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17화 (18/109)

#17

충동적인 질문이다. 마치 무릎을 툭 치면 솟아오르는 다리처럼, 이성의 판단을 거칠 것 없이 가슴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왜일까. 괜한 것이 궁금했다. 오늘 뭐라도 먹었는지, 먹었다면 그 밥은 따듯했는지, 성에 찰 만큼 충분했는지, 입에 달았는지. 그런 쓸데없는 것들이 알고 싶었다. 참 별일이지.

막상 물어놓고, 살다 보니 참 별 이상한 감정이 다 드는 날도 있구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 역시 그 질문이 난데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네?”

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속눈썹 촘촘한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는 눈빛이 아이 같다.

“나 좀 출출한데. 나가서 뭐 좀 먹을래요?”

“아뇨, 저는 그만 가봐야 해서요…….”

“치사하네. 난 강사님 기다리느라 밥도 못 먹었는데.”

사희의 표정이 금세 난처해졌다.

“세탁비는 됐고, 밥 사요. 지각비까지 더해서 비싸고 맛있는 거로.”

“…….”

“왜? 열이 나는 것도 아니라며. 아픈 거 아니면 밥 정도는 살 수 있잖아?”

떠보는 투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사희의 눈동자가 잠시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아니면 정말 아픈 건가? 그런 거면 보내주고.”

동하가 다시금 도발하듯 물었다. 어지럽게 눈동자를 굴려 한참 망설이던 사희가 이윽고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살게요. 밥. 나, 안 아파요.”

***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건물 밖으로 나오며 사희가 물었다.

“뭐든. 강사님 먹고 싶은 거로 해요.”

동하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성의 없이 대답했다.

“배고픈 사람은 그쪽이 아니었던가요?”

“맞아요. 나 배고파요. 그러니까 어서 결정해요. 강사님이 먹고 싶은 거, 내가 많이 먹을 거니까.”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남자를 흘겨보았지만, 그는 그런 시선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 시간에 근처에 문을 열만한 곳이 어디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시간이 늦어 마땅히 뭘 먹을 수 있을 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번화가까지 자리를 옮겨가는 것은 너무 거창한 것 같고.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동하가 한참을 뜸 들이고 있는 사희를 재촉했다.

“아무래도 마땅한 게 없어서요.”

“사주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

“아니에요, 그런 거.”

“저긴 어때요?”

동하가 손끝으로 사희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가 손짓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대로 너머로 공원 입구 쪽에 불을 밝히고 있는 편의점이 보였다.

“저긴 비싸고 맛있는 게 없을 텐데…….”

사희는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걱정 말아요. 내가 최대한 비싸고 맛있는 걸로 골라 볼 테니까.”

말릴 새도 없이, 동하는 성큼 도로 쪽으로 발을 디뎠다. 사희는 무단횡단을 하려는 남자의 뒤에 서서 조금 머뭇거렸다.

“저 밑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횡단보도가 있어요.”

“도로가 이렇게 텅 비었는데 왜 시간 낭비를 해요?”

“아무리 그래도… 질서는 지켜야…….”

사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쭈뼛거리는 그녀의 손목을 동하의 큰 손이 잡았다. 당황해 움츠리는 사희를 본 동하가 태연한 듯 씩 웃는다.

“누가 강사님더러 왜 질서를 어겼느냐 묻거든 내가 못 지키게 했다고 해요.”

사희는 동하의 손에 붙들려 순식간에 도로를 건넜다. 8차선 도로를 겁 없이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남자는 사희의 손을 놓지 않았다. 따듯한 손이었다. 사희는 제 팔목을 그러쥔 그 손을 보며 몇 걸음, 그리고 앞서 걷는 이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남은 길을 이끌려 건넜다.

차가운 얼굴과는 다르게 왠지 친근감이 드는 뒷모습이었다. 사람의 뒷모습에는 그 사람이 미처 감추지 못한 진짜 모습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을 무렵, 두 사람은 안전하게 맞은편에 도착했다. 도로를 다 건너자 남자가 비로소 사희의 손을 놓았다. 살갗에서 사라지는 온기가 조금 아쉬웠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코너를 몇 번이나 빙글빙글 돌았다. 최대한 비싸고 맛있는 것을 골라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것과는 달리 그는 진열된 것들에 별다른 흥미가 없어 보였다.

“안 골라요?”

사희는 한참을 기다려도 무얼 집을 생각이 없는 동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고르고 있어요.”

“벌써 같은 자리 세 바퀴나 돌았는데요.”

“내가 원래 좀 신중해요. 난 신경 쓰지 말고 강사님은 강사님 먹고 싶은 거나 골라요.”

퉁명스럽게 대꾸한 동하는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사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진열대 앞에 선다. 종일 먹은 게 없는데도 영 입맛이 없어 무얼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맥주나 좀 마실까. 결국 사희는 먹을 것을 고르기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잠깐만 이리 좀 와 봐요.”

