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23화 (24/109)

#23

“괜찮아졌어요. 약도 다 먹었고.”

“아, 다행이네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또 잠깐의 정적.

잠시 후, 이번에는 동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 잘 들어갔죠, 그날? 택시는 바로 잡혔어요?”

“그럼요. 그랬으니 여기 있죠.”

“하긴, 그렇네.”

동하와 사희는 다시 멋쩍게 웃었다.

그들의 곁에 선 수찬은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영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수찬은 동하를 한번, 낯선 여자를 한번 번갈아 보며 쓰읍, 하고 미심쩍은 소리를 냈다.

미어캣처럼 둘 사이를 두리번거리는 수찬과 눈이 마주친 동하와 사희는 과장되게 헛기침을 하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모두 만나서 반가운 마음은 가득했으나, 곁에 있는 수찬의 존재가 자못 신경이 쓰였다. 가운데 끼어있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대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스포츠센터가 있는 층에서 멈췄다.

도착했다는 안내음이 들리자 사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다. 아, 이렇게 내리면 안 되는데. 다시 만나면 전화번호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옆에 누가 있으니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살짝 미적거리는데, 동하의 곁에 서 있던 남자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저기요, 도착했는데 안 내리세요?”

“네? 아, 네. 내리려던 참이에요.”

사희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주춤주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온몸으로 무언가 할 말이 남아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사희의 기색을 눈치챈 동하는 그녀의 등 뒤에서 들키지 않게 조금 웃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희가 얼른 동하 쪽으로 몸을 돌린다. 재빨리 웃음기를 감춘 동하가 사희를 마주 본다.

“혹시……. 오늘도 그 시간에 근무해요?”

사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질문은 오늘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교묘하게 숨겨놓은 암호였다. 그러자 그 암호를 유일하게 풀 수 있는 한 사람, 동하가 사희의 의도를 알아채고 싱긋 웃었다.

동하는 기다리고 있는 사희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희의 얼굴에 반짝 화색이 돌았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둘은 닫히는 문틈으로 마지막까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

“아는 사람이에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수찬이 물었다. 동하의 등 뒤에 바짝 다가와서는 몸 단 목소리로 묻는 것을 보니 궁금하기는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응.”

“여기 직원인가 보던데요?”

“응.”

“스포츠센터 직원이요?”

“응.”

“그런데 스포츠센터 직원을 어떻게 아세요?”

“그냥 어떻게 좀 알게 됐어.”

“그냥 안다고 하기엔, 두 사람 꽤 친해 보이시던데.”

“궁금한 게 많네, 최수찬?”

동하가 수찬을 힐끔 돌아보며 짙은 눈썹을 치뜬다.

“아, 죄송합니다.”

수찬은 얼른 꽁지를 내리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3초도 지나지 않아 수찬은 다시 동하의 등 뒤에 바싹 붙는다.

“근데 선배, 어디 아파요?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 아까 선배가 아파서 약을 먹니 마니 그랬잖아요. 그 여자분이. 선배 무슨 약 먹어요? 무슨 약?”

“그런 게 있어. 넌 몰라도 돼.”

“이상하네. 왜 자꾸 숨기려고 하시지?”

수찬의 말에 동하가 곁눈으로 날카롭게 그를 흘겼다.

“숨기긴 내가 뭘 숨겨.”

“아니, 꼭 무슨 둘만 알고 싶은 비밀이라도 있는 양 그러시잖아요. 아까 그분이랑 선배 뭐……있는 겁니까?”

매섭게 노려보는 동하의 눈이 소리 없는 욕을 쏟아붓고 있다.

수찬은 그러잖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부릅뜬 동하의 눈을 피해, 반대쪽으로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정면으로 시선을 둔 채 잠시 말이 없던 동하가 잠시 후, 혀를 입천장에 붙였다 떼는 소리를 냈다. 똑똑똑똑똑. 마치 노크 소리와도 같은 마찰음이 승강기 안을 떠다닌다.

수찬은 조금 심란해 보이는 동하를 힐긋 돌아본다. 그 행동은 동하가 뭔가 고민이 있을 때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 무의식중에 하는 버릇이었다.

잠시 후, 고개를 살짝 갸웃한 동하가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수찬아.”

“네?”

“어떤 것 같아? 아까 그 여자.”

“네? 어떠냐니……. 어떤 점이요?”

동하는 수찬의 물음에는 대꾸하지 않은 채 홀로 입술을 씹는다. 그러다 잠시 후, 또 혼잣말처럼 물었다.

“예쁜가?”

“네에?”

“그냥. 궁금해서. 네 눈엔 어때? 예쁜가?”

밥은 먹었나 궁금하고, 아픈 건 아닌가 신경이 쓰이고, 다시 만나자는 말이 반가울 만큼, 그 여자, 그렇게 예쁜가? 하염없이 눈길이 머물러. 노력해서 떼어내지 않으면 계속해서 쳐다보게 되거든. 이런 것도 다 그 여자가 예뻐서 그런 건가?

