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10화 (11/109)

#10

보조 조명만을 살짝 올려둔 수영장은 어두웠다. 한낮의 수영장과는 다른 안락함이 느껴졌다. 몸을 휘감은 물의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며, 사희는 물 위에 가만히 떠 있었다. 팔과 허리를 움직이지도 않았다. 다만 발끝을 살짝 굴러 아주 조금씩, 천천히 전진할 뿐이었다.

물속에서는 소리가 부드럽게 들린다. 어떤 말을 해도 직접적으로 고막에 와서 꽂히는 법이 없다. 동글동글해진 소리는 부드럽게 귓바퀴를 휘감았다가, 조용히 돌아나간다. 결코 찌르는 법이 없다. 그리고 물속에서는 어떤 힘도 자기가 가진 모든 권력을 상대에게 퍼부을 수 없다. 물속에 있을 때, 속도는 저항을 받아 더욱 느려지고, 그만큼 힘은 감소한다. 결코 가진 힘 그대로 상대를 다치게 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물속에 있을 때, 사희는 깊은 평화를 느꼈다.

언제부터 물속에 있는 것이 편안해지기 시작했을까? 생각해 보면 사희는, 어릴 때엔 수영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좋아했으나,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 아빠 때문이다.

문득 잊고 있던 어린 날의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그때가 언제였을까. 아마 한 열한 살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사희는 두 손으로 팔을 단단히 감싸 안고서 현관 밖에 서 있다. 어김없이 오늘도 팬티 한 장만 달랑 입혀진 채로 집에서 쫓겨 나왔다. 오후에 있던 수영 연습을 펑크 낸 것이 이 고통스러운 형벌의 이유다.

학교에서 수영부 아이들을 지도하는 아빠는 사희가 수영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희가 또래에 비해 체격도 좋고, 끈기도 남다른 편이니 잘만 육성하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이다. 그래서 사희에게 유독 무리한 훈련을 강행하고 있었는데 정작 사희는 그 고된 훈련을 견디기 힘들었다.

수영을 좋아했고,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 좋은 것에 아빠가 끼어들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되고 만다. 어떤 것이든 그랬다. 아빠와 연관되면 모든 것이 다 고통이었다. 사희가 도망칠수록 아빠는 더욱더 강하게 훈육했다. 그 집착은 재작년, 부인과 이혼을 한 뒤로 더욱더 심해지고 있었다.

문 안쪽에서 악을 지르는 아빠의 고함과 함께 무언가 요란하게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났다. 고함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이 섞여 있다. 사희의 만취한 아빠는 저렇게 몇 분간 소동을 부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곯아떨어질 것이다.

무슨 일이 났나 싶어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 이웃집 여자가 알몸으로 쫓겨난 사희를 보고 혀를 끌끌 찬다.

“얘, 너희 아빠 또 술 마셨니?”

“…….”

“학교 선생이라는 사람이 몰지각하게 다 큰 딸을 홀딱 벗겨가지고 내쫓기나 하고. 쯧쯧쯧. 사희야. 조용히 좀 살자. 조용히. 어떻게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니. 너희는?”

“엄마, 뭐야? 사희 누나 또 빨가벗었어?”

이웃집 아들 녀석이 맨발로 뛰어나와 사희를 보더니 킬킬거리며 웃는다.

사희는 가슴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몸을 한껏 더 웅크렸다. 이제 막 멍울이 잡히기 시작한 젖가슴은 이럴 때면 정말 거추장스럽게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이것이 나오고부터, 옷을 벗겨 내쫓는 아빠의 형벌이 더욱 잔인하게 느껴졌다.

“들어가, 들어가! 아휴. 진짜 내가 이사를 가던지 해야지. 이웃이 아니라 웬수야. 아주.”

여인은 짜증 섞인 말을 흘리곤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린다. 부서질 듯한 현관문 소리와 함께 사희의 눈망울에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신발도 신지 못한 발등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동시에 내내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하늘에서도 굵은 빗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음을 삼킬 것처럼 무섭게 쏟아진다. 아파트 여기저기에서 알루미늄 샷시 창을 닫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은 비에 묻힌 듯 고요해졌다. 복도식 아파트의 창틀로 떨어진 빗방울은, 그 틈의 먼지와 섞여 사희의 종아리에 튄다. 시커먼 물방울이 튄 팔과 다리에는 붉고 푸른 멍이 마치 짐승의 무늬처럼 선명하게 물들어 있다.

그때, 문 안쪽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리더니 빼꼼 문이 열렸다.

“사희야, 아빠 잠들었어. 이제 얼른 들어와.”

열린 문으로 고개를 내민 강희가 복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희를 부른다. 강희의 코 밑에는 코피 자국이 옅게 말라붙어 있다. 사희의 멱살을 잡고 흔들던 아빠를 말리려다 팔꿈치에 얻어맞은 흔적이었다.

“싫어, 안 들어가!”

“고집 피우지 말구. 그러다 감기 걸려.”

“난 잘못한 거 없어!”

사희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강희는 씨근덕거리는 사희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문밖으로 나와 그 곁에 섰다.

