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어느새 라면이 바닥을 보인다. 국물까지 말끔하게 비운 사희가 알루미늄 용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배가 차니 비로소 눈앞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땀을 흘리며 먹어서 그런가, 몽롱하게 오른 열도 어느덧 가셨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배를 문지르며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던 사희가 문득 저를 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별로 안 좋아해서 다행이네요. 좋아했으면 그릇까지 먹었겠어.”
동하가 입술을 비틀며 키득 웃었다. 사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버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먹은 거예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 진짜 라면 싫어해요.”
“알았어요. 당신 라면 싫어해. 누가 아니래?”
동하가 긴 눈을 좁히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곤 웃음만큼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더했다.
“안 버리고 대신 먹어줘서 고마워요. 잘 먹으니 보기 좋네요. 지금껏 본 강사님 모습 중에 제일 나아요.”
사희는 손바닥으로 붉어진 뺨을 가리며 팩 고개를 돌렸다. 게걸스럽게 라면을 먹는 모습이 본 모습 중에 제일 낫다니. 이 남자가 그동안 저를 대체 어떻게 본 건가 싶어서 조금 멋쩍어졌다.
“자, 이제 속도 찼으니 맥주 한잔 해야죠?”
동하가 뚜껑을 딴 맥주를 사희 앞에 놓아준다. 캔의 주둥이 부분에 자기 맥주를 툭 부딪쳐 건배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약 먹어서 라면은 못 먹는다는 사람이 술은 마셔도 되나 보죠?”
사희가 맥주를 들며 시비 걸듯 물었다.
“술 마시지 말란 말은 안 하던데.”
동하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뻔뻔한 표정으로 맥주를 훌쩍 들이켰다.
“거짓말. 라면은 참아도 술은 못 참는 거겠지.”
“들켰네.”
동하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두 사람은 동시에 피식 코웃음을 터트렸다.
자정이 지난 공원은 조용했다. 그나마 드문드문 지나던 사람들도 점차 줄어, 천변을 따라 화려하게 밝은 무지갯빛 조명이 외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저 조명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없던 것들이다. 시장이 적극적으로 신도시 조성 사업에 돈을 쓰고 있다더니 눈 뜨면 어제 없던 것들이 번쩍번쩍 생겨나 있다.
“저건 또 언제 생겼지?”
사희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뭐가요?”
“저 조명들 말이에요.”
“원래는 없었나?”
“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촌스럽다. 굳이 저렇게까지 밝고 화려해야 할 필요가 있나.”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길로 내버려 두는 것보단 낫겠지.”
“그래도 가끔은 낮은 낮답게, 밤은 밤답게 두던 때가 그리워요. 이 도시는 이제 너무 반짝거려서 부담스럽거든요.”
사희가 지난 기억을 회상하듯 희미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여기서 오래 살았어요?”
“네. 어릴 때부터. 뭐 쭉 살았던 건 아니고. 한동안은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씁쓸해 보이는 사희의 얼굴을 힐끔 돌아보며 동하가 물었다.
“왜 떠났는데요?”
사희는 잠시 대답 없이 맥주 캔을 만지작거렸다. 표면적으로는 다른 도시에 있는 학교의 기숙사에서, 또 선수촌에서 합숙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지만, 그녀가 이 도시를 떠난 이유는 그게 다는 아니다. 그때, 사희는 도망쳤다, 아빠와 언니를 피해서.
“그냥,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어요.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왜?”
“지긋지긋했어요. 모든 게.”
“그럼 왜 다시 돌아왔어요?”
“그러게요. 나도 그게 의문이에요.”
시들하게 대답을 마친 사희는 피식 쓴웃음을 뱉곤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가 꿀꺽꿀꺽 목구멍 안쪽으로 시원하게 쏟아져 들어간다. 몸이 피로한 탓인가. 술 반 캔에 아른아른 취기가 피어올랐다. 뺨 주변에서 살짝 열감이 느껴졌다.
지금껏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누구에게 해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마치 자물쇠가 고장 난 금고처럼, 그 안에 꼭꼭 숨겨놓았던 것들이 놀랄 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흘러나왔다.
때때로 사람은 자신과 먼 사람에게 더욱 솔직해진다. 그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 사희가 고작 두 번 만났을 뿐인 남자에게 이렇게 자신의 속을 드러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가 스스로 자신을 내려놓으려고 했던 연약한 순간까지도 목격한 유일한 이여서인지도 모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은 모르겠는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은 들더라고요.”
