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19화 (20/109)

#19

동하가 눈동자를 움직여 우뚝 선 노바 건물을 보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동시에 사희가 입술을 푸, 하고 터트렸다. 푸흐흡, 바람 빠진 듯 터진 웃음소리는 곧 깔깔거리는 폭소로 바뀌었다.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시작된 명랑한 웃음소리가 조용한 봄밤을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동하게 가늘게 실눈을 뜨곤, 배를 잡고 웃는 사희를 흘긴다.

“왜 웃지?”

“그런 소릴 듣고 어떻게 안 웃어요?”

“뭐가 웃기지? 난 진심인데.”

“아, 그러십니까. 니예니예. 그럼 가지세요. 갖고 싶으면 가져야지. 모쪼록 건투를 빕니다. 대신 그때 가서 나 모른 척하기 없기예요. 그거 진짜 의리 없는 거다.”

“모른 척 안 하면? 뭐 원하는 거 있어요?”

“원하면 들어주게요?”

“안 들어주면 의리 없는 사람 만들 거 같아서. 내가 그건 또 못 참거든. 말해 봐요. 뭘 바라는데?”

장난으로 한 말이라도, 상대가 진지하게 나오면 덩달아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사희는 정말 당장이라도 청을 들어줄 것처럼 나오는 동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사희가 턱을 괸 팔을 테이블에 기대며 동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가 금세 가까워졌다. 불쑥 눈앞까지 다가온 여자의 숨결이 동하의 뺨에 닿았다. 사희의 숨에서 새콤달콤한 과일향이 났다. 줄곧 그의 시선을 끌던 여자 입술 위의 설탕 결정이 더욱 가까운 곳에서 그의 눈길을 잡는다. 입안에 뭉근하게 침이 고인다.

‘달겠지, 저 입술은.’

본능적으로 불손한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정말로 노바를 갖게 된다면, 수영장 한 레인만 나한테 줘요. 아니, 그것도 안 바라. 그냥 아무도 없을 때, 나 혼자만 있을 수 있게 몇 시간만. 딱 몇 시간만 거기에 있게 해주면 돼요.”

“수영장?”

“응, 수영장.”

동하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사희를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어야 하지? 또 무슨 짓 꾸미려고?”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그냥……. 기대도, 의무도, 부담도 없는 곳에서 마음 편하게 몇 시간만 있고 싶어서요.”

“…….”

사희를 보는 동하의 눈이 살포시 좁아진다.

사희는 턱을 괸 채, 어디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지점으로 멍하니 시선을 두고서 말을 이었다.

“그동안 내게 수영장은 언제나 치열하게 경쟁하고, 악착같이 버텨야만 하는 그런 곳이었거든요. 때로는 도피하는 장소였고, 때로는 이겨야 하는 장소였고, 그리고 때로는 돈을 벌어야만 하는 장소였고……. 할 수만 있다면 그런 거 아무것도 없이 그냥 몇 시간만 물속에 있고 싶어요.”

사희를 보는 동하의 눈에 어지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왜 이리도 거울을 보는 것 같을까. 동하는 눈앞의 여자가 마치 저의 또 다른 모습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애잔해졌다. 말려볼 틈도 없이 또다시 마음이 갔다.

동하는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한번 굳게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해줄게요.”

“아, 뭐야, 진지하게 말하지 말아요. 꼭 진짜 같으니까.”

사희는 정말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줄 수 있다는 말하는 남자를 보며 키득 웃는다.

동하는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닿은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여자를 지켜보다가,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사희의 입술에 묻은 설탕 가루를 스윽 문질러 닦았다.

‘이것 때문이야. 이것 때문에 자꾸 속수무책으로 시선을 빼앗긴 거라고.’

동하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 변명하며 제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멈칫, 사희의 눈이 커진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 사희가 눈에 보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몹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뭘 이렇게 묻히고 먹어요. 칠칠맞게.”

동하는 짐짓 태연하게 웃으며 여자를 꾸짖었다.

사희는 손등으로 얼른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손등에 설탕 알갱이가 묻어난다.

“아, 그랬네…….”

사희는 열감이 느껴지는 뺨을 손바닥으로 쓸며 머쓱한 듯 조금 웃었다.

열띠게 흐르던 대화가 급격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때마침 천변에 켜져 있던 조명도 함께 소등되었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공원의 잔디밭 어귀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사희는 힐끔 눈을 돌려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본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이만 갈까요?”

“그럽시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남자가 살짝 이마를 찌푸린다.

“왜요? 어디 불편해요?”

“아니, 그건 아니고. 맥주를 좀 많이 마셨는지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귀에 썩 달가운 말은 아니었지만, 동하의 시답잖은 말 덕분에 팽팽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렸다. 다행이었다.

