 놀이 수업에서는 보통 뭘 해?”
“…….”
“재민아. 선생님은 궁금해. 네가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우리 벌써 만난 지 한참인데, 선생님은 아직 재민이 목소리 한 번도 못 들어봤잖아.”
거의 애원하듯 매달려보았지만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래도 아이를 설득하는 일은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았다.
사희는 결국 부스스 일어나 대기실 의자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사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의자에 앉아, 발치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재민을 불렀다.
“이리 와 봐. 우리 여기 앉아서 고민해보자.”
다행히 그것만큼은 어렵지 않았는지 재민은 쭈뼛쭈뼛 걸어와 사희의 옆자리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외·내부인 출입이 통제된 시간의 대기실에 짙은 적막이 내려앉는다.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까지도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적요 속, 규칙적인 초침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졸음이 밀려들었다.
사희는 크게 하품을 한번 하곤 그렁하게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잠시 후, 곁에 앉아 있던 재민이 사희가 했던 것처럼 하품을 한다. 하품을 한 아이가 큰 눈을 꾹 감으니 눈초리를 타고 눈물 한 방울이 찔끔 새어 나온다. 꼭 저처럼 귀여운, 작은 눈물방울이었다.
하품은 감염처럼 서로에게로 옮겨 다녔다. 그렇게 한 열댓 번쯤 경쟁하듯 하품을 하던 차에 재민의 고개가 큰 반동을 일으키며 앞으로 툭 떨어졌다. 아이는 곧 봄날의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사희는 조심스레 팔을 뻗어 아이의 허리를 감쌌다. 제 몸에 타인의 손이 닿은 것을 느낀 재민은 순간 움찔 놀라며 잠시 버둥거렸지만, 아무리 경계심이 많다 한들 아이는 아직 아이였다. 졸린 눈꺼풀은 천하장사도 들 수 없는 법, 이내 아이의 까만 눈이 게슴츠레 덮였다.
사희는 축 늘어진 아이를 제 몸에 바싹 붙여 기대게 했다. 어차피 곧 유 선생이 돌아올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달리 무엇을 하기보다는 하루 종일 고단했을 아이를 쉬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