“무슨 생각?”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이, 사실은 간절히 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기 위해 해야만 했던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뭐 그런 생각……. 떠날 땐 분명히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까 여기에 있더라고요.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던 곳을 내 발로 다시 찾아왔어요. 그럼 사실 나는 여길 돌아오고 싶었던 걸까?”
사희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하곤 남은 맥주를 쉬지 않고 마지막까지 들이켰다.
맥주캔을 든 동하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무언가 가슴 깊은 곳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줄곧 이곳에 다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사유했던 것에 대한 해답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얻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감추기 위해 줄곧 거짓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동하는 깊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조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경험 있어요, 그쪽은?”
사희가 동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취기 어린 목소리가 조금 늘어졌다.
그는 시선을 먼발치에 둔 채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화가 끊기자 둘 사이로 부는 바람이 왠지 서늘하게 느껴졌다.
“아, 내가 분위기를 너무 다큐로 만들었네. 우리 다른 이야기 하죠.”
사희가 손을 휘휘 저으며 분위기를 바꾼다.
“무슨 이야기?”
동하는 굳었던 얼굴을 풀고 조금 웃었다.
“뭐, 일단 식상한 것부터 할까요? 자기소개 같은 거.”
풉, 동하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픽 웃었다. 그리곤 맥주 캔을 든 손을 빙그르 돌리더니 홀짝 술을 들이켠다. 술을 머금은 입술과, 턱, 목으로 이어지는 선이 마치 공들여 그려놓은 듯하다.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그쪽이 좀 내놔보시던가요. 그렇게 비웃지만 말고.”
“좋아요. 해 봅시다. 식상한 거. 식상한 와중에 신선하네.”
“오케이. 그럼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식상한 질문부터 해 보는 거예요. 조금이라도 신선하면 지는 거예요. 그쪽이 먼저 시작하세요.”
동하는 잠시 고민한다.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막상 이기고 지는 대결이 되니 그게 뭐라고 심각해졌다. 이마를 찌푸리는 표정이 꽤나 진지했다. 약간의 고민 끝에 동하가 사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강사님 혈액형이 뭐예요?”
“와, 진짜 식상하다.”
“그래서 뭔데?”
“난 B형. 그럼 그쪽은?”
“난 AB형.”
“AB형? 그거 좀 또라이 혈액형인데.”
“뭐야, 그 촌스러운 일반화는. 어쨌든 이제 강사님 차례예요. 질문해 봐요.”
“무슨 색깔 좋아해요?”
“하, 내가 진짜 이런 식상해 빠진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나?”
동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웃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희의 얼굴에도 사르르 미소가 번진다.
혈액형,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계절, 좋아하는 음식 혹은 싫어하는 음식 같은 것들을 핑퐁 하듯 주고받는 사이, 두 사람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켜졌다. 한껏 서로를 비웃으면서도 기를 쓰고 더 유치하고 흔해 빠진 질문을 찾느라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몰랐다.
내외하듯 멀었던 거리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중에는 시선을 서로에게로 돌려 거의 마주 앉는 형태가 되었다. 하나둘, 빈 캔이 늘어가고 그 속도에 맞춰 둘은 조금씩 취해갔다.
“학교 다닐 때 무슨 과목 좋아했어요?”
사희가 지렁이처럼 생긴 젤리를 우물우물 씹으며 물었다. 젤리에 묻어있던 하얀 설탕 가루가 여자의 입술에 붙어서, 입술을 오물거릴 때마다 동하의 시선에 걸린다. 신맛이 나는 젤리인지 씹을 때마다 여자는 살짝 오른쪽 눈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꼭 저를 보며 윙크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아하는 과목은 없었고, 잘하는 과목은 많았지.”
동하는 마치 안개꽃을 물고 있는 것 같은 그 입술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뭐에요, 그 잘난 척은. 밥맛없게.”
“잘난 척 아니고 사실인데. 내가 공부를 엄청 잘했거든. 1등을 놓친 적이 없었지.”
동하가 턱을 치켜들며 으스댄다.
“만날 1등만 했다는 사람이 왜 여기서 남의 건물이나 지키고 있어요?”
“직업 비하하는 겁니까? 건물 지키는 게 뭐 어때서?”
“직업 비하가 아니라, 솔직히 그렇잖아요. 그렇게 잘났으면 남의 건물 지킬 게 아니라 적어도 본인 건물이라도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동하가 실눈을 뜨고 슬쩍 사희의 표정을 살폈다. 사희는 진심으로 동하를 비웃고 있었다. 200% 불신하는 사희를 보자 동하는 슬쩍 장난기가 돌았다.
“까짓것 갖지 뭐. 저거 내가 가지면 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