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동하를 노바에?”
수화기를 든 윤여화의 손이 조금 떨렸다.
“-네, 상무이사 선임과 동시에 노바 기획본부장으로 임명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윤 여사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다. 봄이 완연한 정원에는 백목련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윤 여사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알겠어요, 조 실장. 그럼 앞으로도 수고해주고.”
말이 좋아 기획본부장이었지, 이종학 회장의 아들인 이동하가 수뇌부에 앉는다면 노바 사내이사들의 입지는 사실상 허울이나 다름이 없는 것. 결국 노바를 이동하의 손에 쥐어 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윤 여사는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스커트 자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초조해 보였다. 한참을 무언가 생각하던 윤 여사는 이윽고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가 두 번도 채 지나기 전에 신호가 떨어진다.
-네, 누님.
“동하가 노바의 기획본부장로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니?”
-동하가 노바에요?
전화 너머 윤재화 이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역시 전혀 모르고 있던 눈치였다.
“그것도 모르고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윤 여사의 목소리에 짙은 언짢음이 묻어있다. 누이의 화를 눈치챈 윤재화 이사는 급히 죄송하다는 사과를 흘렸다.
“그런 인사나 받자고 전화한 거 아니야. 동하가 갑자기 왜 들어왔는지.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그것부터 파악해.”
-타의라면 혹시, 회장님께서 동하를 불러들였다는 말입니까?
“회장님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잖니.”
-회장님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으니 핑계 김에 들어왔겠죠. 회장님도 그 앨 다시 내보내지 않으려고 이렇게 묶어놓으시려는 걸 테고. 어쨌든 혜석 차남인데 체면치레는 하게 해야죠. 노바 정도라면 쥐여주어도 나쁘지 않은 패입니다.
“태연하구나.”
-너무 걱정 마시라는 뜻입니다. 그 애가 이제 와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윤재화는 조곤조곤 누이를 달랬다. 덕분에 마음이 조금 가라앉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윤 이사의 말대로 동하가 이제 와 무엇을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가 이토록 마음을 놓지 못하는 이유야 분명했다.
“경민이는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건 제가 누님께 묻고 싶은 말입니다. 누님, 제발 경민이 좀 타이르세요. 제가 아무리 애를 쓰면 뭐합니까? 정작 경민이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지금 이경민 부사장 지켜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에요. 시기도 여론도 좋지 않고요. 이러다 막말로 갑자기 회장님이 동하 쪽으로 무언가 흘릴 계획이라도 하신다면…….
“입조심하지 못해?”
-죄송해요. 저도 너무 답답해서…….
윤여화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 윤재화 이사는 다시금 깊은 한숨과 함께 사죄했다.
윤 이사와의 전화를 끊은 윤 여사는 다시 한번 경민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전화는 여전히 꺼져있었다. 경민의 비서에게조차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다. 전화를 따돌리려는 경민의 지시임이 분명했다.
“이런 망할 녀석이…….”
부득, 이가 갈렸다. 부술 듯 전화기를 내려놓은 윤 여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응접실 문을 발칵 열었다.
“재민 애미야!”
온갖 분노의 감정이 똘똘 뭉친 큰 목소리가 높은 천정을 타고 집안 전체에 쩌렁쩌렁 퍼져나간다. 머잖아 세령이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네, 어머님.”
“경민이 어디에 있니?”
“…그게…….”
세령의 눈동자가 바쁘게 흔들렸다.
“경민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얼마나 됐지?”
“열흘……. 됐습니다.”
“그런데 몰라? 네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도 않았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세령을 찌를 듯이 튀어나왔다. 세령은 형형하게 빛을 뿜는 윤 여사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말했지. 경민이가 어디에 있는지 너는 꼭 알고 있어야 한다고. 일거수일투족 놓치지 않고 언제든지 내가 찾으면 그 애를 내 앞에 데려와야 한다고!”
“나흘 전 홍콩에서 귀국해서 방배동으로 간 것까지는…….”
“또 거길 갔단 말이야?”
윤여화의 눈에서 뜨거운 불똥이 튀어나왔다. 보고 있으면 말라죽을 것 같은 뜨겁고 뜨거운 분노였다. 무릎 아래가 오한이 든 것처럼 바들바들 떨린다. 세령은 겹쳐 모은 손바닥으로 엄지를 세게 쥐었다. 그래야만 겨우 발을 디디고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 보내겠습니다.”
“네가 직접 가.”
“……!”
윤 여사의 지시에 놀란 세령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황한 세령의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며 윤 여사가 미간을 좁혔다.
“왜? 못 가겠니?”
“…….”
세령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들키지 않으려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윤 여사가 가소롭다는 듯 픽, 코웃음을 쳤다.