“알아. 너 잘못한 거 없어.”

강아지같이 큰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며 강희는 조용히 뇌까렸다. 하나 곧.

“그래도 잘못했다고 해야 돼.”

“싫어! 내가 왜?”

“그래야 안 맞지. 꼭 그렇게 대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이게 뭐야. 온몸이 다 멍이고. 수영복 입으면 다 보일 텐데. 애들이 놀리면 어떡하려고.”

“나 수영 안 할 거야.”

“그런 소리 하지 마. 네가 제일 잘하는 건데 그걸 왜 그만 둬.”

강희가 말간 눈으로 사희를 바라본다. 사희는 착한 눈으로 저를 보는 언니를 매섭게 쏘아보다가 팩하니 고개를 돌렸다. 습기 먹은 바람이 불어 들어와 몸을 차갑게 감는다. 추웠다.

강희는, 필사적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는 동생을 오래도록 주시하다 자신이 입고 있던 낡은 티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들쳐진 러닝셔츠 틈으로 깡마른 갈빗대가 보였다. 강희의 가슴팍은 사희와는 달리 사내아이처럼 납작했다. 자그마한 브래지어가 존재의 이유도 없이 헐거워 보였다. 강희가 사희 앞으로 티셔츠를 내민다.

“이거 입어.”

“싫어. 너나 입어!”

“난 가릴 것도 없잖아.”

배시시 웃는 강희를 노려본 사희는 언니가 내민 티셔츠를 바닥으로 내팽개친다.

“너 때문에 그래. 네가 비위를 다 맞춰주니까. 그러니까 날이 갈수록 더 하는 거잖아!”

“그럼 어떡해. 안 그럼 더 혼나는데. 싫어, 나는 그런 거. 잘못했다고 하고, 안 혼나는 게 더 좋아.”

“너는 억울하지도 않아? 우리가 뭘 잘못했어? 엄마가 집 나간 게 우리 때문이야?”

“너무 그러지 마. 아빠는……. 너무 외로워서 그런 거야.”

“이 병신 같은 게!”

이를 악물고 욕을 내뱉는 사희 앞으로 강희가 한 걸음 다가온다. 그리곤 가시처럼 마른 팔로 사희를 꽉 끌어안았다.

“이거 놔! 나는 아빠보다 네가 더 싫어! 그렇게 해서 예쁨 받으니까 좋냐? 너 때문에 아빠가 날 더 미워하는 거야. 너 때문에!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너는 수영도 못하잖아! 내가 너보다 훨씬 더 잘하는데!”

사희는 발버둥을 치며 강희를 떨쳐내려 했다. 하나 아무리 밀어내 보아도 소용이 없다. 나무젓가락처럼 마른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강희는 사희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사희의 봉긋한 가슴과 강희의 마른 가슴이 틈 없이 붙는다. 쿵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그래, 사희야. 너는 수영을 잘하니까 포기하면 안 돼. 계속해야 돼. 알겠지?”

언니는 항상 그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뒤로도 수많은 고비가 있었음에도 그때마다 사희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저를 설득하는 언니의 말 때문이었다.

언니, 수영은 어쩌면 언니가 더 잘했을지도 몰라. 수영을 잘하려면 온몸에 힘을 빼야만 하거든. 그래야 물에 뜰 수 있어. 언제나 빳빳하게 힘을 주고 살았던 나보다, 순응하듯 힘을 버리고 살았던 언니가 나보다 훨씬 더 가벼웠을 텐데.

언니, 왜 그랬어.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다 참아놓고 이제 와 대체 무얼 참을 수가 없었던 거야. 나한테는 그렇게 참으라고 해놓고, 언니는 왜…….

‘언니, 나 너무 힘들어.’

뜨거운 눈물이 고인다. 눈물을 감은 눈꺼풀 틈을 비집고 나와, 눈초리를 타고 흘러 소독약 냄새가 나는 수영장 물속으로 사라진다.

다행히 물속에서는 아무리 울어도 들키지 않는다. 실은 그게 사희가 물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수영장 벽에 발이 닿자, 사희는 힘껏 발을 굴렀다. 유연하게 허리를 꺾어 몸을 뒤집은 뒤, 숨이 터질 때까지 잠영했다. 마침내 더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수면으로 솟구쳐 오른 사희는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반환점을 돌 때까지는 한 번도 숨을 쉬지 않을 셈이다.

1, 2, 3, 4, 5, 6…….

사희는 마음속으로 신중하게 카운팅을 하기 시작했다. 반환점을 돌아 다시 출발점까지. 58.99초, 이사희가 세운 처음이자 마지막 신기록을 깨고 싶다고 생각했다.

59초에서 딱 0.1초 빨라서 100미터 58초대 선수가 된 이사희. 누구보다 아버지를 무서워했으면서도 나는 이강희, 너처럼 병신같이 쫄지 않는다고 소리쳤던 이사희. 아픈 언니를 원망하는 비겁하고 비겁한 이사희. 언니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라 죽었을, 모래 같은 이사희. 58.99초의 기록을 깨면 그런 이사희도 깨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풀의 절반도 채 지나지 못했을 때, 어깨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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