사희가 맥주와 주전부리 조금을 가져와 계산대에 올려놓는데,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동하가 다급히 사희의 팔을 잡아당겼다.

동하가 사희를 데려간 곳은 즉석라면 조리기 앞이었다. 남자는 앞에 선 사람이 라면을 끓이는 모습을 턱짓으로 가리키더니 그 앞으로 사희를 조금 떠밀었다.

“저거 해봐요.”

“네?”

“저거 좀 해 보라고요. 저거 맛있어 보이는데. 나 저거 먹을래요.”

사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동하를 돌아본다.

“먹고 싶으면 그쪽이 하시면 되잖아요. 왜 나한테 시켜요?”

“비싸고 맛있는 음식에는 원래 서비스 비용도 포함되는 겁니다. 해 가지고 저기로 나와요.”

손수 앉을 자리까지 지정해 알려준 동하는 유유자적하게 편의점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하, 사희의 입에서 기막힌 추임새가 터진다.

“진짜 웃기는 사람이네.”

도에 넘치게 당당한 그의 태도가 어이없었지만 오늘은 지은 죄가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

심야에 라면 끓이는 냄새는 위험한 구석이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식욕이 없었는데 김이 모락모락 오르며 끓는 라면을 보자 급격하게 허기가 졌다. 이왕 끓이는 라면이니 계란도 넣으면 좋겠다 싶어 사희는 얼른 그것도 사서 넣었다.

“맛있겠다.”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라면을 보며 사희는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는다.

라면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보니 동하는 미월천이 보이는 테라스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사희가 사놓은 맥주까지 마시면서 신선놀음 중이었다.

사희는 매섭게 눈을 흘겨 한참이나 남자를 쏘아보다가, 일부러 쿵쿵 소리를 내며 그 곁으로 걸어갔다.

“자, 먹어요.”

사희가 동하 앞으로 라면과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쌀쌀맞게 말한다. 사희가 감정을 실어 내려놓은 라면을 심드렁한 눈으로 본 동하는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못 먹겠어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방금 전에는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입덧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사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약이 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사희와는 다르게 동하는 태연하게 꼬았던 다리를 풀며, 이번엔 팔짱을 낀 채로 의자에 깊게 기댔다.

“먹고는 싶은데, 내가 약을 먹고 있어서. 병원에서 밀가루 음식은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어쩌지? 아무래도 못 먹겠는데.”

“하……!!”

“하는 수 없네요. 강사님이 대신 먹어요.”

동하가 사희 앞으로 라면을 밀어주었다.

사희는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린 채로 동하를 쏘아본다. 지금 사람 똥개 훈련시키는 거야, 뭐야?

“이봐요!”

“네,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보는 앞에서 맛있게 잘 먹어줘요. 대리만족이라도 하게.”

사희는 아직도 뜨거운 김을 내고 있는 라면을 한번, 그리고 어서 먹으라며 재촉하는 남자를 한번 번갈아 쏘아보았다. 뭐라고 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못 먹을 사정이 있다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고 해서 이미 끓인 라면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쩔 방도가 없었다.

“정 못 먹겠으면 버립시다.”

사희가 도통 젓가락을 들 생각을 하지 않자 동하가 라면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리긴 왜 버려요, 계란까지 넣은 건데.”

사희가 남자의 손에 들린 그릇을 받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눈을 부라렸다.

“그럼 먹을 건가?”

동하가 얄미울 정도로 반색을 하며 씩 웃는다.

결국 사희는 씩씩거리며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나 라면 별로 안 좋아해요!”

마지막 항변이라도 하듯 팩하고 쏘아붙인 사희가 라면을 한 젓가락 들었다.

호르륵,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 라면은 그러나 ‘별로 안 좋아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종일 굶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젓가락을 움직이는 손길이 점점 바빠진다.

동하는 느슨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후륵후륵, 맛있게 라면을 먹는 사희의 모습을 보았다. 라면을 빨아들이고, 오물거리고, 꿀꺽 삼키는 일련의 과정이 잘 만들어진 예능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다. 음식이 줄어들수록 창백했던 뺨에 혈색이 도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역시 이 여자는 자신이 얼마나 허기졌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배가 고픈 것도,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피로한 것도 몰랐을 것이다. 분명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래놓곤 누가 힘들지 않느냐, 물으면 절대 아니라고 우겨댔겠지. 누군가 보이는 관심을, 상대가 저를 약하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고열로 쓰러졌던 적이 있다. 급성 폐렴이었다. 며칠째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몸은 고열과 통증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죽음 문턱까지 다녀온 뒤에야 동하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리고 무심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동하는 눈앞의 여자에게서 그때의 자신처럼 무모하고, 어리석은 눈빛을 보았다. 그 고통을 알기에 그 눈빛을 도저히 외면하고 돌아설 수 없었다. 그가 멀리 돌아가는 길 대신 무단횡단을 선택한 것도, 미친놈 보듯 하는 눈길을 받으면서 라면을 먹게 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