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런데?”
수찬의 표정 변화를 알아챈 동하가 즉시 말꼬리를 문다.
“우리가 알아보려는 칼럼은 직접 투고가 아니라, 잡지사에서 이미 쓰인 글을 따다가 게재한 거였어요. 주식관련 사이트로 좀 유명한 곳에 올라온 글이었다는데, 거기가 워낙 익명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그게 누가 쓴 글인지 알 수는 없대요. 사이트 운영방침 상 사이트에 올린 글의 권한이 운영자에게 있어서, 그 글도 그냥 운영자의 동의하에 게재한 거더라고요.”
“그래?”
동하의 미간이 살포시 좁아진다.
“네. 그러니까 혜석이나 윤재화 전무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내진 글은 아니었다는 거죠. 편집자 이야기 들어보니 혜석홀딩스 설립 이후로 경제지마다 앞다투어 이경민 부사장 승계론에 대해서 떠들어댔는데, 그 칼럼만이 유일하게 윤재화 전무 쪽으로 방향을 두는 게 신선해서 실은 거래요. 그런데요. 그 칼럼이 올라오고 나서 얼마 뒤에 윤재화 이사 비서실에서 기사 삭제요청이 들어왔대요.”
“삭제요청?”
“네. 그 기사가 혜석의 이미지에 흠이 될 수 있다고 했다나요? 사람들이 쳐주지도 않는 영세한 경제지에, 조회수도 얼마 나오지 않은 글이었는데 상당히 민감하게 굴더라면서…….”
수찬이 볼이 미어져라 토스트를 베어 물더니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그리곤 동하에게도 먹어보라며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밀어주었다.
윤재화는 왜 자식의 능력이 공론되는 것을 꺼릴까. 손목을 움직여 식어가는 커피를 뱅글 돌리던 동하가 무언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동하는 더는 말을 아꼈다. 현재로서는 모든 것이 추측일 뿐이다. 추측은 늘 절반의 위험을 가지고 있으니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동하가 제아무리 영민하다 한들, 시간은 앞설 수는 없다.
“그나저나 수영장은 대체 왜 가신 건데요? 간 건 둘째 치고 옷은 왜 또 그렇게 젖은 거고요!”
수찬이 다시 대화의 화제를 10분 전 상황으로 돌렸다. 동하는 잠시 심각하게 빠져있던 생각을 거두고 토스트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잘 구워진 토스트에서 고소한 버터 향이 났다.
“뭘 그렇게 캐물어? 네가 내 애인이라도 돼?”
“애인은 아니지만 애인만큼은 하죠, 제가. 모르긴 몰라도 내가 이 지구에서 선배를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일 걸요?”
수찬이 그러잖아도 토끼처럼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까불댄다.
“사양한다. 남자가 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거 불쾌하거든?”
“그럼 빨리 최수찬을 이길만한 여자를 찾으시던가요. 혈기왕성한 30대 남자가, 밤에는 밤에 어울리는 일을 해야지. 궁상맞게 혼자 웬 수영입니까? 그것도 옷까지 흠뻑 적셔가면서. 하여튼 정말 미스터리야.”
수찬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밤에 어울리는 일이라. 동하는 자연스럽게 지난밤의 일을 떠올린다. 간밤의 서사가 밤에 어울리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혼자가 아니었으니 궁상은 아닐지도.
「그럼 내일 여기서 다시 만나요.」
문득, 이사희의 맹랑한 제안이 떠올랐다. 잠깐이었지만 동하의 입술에 옅은 웃음이 물들었다가 사라졌다.
***
머리맡에서 알람이 울린다. 사희는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손만 뻗어 겨우 알람을 껐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지난밤 회식에서, 이것저것 더럽게 섞어 짓궂게 말아준 폭탄주를 수없이 들이킨 여파였다. 사희는 끄응, 소리를 내며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갈증이 심해 식도가 말라붙는 기분이었다.
거의 기다시피 해서 밖으로 나온 사희가 힘겹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생수 몇 병과 언제 먹고 넣어두었는지 알 수 없는 오래된 딸기잼 한 통만이 들어있을 뿐, 음식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본연의 기능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집에서 언제 음식을 해 먹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요리에 일절 취미가 없기도 했지만, 끼니를 챙기기 위해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상차림을 할 여유가, 지금 사희에게는 없다.
센터강사들은 사희를 두고 느지막이 출근해 기함할 돈을 가져가는 한량 팔자라고 비꽜지만, 사실 사희에게는 시간의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노바 강습이 없는 요일에는, 이웃 도시까지 원정 강습을 하러 가야 하고, 격주에 한번은 언니의 병원에도 방문해야 했다. 없는 짬에 시간을 내서 조카를 만나러 가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다른 일에는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 언니가, 딸의 근황을 들을 때만 반짝 집중을 한다는 것을 알기에.
