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21화 (22/109)

#21

방배동의 한 고급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세령은 잠시 앉아 숨을 고른다. 그녀의 차 맞은편에 주차된 고급 세단의 번호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남편의 차였다.

나흘 전, 홍콩 출장을 마친 경민은 곧장 이곳 내연녀의 집으로 향했다. 더 정확히는 내연녀를 위해 이경민이 산 집이다.

이 모든 사실은 문자화되어 속속들이 세령의 휴대전화에 도착했다. 남편의 팔짱을 낀 앳된 여자의 얼굴이 찍힌 사진과 함께.

여자는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석사생이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것과, 그녀의 어머니가 지방에 있는 개인 미술관의 관장이라는 부연설명도 적혀있다.

세령은 메시지 속 여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본다. 몇 번 본 얼굴이라 익숙하다. 재작년까지 종종 날아들던 메시지 속 관능적인 얼굴의 신인배우와는 다르게 순진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유부남과 내연을 하는 여자에게 순진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신인배우였던 애도 처음엔 순진했지. 이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부터 급격하게 달라졌지만. 그러고 보니 그 신인 배우는 조연으로 영화에 데뷔한 뒤로는 사진이 뚝 끊겼다. 그 애는 더 이상 이경민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남편에게 내연녀가 있다는 것이 세령에게 새삼스레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일이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반복될 일이다.

그럼에도 굳이 사람을 고용해 남편의 정황을 파악해 보고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윤여화 여사의 말대로 세령은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집안에 들여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때이든 경민을 집으로 데려올 수 있는 사람. 그게 차세령이었다.

남편의 차 번호판 속 숫자를 하나하나 눈으로 읽으며 세령은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폐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는데도 답답한 기분은 통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무언가 단단히 얹혀있는 기분을 느낀 지는 오래되었다. 아마도 그 사고가 있었던 때부터 인 것 같다.

“18일 새벽 4시경, 강원도 상천시 신북읍 일각에서 일가족을 태운 자동차가 고양호에 투신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사고로 차에 타고 있던 3명이 사망, 1명이 중태에 빠졌습니다. 일신을 비관한 가족의 집단 자살로 추정되며,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장녀 차씨는 현재 강원대학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폭발적으로 쏟아지던 그때의 뉴스가 아직도 귓가에 메아리치는 것 같다. 홀로 살아남은 그녀에게 쏟아졌던 매스컴의 난폭한 취재 열기,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폭력적이고 차가웠다.

“가족들이 서로의 손을 묶고 뛰어들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혼자만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죠?”

잠겨오는 물속에서 손톱이 부서지도록 끈을 풀어냈던 그 절박함. 제 팔목과 하나로 묶여있던 가족들을 그 검은 물속에 두고 나왔을 때의 세령이 느꼈던 죄책감과 공포 같은 것들은 그들에게 자극적인 기삿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살고 싶었어요. 살고 싶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그때 그들을 향해 외쳤던 그 말은 지금도 세령을 이 세계에서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난 그저 살고 싶을 뿐이야. 살고 싶은 것은 죄가 아니야.

핸들을 잡은 세령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등줄기에 서늘한 식은땀이 흐른다. 금세 축축해진 블라우스가 몸에 불쾌하게 들러붙었다.

세령은 메시지 속 정보 중, 내연녀의 집 호수를 외우곤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꽃샘추위가 몰아닥친 봄바람이 습하게 젖었던 여자의 몸을 식힌다. 오한이 난다.

-누구세요?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라고 묻지만, 인터폰에 뜬 세령의 얼굴을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혜석유통 이경민 부사장의 부인, 차세령.

스물다섯 살짜리 내연녀는 세령이 그녀의 입으로 자신을 소개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앙큼하게도.

세령은 대답 대신 인터폰 렌즈를 빤히 바라본다. 한참 시간이 지나자 인터폰 연결이 끊기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곧 집안에서 다시 현관으로 인터폰이 연결된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더 몸이 다는 쪽은 세령이 아니라, 그녀인 것이 확실했다.

-사모님이세요?

여자의 도발 어린 물음에도 세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저 안에서 초조하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여자를 향해 옅은 조소를 보일 뿐이었다.

-오빠 지금 자고 있는데……. 깨울까요?

세령은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귀밑 각이 우아한 선을 그리며 오른다. 여자의 귀에 검지 손톱 크기로 매달린 진주가 고상한 빛을 내며 반짝인다.

“아이 아빠에게 전해줘요.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말을 마친 세령은 소임을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인터폰 안쪽에서 머뭇머뭇하며 세령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고 승강기가 층에 도달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복도 끝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옥신각신하는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꼭 가야 돼?”

“이거 안 놔?”

