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도믕진 시짜흔트서 여라기 완눈데 흐자니 태워니 등겨져따그여…….”
수찬이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온다.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남은 한 손에는 커피캐리어를, 그리고 입에는 빵이 담긴 종이봉투까지 물고 있느라 바빠 보였다.
“대체 어느 나라 말이야, 그건?”
드레스룸에서 나오는 동하가 영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허!”
동하를 본 수찬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입을 떡 벌렸다. 그 바람에 물려있던 빵 봉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빠르게 잡아낸 동하는 수찬의 손에 들린 커피까지 마저 받아 한 모금을 마셨다.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식도를 타고 비어있는 위장으로 바로 흘러 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그 온기에 빳빳하게 긴장해있던 몸이 조금 풀렸다.
“너무하네, 사람이 이렇게까지 잘생길 일입니까?
수찬이 동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감상하듯 느리게 훑으며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사탕발림은 됐고. 조금 전에 하던 말이나 계속해 봐.”
“아, 조명진 실장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회장님 퇴원 일정이 오늘 오후로 당겨졌다고요. 가족들 모두 본가로 들어오시랍니다. 저희는 회의 마치는 대로 바로 이동하면 될 것 같아요.”
가족이라. 가족이라는 단어에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게 될, 가족보다 적에 가까운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눈썹 언저리가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아파왔다. 동하는 종이컵 입구를 이로 살짝 무는 것으로 두통을 달래곤 이내 컵을 내려놓았다.
***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사희는 그 다짐은 잘 지켜지지 않을 모양이다.
이동하와 그렇게 헤어진 후, 사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쇼핑몰 구석구석을 기웃거려 보았다. 혹시나 그를 마주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안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괜히 심장이 먼저 떨어졌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따라가 기어이 얼굴을 확인해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과는 번번이 실패였다.
‘그냥 전화번호를 물어볼 걸 그랬나. 뭐, 전화번호 정도는 알아도 되잖아? 그냥 고작 번호일 뿐인데.’
나중엔 그런 후회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 아는 것이라곤 고작 그가 노바의 직원이라는 것과, 이동하라는 이름 석 자 뿐이다. 물론 그 역시 자신이 이곳의 수영강사라는 것과 이사희라는 이름만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사희는 늘 수영장에 있는 사람이니 그가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그녀를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뜻일 것이다. 하긴 그랬으니 전화번호도 물어보지 않았겠지.
자신이 번호를 묻지 않은 것과, 그가 묻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아, 그까짓 게 뭐라고 안 물어봐? 물어보면 누가 안 알려줄까 봐?”
사희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뱉는다.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집중된다. 사희는 헛기침을 하는 척하며, 점퍼 깃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사희는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집중하고 있는 스스로가 낯설다. 벌써 며칠째 머릿속이 온통 그 남자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누군가를 계속해서 떠올리고 기다리는 일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처음의 기다림이야 컴플레인이 신경 쓰여서라고 핑계 댈 수라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미쳤어. 미친 거야. 미친 게 아니고야 이럴 수가 없지.’
미친 게 아니고서야 남자 생각하느라 내려야 할 곳도 지나칠 뻔하고 그러지는 않겠지. 가까스로 버스에서 내린 사희는 어떻게든 남자에 대한 생각을 털어내려고 머리를 털었다. 관자놀이를 양 손바닥으로 꾹 누르다 몇 번 쿵쿵 쳐본다.
‘정신 차려, 제발 정신 차려라, 이사희.’
사희는 쇼핑몰의 유리문을 몸으로 밀어 열고 들어갔다. 봄 정기 세일이 한창인 쇼핑몰 안은 갖가지 홍보물로 휘황찬란했다. 벚꽃 장식이 붙은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마침 지하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추는 것이 보였다.
타이밍이 약간 어긋난다. 저걸 타려면 뛰어야 할 텐데 그럴 열정까지는 솟지 않았다. 다음 거 타지 뭐.
문 열린 승강기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쏟아냈다. 뚜벅뚜벅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던 사희의 눈이 번쩍하고 커진 것은 내리는 사람들 뒤에 서 있던 훤칠한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이었다.
“어?”
심장이 툭 땅으로 떨어졌다.
