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상당히 솔직한 얼굴이네.’
질세라 받아칠 때는 세상 둘도 없는 깍쟁이 같더니, 순간순간 드러나는 표정이 어이없을 정도로 무방비해서 재미있다. 은근히 깜찍한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그래도 컴플레인은 컴플레인이니 강사님이 조금 귀찮아지긴 할 겁니다. 뭐,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뭐 그 정도라면…….”
사희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에 안심하다가 문득 말을 멈췄다. 사무실 직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반 회원이 VIP 회원 관련 컴플레인을 걸어 소란을 일으킨다면 자기들 선에서 정리를 하겠다고 했었다. 그런 정황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눈앞에 이 딱한 남자가 왠지 조금 딱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어쨌든 컴플레인은 꼭 접수하시겠다는 뜻인가요?”
“그래요.”
“꼭 그러셔야 해요?”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왜요? 강사님한테는 이유가 있나요?”
“이유라기보다는. 그냥 이 말씀만 드릴게요. 그 시간에 이 풀을 통째로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을 가졌다면 그게 보통 회원은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사희는 그쯤에서 말을 흐렸다. 굳이 이런 말까지 해서 저 남자를 보호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다. 아무 죄 없는 그가 VIP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동하의 시선이 사희의 얼굴에 진득하게 붙는다.
“강사님, 지금 내 걱정을 해주는 겁니까?”
“걱정은 아니고요.”
“걱정 같은데요.”
“아니에요. 착각하지 마세요.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그래도 하지 마세요. 아니니까.”
새침하게 대답한 사희는 팩하니 고개를 돌렸다. 동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강사님은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VIP가 가진 권력이?”
“말씀드렸잖아요. 을이라고.”
“여기 아니면 밥벌이 못 하는 겁니까?”
뭐라고? 사희는 불쾌함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남자를 강하게 쏘아보았다.
“본인이 굉장히 무례한 사람이라는 거 혹시 알고 계세요?”
“내가요?”
“회원님이시니까 여기까지는 참겠습니다만 더 이상의 무례는 용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회원이 아니면 안 참을 거란 말인가요?”
사희는 자꾸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남자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회원이고 나발이고, 정말이지 콧잔등을 한대 쳐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구나 빙글빙글 웃기까지 하는 잘생긴 면상은 더욱 얄미웠다. 그가 일부러 저를 자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안 참아요. 회원 아니었으면 벌써 주먹 날아갔어요.”
큭, 동하는 참지 못하고 긁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살면서 저에게 이토록 맹랑하고, 순수하게 화를 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동하가 누구인가. 혜석그룹 이종학 회장의 차남이 아닌가. 비록 반쪽짜리라 하더라도, 어쨌든.
물론 저 여자의 저런 모습 역시 이동하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이겠지. 그것을 알기에 동하는 더욱더 그녀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설령 언젠가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하더라도, 지금만큼은 저를 그저 ‘무례하고 불쾌한 인간’이라고 맹비난할 수 있는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하는 분해서 씨근거리는 사희를 보며 마음껏 웃었다. 웃고 또 웃었다.
“왜 자꾸 웃는 거예요? 기분 나쁘게.”
사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정말 거의 한 대 칠 기세로 발끈했다.
“아, 미안. 미안해요. 그냥 강사님 말씀하시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뭐야, 진짜 기분 나쁘게. 비켜요! 난 갈 거예요.”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사희가 동하를 지나쳐가려는데, 그가 다리를 조금 움직여 그녀의 길을 막았다. 동하의 무릎에 길이 막힌 사희가 성마른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뭐하시는 거예요, 지금?”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동하가 오른쪽 발끝을 까닥 느리게 움직이더니 사희를 올려본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웃음을 지운 채였다. 동하는 웃음기를 말끔히 거둔 진지한 눈으로 사희의 얼굴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아까 전에 말이에요. 혹시…….”
“……?”
“혹시 죽으려던 거였습니까?”
“……!”
사희의 아치형 눈썹이 강하게 일그러졌다.
“아, 이 질문도 무례했습니까? 그랬다면 사과하고.”
사희는 무언가 다 알고 있다는 듯, 빤한 시선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몹시 당황했다. 마치 그의 앞에 벌거벗은 채 서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사희의 안색이 하얗게 식는 것을 느낀 동하는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역시 그랬군요.”