“주말까지는 나랑 있겠다고 했잖아.”

“놓으라고 했지.”

세령은 경민의 것이 분명한 오만한 목소리를 들으며 픽 코웃음을 친다.

잠시 후, 그녀의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멈추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차세령이 나를 다 찾아오시고.”

경민의 목소리가 그를 등지고 선 세령의 등줄기에 날아와 부딪힌다. 시비조였지만 어쩐지 희열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세령이 저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이 영 싫지만은 않다는 듯.

세령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마침 도착한 승강기에 올랐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경민을 향해 돌아선다.

굳은 얼굴의 경민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세령을 쏘아보고 있었다. 단추를 다 채우지 않은 흐트러진 차림이었다. 늘 각 잡혀 매만져있던 머리카락도 헝클어져 있었다. 날렵한 눈매가 조금 부어있다. 조금 전, 자고 있었다는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타요.”

“야.”

“내키지 않으면 나 먼저 내려가고.”

“뭐하자는 거야, 지금?”

“미안해요.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머니께서 당신을 찾으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세령의 말에 경민이 어금니를 꽉 깨문다. 그녀의 차가운 말 속에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윤여화 여사가 아들을 찾고 있다는 이유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분명하게 담겨있었다.

“그래서. 가란다고 쪼르르 여길 와?”

“그래요. 가라고 해서 왔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와. 차세령, 여긴 네 남편이 다른 여자랑 뒹군 집이야!”

“그게 뭐가 어때서.”

“뭐?”

경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얼이 빠져나갔다. 무방비하게 넋이 나간 경민의 얼굴을, 세령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게 뭐가 어떠냐니. 내가 누구랑 뒹굴든 너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거야?”

“그럼. 내가 질투라도 해야 해?”

“넌 자존심도 없어? 어머니가 시키는 거 다른 건 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것만은 하지 말았어야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여길 올 수가 있어?”

“자존심? 애초에 나한테서 그걸 빼앗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세령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경민을 쏘아보았다.

경민은 저를 노려보는 세령의 눈빛에 강한 오한을 느꼈다. 그 눈빛에는 미움보다 더 강한 혐오가 담겨 있었다.

“동하가 왔어.”

세령의 입술에서 한숨 같은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경민의 낯에서 핏기가 가신다. 하얗게 식은 경민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되묻는다.

“누가 왔다고?”

“이동하가 왔다고.”

동하의 이름 석 자를 말하는 세령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악다문 경민의 턱이 눈에 보이게 꿈틀거린다.

***

스타일러에서 꺼낸 셔츠에는 기분 좋은 온기가 남아있었다. 거울 앞에 선 동하는 잘 정리된 넥타이 중에서 로열 크래스트 패턴이 은은하게 찍힌 남색 실크 타이를 골라 목에 감았다. 몇 번의 능숙한 손놀림 끝에 넥타이는 먼지 한 올 내려앉지 않은 드레스 셔츠 깃에 알맞게 올라붙는다.

두툼한 몸을 밀착 없이 감싼 체크무늬 조끼의 단추를 잠그고, 역시 같은 패턴으로 재단된 재킷에 팔을 꿴다. 잘 만들어진 옷이 몸의 두둑한 양감에 맞게 달라붙어, 마치 살갗처럼 멋들어진 주름을 만들어냈다.

동하는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놓은 함에서 시계와 만년필을 꺼냈다. 앞섶 안쪽에 만년필을 꽂아 넣고, 자연스럽게 시계를 팔에 두른다. 소매 밑으로 살짝 드러난 시계 속 시곗바늘은 어지럽게 맞물리는 톱니바퀴 바탕 위에서 묵묵히 움직였다.

거울 앞에 선다. 포마드를 바른 머리카락이 드레스룸 조명 아래에서 반지르르한 윤기를 냈다. 동하는 옷을 입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무심하게 정리한다. 머리에 무얼 발라 거창하게 넘기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였지만, 오늘부터 그는 겉모습에 자신의 호불호를 묻히는 일은 깔끔하게 접기로 했다. 전장에 나가는 기사들이 연약한 몸을 갑옷으로 위장하듯, 그 역시 타인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할 모습으로 자신을 치장한 것이다.

노바에서의 첫 업무가 있는 날이다. 노바의 임원들과 경영보고 미팅을 잡아두었다. 경영 관련 전반의 사항은 이미 문서로 확인한 바 있지만, 서면에 드러나지 않은 날 것을 보고 싶었다. 정식 취임 공고가 나기 전이기는 해도, 이미 알아야 할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안이다. 시간을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동하는 거울 속,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서 있는 자신에게 활을 쏘듯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어제까지의 이동하는 죽었다. 활시위를 떠난 활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