언니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수아는 아이의 친가에서 데려갔다. 재혼한 아이의 아빠가 수아를 키우기 꺼려했기 때문이다. 우스운 것은 그러면서도 수아를 절대로 전부인의 손에 맡기지 않겠다는 그 고집이었다. 그는 노모에게 자신의 딸을 맡겨놓곤, 마치 최선의 방책을 강구해내기라도 한 것처럼 당당했다.
「처제, 미안하지만 수아 못 줘. 강희 손에 애 못 맡겨. 애 보는 앞에서 자기 목숨 끊으려던 여자야. 정신병자라고. 그런 애한테 수아를 어떻게 맡겨?」
수아가 태어나 그만큼 크는 동안 거의 방치를 한 것이나 다름없던 무신경한 아버지에게서 왜 갑자기 그런 부성애가 발휘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본인이 키우겠다는 것도 아니면서.
하지만 억울한 사정이야 어떻든 언니는 자살미수라는 위험한 전적과, 중증의 우울증 진단 때문에 법 앞에서 철저하게 불리해졌다. 사희가 법률사무소를 전전하며 방법을 구해보고는 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친아버지가 친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현재의 상황에서 언니가 수아를 키우는 일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사희는 생수병을 꺼내, 물병 꼭지에 입을 대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배가 불룩하게 오르도록 물을 마셨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골이 쏟아지는 것 같은 극심한 두통도 가시지 않았다.
사희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창밖에는 봄볕이 가득한데, 집안은 쌀랑했다. 이 계절은 늘 바깥보다 실내가 더 춥다. 보일러를 돌리지 않은 바닥의 냉기가 살갗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뺨을 바닥에 붙이고 시체처럼 누워, 일주일을 가득 채운 스케줄 중에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는 날인지를 생각해 본다. 초등학생 대상으로 하는 생존 수영 강습이 오후에 하나 잡혀있는 것 말고는 특별히 다른 것이 없다. 다행히 오늘은 비교적 수월한 오후를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어제의 약속이 떠올렸다.
「내일 여기서 다시 만나요.」
어떻게 그런 발칙한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술 취한 김에? 아니, 그즈음엔 술김이라는 말을 빌리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 제정신이었다.
그러면 죽을 뻔한 저를 도와준 고마움 때문에? 그 부분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보기 어려우나, 그렇다고 해서 오로지 고마움 때문에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사희는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를 다시 보고 싶은 욕구에, 고마움이란 감정은 그저 구실이 되어주었을 뿐이다.
“하…….”
바닥에 뺨을 붙이고 누운 사희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남자를 키우는 일, 하등 쓸모없는 짓이라고 진저리를 쳤는데. 사람의 결심은 이토록 상대적이다. 모르겠다. 마음이 왜 이렇게 멋대로 움직이는지. 다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그녀는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9시간 후쯤, 아무도 없는 풀에서 다시 만날 남자를 생각하며 사희는 눈을 감았다. 기분 탓일까. 두통이 조금 잠잠해지는 기분이었다.
***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강습을 하는 일은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보다 곱절은 힘이 드는 일이다. 혼자서는 수영복도 갈아입지 못하는 아이, 걸핏하면 이상한 질문을 꺼내 분위기를 흐리는 아이, 어디서 좀 배운 실력을 뽐내느라 안전구역 밖으로 자꾸 벗어나려는 아이 등등.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수십 가지 변수를 뒤치다꺼리하다 보니 강습을 마쳤을 무렵 사희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강습 내내 얼마나 소리를 질렀던지 목소리마저 잠겼다.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 밖으로 나온 사희는 휴대전화에 남아있는 부재중 전화 표시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형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 그것도 6통이나.
형부가 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은, 수아나 언니에 관련된 일일 터. 사희는 지체 없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세……?”
-처제, 혹시 수아랑 같이 있어?
사희의 말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형부에게서 질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자기가 데려간 수아를 왜 저에게 찾나 싶어 의아했다.
“무슨 소리예요, 그게? 수아가 왜 저랑 있어요?”
-같이 없는 거 확실해?
“무슨 소리냐고 묻잖아요! 데려갈 때는 언제고 대체 왜 나에게서 수아를 찾아요?”
사희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높아지자 전화 너머에서도 미심쩍은 기운을 지우고 말을 이었다.
“수아가 없어졌어. 픽업을 갔는데 애가 없더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애가 없다니.”
“픽업 시간이 맞지 않아서 수아가 어린이집에서 좀 기다리게 됐던 모양이야. 아무튼 찾으러 가봤더니 애가 없더래. 담임교사 말로는 수아가 피곤해해서 재우고 자기들은 청소를 했다는데……. 그사이 혼자 나간 건지.”
그 뒤로도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사희의 귀에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