“사, 사고였을 뿐입니다.”
사희가 말을 조금 더듬었다.
“그런가? 내 눈엔 그다지 자연스러운 죽음은 아닌 듯 보였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시고 싶은 거예요?”
왈칵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사희의 격양된 목소리가 풀장에 우렁우렁 울렸다.
그러나 흥분한 그녀와는 달리 동하는 태연했다. 그는 다시금 느리게 발끝을 까딱 까닥 움직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냥 좀 궁금했어요. 물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대체 어떤 기분인지. 그게 정말 궁금했던 적이 있었거든. 한때 그걸 이해해보려고 수없이 빠져보았는데, 마지막 순간엔 나도 모르게 발버둥 쳐 나오게 되더라고요. 어쩌면 그래서 끝내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동하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대체 그런 게 왜 궁금한데요?”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희의 입에서 마음과 다르게 또다시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래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동하는 알 수 없는 말을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풀장의 잔잔한 물을 바라보는 눈빛이 시리도록 공허해 보였다. 그는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든 듯 다시 말이 없었다.
그 곁에 멀뚱하게 서 있을 필요가 없음에도 왜인지 사희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왜 이러는 거야, 이사희. 정신 차려. 스스로를 향해 끊임없이 소리쳐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떤 기분입니까?”
또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그가 다시 물었다.
사희는 깨끗이 인정하기로 했다. 남자에게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은 이미 효력을 잃었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 완벽하게 정의하기 힘들지만 하나만은 알겠다. 이 남자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시답지 않고 때때로 불쾌한 질문임에도 자꾸만 그에게 대답하고 싶어진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궁금하다는 것.
사희는 포기했다는 듯 큰 한숨을 내쉬곤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거창할 건 없었어요. 의외로 웃긴 생각만 들던데요.”
“웃긴 생각?”
“물에 빠져 죽은 수영 강사가 되면 칭송을 받을지 조롱을 받을지, 뭐 그런 거. 그러다가 끝내는…….”
“끝내는?”
“망했다는 생각이 들던데. 얼마나 쪽팔릴까. 물에 빠져 죽은 수영강사라니.”
사희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곤 발끝에 남은 물을 튕겼다. 사희의 대답에 동하가 붉은 입술을 당겨 피시식 웃는다.
“의외로 시시하네요. 죽음이라는 게.”
“자꾸 죽음, 죽음 하지 마세요. 처음엔 분명 사고였어요. 나중에 의지를 좀 잃은 건 사실이지만, 애초부터 죽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맹세코.”
“어쨌든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자살 시도든 사고든 간에. 죽지 말아요. 최대한 살아요. 그쪽 말마따나 쪽팔리잖아. 그렇게 죽는 거.”
심장 깊은 곳에서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어떤 위로보다 큰 위로였다. 버티다가, 버티다가 끝내는 허물어져 버렸던 그녀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속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사희는 얼른 입술을 말아 물었다.
남자는 물병에 남은 물을 다 털어 마시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떠나려는 모양이다. 사희도 그를 따라 부스스 일어났다. 그의 머리카락과 옷에서는 여전히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뺨을 가르며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치 오열하는 자의 눈물 같았다.
그제야 그가 죽을 뻔했던 자신을 삶으로 되돌려 놓았음이 다시금 실감이 났다. 그의 무례야 어쨌든,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었다.
“어떡해요? 옷이 다 젖어서…….”
사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르겠죠.”
“그런데 풀에 수영복도 착용하지 않고 그냥 들어오신 거예요?”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이제 좀 살만 해지니까 그런 걸로 시비를 겁니까?”
그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피실 웃는다. 사희는 왠지 어물쩍 넘어가려는 것 같은 남자를 보며 눈시울을 가늘게 좁혔다.
“대체 정체가 뭐예요?”
“무슨 정체?”
“처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날 그 시간에 풀에 들어왔던 것도 그렇고. 폐장시간에 이런 복장으로 이렇게 풀에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이상하고. 회원이라면 그러기 힘들거든.”
의심스럽게 저를 보는 사희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동하가 입술을 당겨 조금 웃었다.
“그래서 강사님 눈에 뭐인 것 같은데, 내 정체가?”
“여기 회원 아니죠?”
“난 한 번도 내가 회원이라고 말한 적 없었는데. 어디까지나 강사님의 일방적인 오해였지.”
동하의 대답에 사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