“어으, 진짜 투머치야.”

사희는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젓는다.

“뭐 모자란 것보다는 낫지.”

“어쩜 단 한마디를 안 지시네요.”

“그래야 당신이랑 한마디라도 더 하지.”

사희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다.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잡아당긴 새총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미치겠네, 진짜. 이 남자, 왜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거야?’

사희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동하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보였다. 반듯하게 솟아올랐다, 가파르게 떨어지는 직선은 달빛 아래에서 특유의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희는 차라리 조명이 꺼지길 잘됐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아니라면 상기된 얼굴을 들켰을 테니까.

공원을 빠져나오는 내내 두 사람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말이 없었다. 곁에 선 서로를 한없이 의식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그저 발끝만 보며 걸었다. 몽롱하게 올랐던 취기가 걷혀서일까. 분위기가 조금 서먹서먹해졌다.

공원 출구에 다다르고 나서야 두 사람은 겨우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머쓱한 웃음을 픽 터트렸다.

“왜 웃어요?”

“그러는 강사님은 왜 웃는데요?”

“난 그냥 우리가 좀 웃긴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어요.”

“뭐가요?”

“서사가 별나잖아. 서로 잡아 죽일 듯이 컴플레인을 거니 마니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선 무슨 절친이라도 된 것처럼 이 시간까지 같이 떠들고 술 마시고…….”

“확실히 보통 서사는 아니지. 내가 강사님 목숨도 구했었잖아.”

“그 와중에도 생색내는 건 잊지 않으시네요.”

“그걸 왜 잊어요. 그게 제일 중요한데.”

사희는 밉지 않게 동하를 흘기다가 결국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록 겨우 세 번이지만 확실히 보통 서사는 아니다. 아마도 그래서인가보다. 이 남자가 이상하게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가.

“전 여기서 택시 타고 들어가면 돼요. 그쪽은 어떻게 가요?”

“뭐, 어떻게든 가요. 내 걱정은 말고 강사님이나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요. 그럼. 잘 가요.”

인사를 마친 사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동하도 가볍게 손을 올려 인사하곤 역시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서로를 마주 본 채로 몇 걸음 머뭇머뭇 멀어지던 찰나, 동하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걸음을 멈췄다.

“아, 혹시 에스코트 필요한지 물었어야 합니까?”

동하를 따라 걸음을 멈췄던 사희가 피식, 제 오른쪽 어깨에 코를 묻고 웃었다.

“됐어요. 피차 취한 마당에. 각자 빨리 집에나 가죠.”

“뭐, 뜻이 그렇다면.”

“진짜 갈게요.”

사희는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돌아섰다. 그렇게 몇 걸음을 종종걸음 걷던 사희가 손뼉을 마주치며 돌아섰다. 그 소리에 동하도 걸음을 멈췄다.

“아,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한 게임은 누가 이긴 거예요?”

질문을 받은 동하가 어깨를 으쓱한다.

“음, 글쎄요. 막상막하였던 것 같은데.”

“그런가…….”

“그런데 어차피 그 게임은 누가 이기든 상처뿐인 영광 아닙니까?”

“하긴 그것도 그러네.”

사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가요.”

동하는 사희를 향해 잘 들어가라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그 인사를 받은 사희는 돌아서려다가 다시 살짝 몸을 틀었다. 그리곤 여전히 이쪽을 보고 서 있는 남자를 향해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고마워요, 오늘.”

“뭐가요?”

“기다려 줘서요.”

“고마울 것도 많네. 그게 뭐라고.”

“그러게요. 그래도, 그래도 고마워요. 그쪽은 이해 못 하겠지만 나한테 오늘은 그런 날이었어요. 별것도 아닌 일이 고마운 그런 날.”

말을 마친 사희는 재빨리 뒷걸음쳤다.

약한 소리는 여기까지만 해야 한다. 이 이상 선을 넘으면 그때는 이 부담 없이 편안한 관계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만큼이면 족하다. 더 가까울 필요도, 더 깊을 필요도 없다. 오며 가며 마주치는 아는 사람, 어쩌다 기회가 닿아 가볍게 밥 한 끼 하게 되면 딱 그것만 하고 헤어지면 족할 그런 사람. 그 정도에서 만족해야 한다.

지키고 싶은 관계일수록 안전한 거리를 확보해야 하니까.

“다음에 만나면, 그러니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때는 정말 비싸고 좋은 거 사줄게요. 그 전에 뭐든 먹을 수 있게 아픈 거 다 나으세요. 안녕!”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친 사희가 크게 손을 흔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간다. 동하는 긴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뛰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소실점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서서 지켜보았다. 생기를 찾은 것 같은 모습을 보니 왠지 조금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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