“싫어?”
“아닙니다.”
“고상 떨지 마라. 그런 되지도 않는 흉내나 내라고 널 이 집에 들인 줄 아니? 애초에 내가 기대하는 바를 갖추지 못했으면 내가 널 필요로 할 때, 마땅히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은 해야지. 내가 너 같이 보잘것없는 것을 이 집에 왜 들였는지 너도 모르지 않을 텐데.”
“…….”
“당장 가서 경민이 데려와.”
“네, 알겠습니다.”
세령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 응접실을 나간다.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세령의 마른 등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윤여화의 눈빛이 잘 벼린 칼날 같다.
세령은 보지 않아도 그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차가운 눈빛이 살갗을 얇게 저미는 것 같아 쓰리고 고통스럽다. 응접실을 나오기 무섭게 오심(惡心)이 치밀었다.
“우욱.”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이 느껴진다. 세령은 먼지 한 톨 떨어지지 않은 번쩍이는 대리석 계단을 밟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화장실로 박차고 들어간 그녀는 거의 변기에 처박을 듯 몸을 숙였다.
“우우욱!”
목구멍 안쪽에서 되직한 것이 끓는 것 같은 불쾌한 소리가 났다. 오장육부가 딸려 올라올 것처럼 뱃속이 고통스럽게 쪼그라든다. 곧 쓰고 시큼한 초록색 액체가 콧구멍과 입술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변기를 부여잡은 손이 샛바람 맞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다. 변기 물을 더럽힌 오물들 위로 뜨겁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아하… 아윽… 아아…….”
마치 짐승의 포효 같은 처절한 울음소리였다.
***
“오빠, 그만 일어나. 언제까지 잠만 잘 거야.”
등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에 잠에 빠져있던 경민이 눈을 뜬다. 여기 도착한 이래 줄곧 깨어있는 시간이 거의 없이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수마(睡魔)는 끊임없이 경민의 눈꺼풀 끝에 매달려 있었다.
“10분만.”
“이번에도 이렇게 잠만 자다가 갈 거야?”
경민의 등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여자가 쀼루퉁한 소리를 낸다.
징징거리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경민이 몸을 돌려 누웠다. 그리곤 침대 맡에 앉아 제 관심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머리 풀어 봐.”
한참 여자를 바라보던 경민이 말했다.
여자는 경민의 지시에 맞춰 묶고 있던 머리카락을 풀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차르르, 흩어지며 어깨 아래로 떨어졌다.
“염색했어?”
“응. 알아보네?”
여자의 얼굴에 반색이 돈다.
“어때? 예뻐?”
“그 전이 낫다.”
그러나 뒤이어 떨어진 경민의 평가에 좋아하던 얼굴이 금세 볼통하게 무너졌다. 며칠 전, 기함할 금액을 들여서 한 머리 스타일에 대한 무성의한 평가가 몹시 섭섭한 눈치였다.
“오빠는 은근히 촌스러운 데가 있어. 대체 그 검은 생머리에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는 거야. 첫사랑이 긴 생머리 여자였어?”
“첫사랑?”
“그래, 오빠도 첫사랑 있을 거 아니야. 남자들은 은근히 첫사랑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다음 여자 만날 때도 닮은 사람 찾는다며.”
“…….”
“누구야? 어떤 여자였어?”
여자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금세 화제를 전환해 경민 앞으로 바짝 다가온다. 남자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 안고 얼굴을 올려보며 한껏 아양을 떠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예뻤어?”
“응.”
“치, 나보다?”
“응.”
“예뻐서 좋았어?”
“응.”
“아, 자세히 좀 이야기해 봐. 재벌의 첫사랑은 어떤지 궁금하단 말이야. 어떤 여자였는데. 어떤 여자였길래 아직도 이경민이 못 잊는 건데.”
경민은 품 안에 안겨 콧소리를 내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예뻤어. 첫눈에 보자마자 내가 가져야겠다 생각했을 만큼.”
“그래서 가졌어?”
“응.”
“오빠 첫사랑은 이루어졌네? 원래 첫사랑은 안 이뤄진다던데.”
“안 이뤄졌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나를 끔찍하게도 싫어했거든.”
경민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경민의 품 안에 안겨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경민을 올려다본다.
“왜 싫어했는데?”
“아, 야. 나 피곤하니까 넌 가서 좀 혼자 놀아.”
대답을 삼킨 경민은 여자의 머리를 멀찍이 밀어내며 다시 몸을 돌려 누웠다. 귀찮다는 듯 눈을 감은 경민의 미간이 못내 찌푸려 있었다.
급격하게 차가워지는 경민의 얼굴에 지레 겁을 먹은 여자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