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16화 (17/109)

#16

10시, 폐점시간이 되자 환하게 불 밝혔던 노바는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폐점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음악이 멈추고, 메인셔터까지 내려간 쇼핑센터는 순식간에 을씨년스러워졌다.

차에서 내린 동하는 직원 출입구로 향했다. 조명진 실장이 준 출입카드가 주머니 속, 손가락 사이에 걸린다. 그러나 어제와 다름없이 그의 출입카드를 검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폐점하고 난 건물은 싱거울 정도로 경계가 허술했다. 어차피 사방팔방이 CCTV인 데다, 문제가 생기면 억 소리는 우스운 보험이 가입되어있을 터이니, 보안직원의 역할은 그저 경계심을 심어주는 정도의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동하는 손목시계를 한번 확인했다. 10시 28분.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30분의 여유가 있다.

조금 이르게 도착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는 사람인 척 보이려는 의도였다. 여자가 저를 보안실 직원으로 오해하고 있으니 되도록 그렇게 믿게 두고 싶었다. 굳이 자신의 정체를 밝힐 이유도 없을뿐더러, 괜히 그런 걸 밝혀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적당한 호기심과, 약간의 흥미,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가 주는 편안함이 그를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다. 굳이 그 자유로움을 깨트릴 필요는 없었다.

폐장한 수영장은 고요했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것만 이따금씩 들려올 뿐. 보조조명의 은은한 불빛이 드리워진 푸른 수영장은 한밤의 바다 같았다.

동하는 어제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장판 같이 잔잔한 물결을 바라본다. 이제 약속 시간까지는 20분 정도가 남았다. 왜인지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

걷다 보니 어느새 아파트 앞이었다. 운동화 앞코에 닿은 엄지발가락이 못에 찔린 것처럼 쑤셔온다. 땅에 닿을 때마다 운동화 바닥에서 나는 직직, 소리가 그녀의 피로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경비실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 결정적인 순간에 딱 끝나냐. 그래서 홍난실이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단 건가?”

“뻔하지 뭘.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제일 많이 걸리는 병이 기억상실증이랑 암 아니겄어?”

오래된 아파트라 그런지 경비실은 종종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곤 했다. 오늘도 그곳에서 친한 주민들 몇몇이 함께 모여 드라마를 본 모양이었다.

“어이, 1008호 아가씨! 잠깐만. 택배 온 거 있어. 찾아가.”

사희를 발견한 경비아저씨가 경비실 작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아, 네.”

사희는 경비실 안쪽 구석에 산처럼 쌓인 택배들 틈에서 자기 호수가 적힌 것을 찾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1008호면 그 집 아니여? 그 왜 죽으려고 목매달았다던…….”

“맞어. 구급차 오고 난리 났었잖아.”

“저 아가씨가 그럼 그이여?”

“아니야. 그 사람은 애 엄마야. 왜 있잖아. 키 째끄맣고 까무잡잡하니 말 수 없는…….”

사희의 등 뒤에서 주민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희는 못 들은 척 택배를 찾는 데 집중했다.

“근데 애도 있는 사람이 왜 그랬대?”

“우리 며느리 말이 우울증이니 뭐니 하던데……. 남편이 바람나서 도망갔댜.”

“쯧쯧쯧. 그래서 그랬구먼. 그래도 애 생각해서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그렇게 약한 생각을 해서야 쓰나. 우을증, 그거 다 의지가 약해서 생기는 병이여. 요새 젊은 것들이 고생을 안 해봐서 그래. 몸 부서져라 밭 매 봐. 어디 우울하다는 생각이나 할 틈이 있는가.”

택배를 뒤지던 사희의 손이 멈칫했다. 천천히 허리를 펴고 선 사희는 큰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렸다. 그녀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조금 전까지 떠들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사희와 눈이 마주치자 수군거리던 주민들이 합죽이가 된 양 입을 다문다.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처럼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였다.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그들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을까. 사희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소심하고 약해빠진 언니가 소문 많은 이 아파트에서 하루하루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어두운 집안으로 들어온 사희는 불을 켤 여력도 없어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벌레처럼 몸을 움직여 겨우 가방만 벗어내곤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몸에 약간 미열이 있는 것 같았다.

하루가 지루할 만큼 길었다. 가물가물 쏟아지는 잠으로 빠져드는데 문득 오늘 그녀에게 남아있는 중요한 일이 생각났다. 화들짝 놀라 눈 뜬 사희는 얼른 머리맡으로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들었다.