이동하다. 분명히 그였다.
***
“잠깐만요!”
사희는 닫혀가는 승강기 문을 향해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차이로 벌어진 문틈으로 발을 끼워 넣었다.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발에 부딪힌 문이 다시 열린다.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열린 문 안으로 씩씩하게 들어오는 사희를 보고 한 번 더 놀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동하의 곁에 서 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갑자기 뛰어든 사희를 꾸짖는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불가침 영역에 들어온 무엄한 침입자를 다그치는 것처럼 엄했으나, 지금 사희에게는 그런 것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좀 급해서…….”
대충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한 사희가 다시금 동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하는 여전히 조금 놀란 눈으로 사희를 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좀 황당해하고는 있지만 제 얼굴에 꽂혀있는 그의 시선에 거부감은 없었다. 도리어 갑자기 등장한 그녀를 반가워하는 기색이 또렷하게 묻어있다.
“하아, 하아. 오랜만…이네요…? 하아…….”
가까스로 인사를 마친 사희는 그제야 겨우 턱까지 차올랐던 숨을 뱉어냈다. 단어를 다 붙여서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숨이 찼다.
동하는 사희의 숨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잠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바람에 나부낀 흔적이 역력한 머리카락과, 얼굴 가장자리를 은근하게 적신 땀, 그 땀에 젖어 촉촉해진 얼굴에 아무렇게나 날아와 붙어있는 머리카락 한 올이 시선에 잡혔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전력으로 달려왔는지 짐작을 하고도 남았다.
‘뛰어온 건가? 나 때문에?’
막 딴 사과처럼 불긋하게 상기된 뺨에서는 건강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스포티한 점퍼를 입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귀를 덮고 있는 저 헤드셋 때문일까. 여자는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어려 보이는 것도 같다. 하긴, 실제론 어려 보인다는 말이 적합하지 않을 만큼 정말 어릴지도 모르지. 난 아직 이 여자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르니까.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사희는 발그스름한 입술을 당겨 생긋 웃었다. 거꾸로 뒤집어 놓은 삼각형 모양의 입술이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며 양 볼 가까이 올려 붙는다. 미소와 함께 드러난 하얗고 고른 치아가 눈길을 끈다.
저를 보고 반가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희가, 그 역시도 몹시 반가워 동하는 조금 웃었다.
이목구비 모두가 모난 데 없이 예쁘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여자는 특히 입술이 예쁜 편이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눈길을 멈추고 하염없이 보고 있게 될 만큼. 오늘은 그 입술에 설탕이 묻어있는 것도 아닌데, 동하는 또 그 입술에 시선이 붙들리고 말았다.
몸 한구석이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단 것을 머금은 것처럼 입 안에 살짝 침이 고였다. 동하는 혀끝으로 입 쪽을 살짝 훑곤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보세요. 지금 무례하게 이게 무슨…….”
사희의 행동을 제지하려던 수찬이, 팔꿈치를 강하게 잡는 동하에게 밀려 약간 뒤로 밀려났다. 어리둥절해 하는 수찬과 눈이 마주치자 동하는 단호한 눈짓으로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리곤 이내 태연하게 표정을 바꿔 사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요. 오랜만입니다. 강사님.”
“점심 먹고 오나 봐요?”
사희가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곤 다시 물었다. 아직 숨결이 다 정리되지 않은 목소리에 날숨이 많이 섞여 하아, 하는 소리가 났다.
“네. 강사님도 식사하고 오세요?”
“아뇨. 전 이제 출근이에요. 전 오늘 출근이 좀 늦어서.”
배시시 웃어 보인 사희는 스포츠센터가 있는 층의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녀보다 먼저 동하가 버튼을 눌렀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금방 도착하고 말 것이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사희가 다시 동하를 향해 살짝 몸을 틀었다.
“뭐 먹었어요, 점심?”
“음, 그냥……. 커피랑 빵 조금.”
“아픈 건 다 나았나 보죠?”
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아픈 거? 내가 어디가 아팠던가?”
“그때 약을 먹고 있다고 그랬었잖아요. 그래서 밀가루 음식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빵을 먹었어요?”
사희는 자기가 했던 거짓말을 여전히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 믿는 척할 때는 언제고.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동하는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