동하는 진짜 묻고 싶은 것은 가슴에 묻어놓고 두루뭉술하게 물었다.

수찬은 전에 없던 질문을 하는 동하가 낯설어 조금 머뭇했다. 아니, 질문이 너무 웃기지 않는가. 누가 예쁘게 보이는 건 주관인데, 그 여자 예쁘지 않더냐고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수찬은 통 안 하던 행동을 하는 동하가 점점 더 의아해졌다. 그러나 정작 질문을 한 동하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어… 글쎄요. 예쁘기는 한데…….”

“한데, 뭐?”

“그게… 사실 제 타입은 아니어서……. 전 좀 작고 귀여운 타입이 좋거든요. 물론 그렇지만 저런 미모가 저한테 사귀자고 하면 절대 거절은 안 하죠. 저야 황송하죠.”

수찬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솔직하고 성실한 대답을 내놓곤 입술을 당겨 빙긋 웃었다.

그런데.

“누가 네 타입인지 물었어?”

동하가 눈꺼풀을 날카롭게 좁히며 반문했다. 어쩐지 동하의 목소리가 다소 공격적이다.

“아니, 전 그냥… 제 생각을 물어보시기에 솔직하게 말한 건데…….”

“물어본 것만 대답해. 다른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동하는 한 번 더 수찬을 매섭게 쏘아보곤 먼저 내렸다. 그리곤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수찬을 두고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어쩐지 그는 조금 화가 난 듯 보였다.

***

임시 회의가 열리는 회의실 안의 공기가 무겁다. 심각한 표정은 둘러앉은 사람들의 몫, 반면 동하는 거의 표정이 없었다. 다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고를 올리는 사람들을 주시하며 의자 팔걸이를 간헐적으로 톡톡 두드릴 뿐이었다.

마음에 들면 조금 느리게, 그렇지 않으면 조금 더 빠르게. 그래서 나중에는 그의 손짓 하나에 사람들의 희비가 갈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위압감이 느껴졌다.

“잘 들었습니다.”

보고서를 탁자 위로 내려놓은 동하가 좌중을 훑으며 조금 웃었다. 그의 옅은 웃음을 따라 임원들도 어색하게 웃는다. 한바탕 이어지던 형식적인 웃음이 그치자, 동하가 입술에 걸었던 웃음을 지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보고를 들은 제 소감을 들려드려야겠죠? 음. 뭐랄까. 제 생각엔 노바가 부여받은 시장가치에 비해서 현실은 좀 엉망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제 견해에 대한 여러분들 생각은 어떤지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두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제가 너무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나요? 그럼 일단 가장 시급한 부분부터 이야기해 보죠. 스포츠센터 말입니다. 운영자금에 비해, 영업이익률이 너무 낮지 않습니까? 지금 같아선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어요. 혹시 스포츠센터가 쇼핑몰 고객 유입을 위한 미끼상품 같은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레저사업부 부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급하게 부인했다.

“그렇죠. 당연히 아니어야죠. 그런데 지금 스포츠센터가 벌어들이고 있는 돈이 딱 그 수준이라서 말입니다.”

“아, 그 부분은…….”

“삼사분기에 최소 25%, 사사분기에 50% 이상의 성장이 없으면 NOVA에서 스포츠센터는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고 판단해야 할 것 같은데.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둘러앉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동하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고 냉철했다. 일순간 심각해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NOVA의 정체성 자체가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생활 전반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동하의 눈썹이 날카롭게 구겨진다. 스포츠센터 팀장이 굳이 덧붙인 서두에서 동하를 무시하는 기색이 강하게 느껴졌다. 마음속에서 화르르, 불길이 일었지만 동하는 참을성 있게 남자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요?”

“마이너스 성장도 아닌데 벌써부터 스포츠센터 존폐를 논하신다는 건 너무 성급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노바, 오픈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았고. 지역사회에 노바가 좀 더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하는 종전보다 더욱 단호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는다.

“오픈 전에 시장 조사 충분히 하셨을 거 아닙니까. 설마 이런 영업이익률을 예상하시고도 스포츠클럽 운영을 계획했다는 겁니까?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요? 3년입니다. 지난 3년 매분기 영업이익률이 계속해서 제자리였습니다. 그 3년간. 여러분, 뭘 하셨죠?”

“저희도 예상 지표를 뽑고, 그에 맞춰 충분한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현실 시장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상황상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테면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임금감소 같은 것들이죠. 이로 인해 국민들의 소비심리가 움츠러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소비심리가 위축되면 스포츠센터 운영이 어려워지는 건 사실이니까…….”

이야기를 듣는 동하의 짙은 눈썹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날카로운 눈매와 선이 굵은 눈썹이 뿜어내는 분위기가 강퍅했다. 동하는 붉은 혀로 아랫입술을 살짝 핥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근 30년간 이 나라 경제가 언제 호황이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그건…….”

“불황만큼 쉬운 변명도 없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변명이 종종 무능력의 증거가 되기도 하는 거고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동하는 더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식상한 변명을 가로막았다.

기세 좋게 나섰던 남자의 얼굴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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