10시 45분. 남자를 만나기로 한 시간이 겨우 10분 남짓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

사희가 노바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1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다급하게 직원통로로 뛰어 들어가던 사희는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보안직원에게 가로막혔다.

“저 여기 직원이에요. 풀장에 뭘 두고 와서 가지러 왔어요.”

의심스러워하는 직원에게 직원카드를 보여주고 나서야 겨우 통과를 받았다.

“15분 안에는 내려오셔야 합니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빠르게 엘리베이터 올랐다. 닫힘 버튼을 몇 번이고 누르는 사희의 손짓에 초조함이 묻어있었다.

풀장은 조용했다.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풀장 한 바퀴를 빠르게 훑어본 사희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벤치 쪽으로 나 있는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어제 두 사람이 함께 앉아있던 그 자리에도 역시 그는 없었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시간은 11시 45분. 이미 약속 시간으로부터 1시간 가까이나 지나있었다. 너무 늦었다. 그는 이미 돌아간 모양이었다.

“하…….”

어깨에서 쭉 힘이 빠져나간다. 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참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

사희는 그대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 바들바들 떨린다. 짓이기듯 입술을 깨물어 참아보았지만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눈꺼풀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나는.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약속 시간이 11시 58분이었던가요?”

익숙한, 낮은 목소리였다.

사희는 무릎 사이에 묻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불에 덴 듯 벌떡 일어나 돌아보니 그 자리에 이동하가 서 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조금은 책망하는 눈빛으로 사희를 보고 있다.

“아…….”

사희의 입술에서 안도의 한숨과도 같은 묘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약속 시간을 잘못 안 겁니까?”

동하가 다시 묻는다.

“아, 아니에요. 제가 늦었어요. 없어서 간 줄 알았어요.”

“바람맞는 줄 알고 목이 좀 타서.”

동하가 사희 눈앞으로 생수병을 들어보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어요.”

“그럼. 죄송해야지. 내가 여기 앉아서 얼마나 처량한 생각을 많이 했는지 알면 아주 많이 죄송해야 할 겁니다.”

“……아, 정말 미안해요.”

“농담인데. 그렇게 다 죽어가는 표정을 지으면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동하는 풀 죽은 사희를 보며 피식 웃는다. 가벼운 표정을 보아하니 화가 난 눈치는 아니었다. 비로소 마음이 놓인 사희도 동하를 따라 조금 웃었다.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피실, 웃음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쩐지 여자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단순히 미안해서 그렇다고 보기엔 그녀의 얼굴이 너무 어두웠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 사희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본 동하가 무언가 알아챈 듯, 짙은 눈썹을 약간 치뜬다.

“무슨 일 있어요?”

사희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요.”

“그런데 왜 운 것 같지?”

사희는 불에 덴 것처럼 놀라며 눈을 몇 번 빠르게 깜박였다.

“아뇨, 울긴 누가 운다고.”

사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대답과는 무색하게 사희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바로 그 순간, 사희의 이마에 서늘한 무언가가 닿았다. 남자의 손가락이었다.

남자는 검지와 중지를 비스듬히 뻗어 사희의 이마를 한번 짚어보더니 흐음, 낮은 한숨을 쉰다.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좀 뛰었더니 더워서 그래요.”

“운동한다는 사람이 더운 거랑 열나는 것도 구분 못 해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사희는 입술을 강하게 말아 물곤 재빨리 남자를 등지고 돌아섰다. 그리곤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구겨진 지폐 몇 장을 허둥지둥 꺼냈다. 그리곤 여전히 남자를 외면한 채로 서서 손만 불쑥 뒤로 내밀었다.

“여기 세탁비요. 이거 드리려고 왔어요.”

지폐를 쥔 손이 눈에 보이게 떨리고 있었다.

동하는 손에 들린 지폐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사희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지쳐 보이는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하는 음, 하고 심드렁한 소리를 내더니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이사희 강사님.”

“……네.”

“이 돈 가지고 안돼요. 내 옷 비싼 거라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힌 사희가 엉겁결에 동하를 돌아본다.

사희의 눈자위와 콧잔등이 붉다. 지폐를 쥔 사희의 가느다란 손가락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머뭇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 얼마를 더 드리면…….”

“강사님, 저녁은 먹었습니까?”

동하가 사희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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