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뭐야, 갑자기 공룡 같은 소리를 내고 그래.”
눈물까지 글썽해져서 웃던 정아가 눈가를 훔쳐내며 사희의 팔을 툭 친다.
“그러게 왜 자꾸 저를 자극하세요.”
“나는 저 이쁘다는 소리에 그렇게 크게 구역질하는 여자 첨 봤다. 너 진짜 보기 드문 또라이인 거 알아?”
“네, 저 또라이에요. 그런데 그런 또라이 좋다고 하시는 선생님도 그다지 정상은 아니신 듯합니다.”
“내가 원래 예쁘고 잘생긴 또라이들을 좋아해.”
그때 정아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에 뜬 전화번호를 확인한 정아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또라이한테 전화 왔다.”
전화를 받기 무섭게 정아는 멀쩡했던 혀를 반 토막 낸 소리를 내더니, ‘자기야’로 시작해 ‘자기야’로 끝나는 민망한 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자친구인 모양이었다. 만면에 드러난 화색이 그녀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정아는 반 토막 났던 혀를 원래의 길이로 되돌리더니 싱글싱글 웃는다.
“남친. 나 데리러 온다구.”
“얼른 가보세요, 그럼.”
“사희 쌤. 어쩔 거야? 정말 혼자 갈 수 있겠어?”
“그럼요. 저 멀쩡해요.”
사희는 풀린 눈으로 대답하곤 피식 웃는다. 한데 한번 시작된 웃음은 그치지 않고 계속 새어 나왔다. 꽁꽁 봉인해 놓았던 웃음이 술김에 풀려버린 것이다. 이래서 술을 마시지 않으려는 건데. 사희는 자꾸 실실거리는 입술을 제 손으로 꾹 누르며 웃음을 막아내려 노력했다.
“이 여자 취했네. 안 되겠다. 내가 남자친구한테 사희 쌤 집까지 데려다주자고 할 테니까…….”
사희는 전화를 드는 정아의 손을 만류했다. 내가 싸가지 없다는 소리는 좀 들어도 눈치는 넘치는 사람이거든요. 커플 사이에 끼어서 불청객 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아이고, 됐습니다. 어서 최애 또라이한테나 가보세요. 기다리실 텐데.”
“정말 괜찮아?”
“걱정 마시라니까요.”
“알겠어, 그럼. 잘 들어가! 풀에서 보자. 알고 보면 진짜 귀여운 우리 얼짱.”
정아가 사희의 턱밑을 간질이곤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달려가는 정아의 뒷모습이 설레 보인다. 그 벅차 보이는 등을 바라보면서 사희는 조금은 그녀가 간질이고 간 턱을 북북 문질렀다.
‘저렇게나 좋은가.’
사희는 심드렁하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술도 깰 겸 좀 걷기로 한다. 백팩의 어깨끈을 양손으로 붙들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희의 곁으로 삼삼오오 짝을 지은 회식 무리와, 찰싹 달라붙어 과도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젊은 연인들이 쉼 없이 지나쳐갔다. 하하호호, 하는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사희는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 커플들을 보며 늙은이처럼 중얼거린다. 인생은 멀리에서 보면 희극이라더니 정말이지 이 길 위에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행복해 보였다. 조금의 슬픔도, 고뇌도, 걱정도 없어 보였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 사이를 홀로 걸으며 사희는 크게 한숨을 내뱉는다.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기에 비극뿐인 인생을 희극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잘 모르겠다. 다만 이것 하나는 알겠다. 인생이 이토록 비극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니 나는 확실히 사랑을 하지도, 받지도 못하는 게 맞구나. 문득 울적해졌다.
‘아, 이래서 함부로 술을 마시면 안 돼. 약해지니까.’
도시의 밤은 운무가 낀 듯 부옇게 흐렸다. 여름이 오려면 아직도 한참인데도 날이 후텁지근했다. 미세먼지가 섞인 공기 탓일까. 아니면 섞어 마신 술 탓일까. 걸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명치께가 갑갑한 것이 영 컨디션이 좋지 않다.
“더워.”
사희는 갑갑하게 동여매 있던 셔츠의 깃을 살짝 들춰 바람을 일으킨다. 어서 집으로 가서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바쁘게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간 사희는 정류장 광고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노바 피트니스센터 광고였다. 피트니스센터와, 필라테스 스튜디오, 골프장 사진과 함께 익숙한 풀장의 모습이 사희의 시야에 들어온다. 사희는 광고판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든다. 멀지 않은 곳에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고층의 쇼핑센터가 보인다.
문득 저 건물에 있을 수영장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시리도록 희고, 푸른 조명, 특유의 소독제 향기, 귓바퀴에 찰랑찰랑하게 부딪히는 물소리, 그리고 지금 이 터질 것 같은 열감을 식혀줄 서늘한 수온까지.
버스가 도착하려면 앞으로 12분이 더 걸린다는 알림 앞에서 몇 번이나 생각을 곱씹던 사희가 마침내 크게 숨을 들이켜며 돌아섰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뛰기 시작한다.
***
폐점한 노바는 마치 거대한 원시시대 동물의 화석 같다. 휘황찬란한 조명이 꺼지고, 최소한의 불만 밝힌 건물은 숨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낮 동안 수만 명이 밟고 지났을 복도를 홀로 걸으며 동하는 앞으로 이곳에서 펼쳐질 전쟁 같을 날들을 잠시 상상했다.
그가 상대할 세력은 막대할 것이고, 또한 흉포할 것이다. 상상 이상으로 잔인하고 차가울 수도 있다. 그 앞에서 동하는 쉴 새 없이 무너질 것이고, 어쩌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었든 지금처럼 고요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한국 땅을 밟은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동하의 거취가 결정되었다. 혜석유통 상무이사 선임과 동시에 노바쇼핑몰사업부문 경영 전권을 관리하는 기획본부의 책임자.
“내 자식 중에 반쪽은 없어. 그게 내가 너를 부른 이유다.”
그 말에 증거라도 주듯. 순식간에 모든 것이 빠르게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밀폐된 건물 안의 공기가 답답하다. 신선한 공기를 쐴까 해 건물 옥상에 난 공중정원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왔어도 밤공기가 영 시원찮다. 미세먼지 낀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아 답답한 기분만 가중될 뿐이었다.
“하아.”
한숨이 끓었다.
정원을 나와 승강기에 오른다. 지하주차장 버튼을 누르려던 긴 손가락 끝이 수영장 표시가 있는 피트니스센터 층에서 멈칫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승강이 문이 닫혔다. 적막한 직사각형 큐브 속 난간에 몸을 기대고, 동하는 잠시 서 있었다.
「노바에서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이재민의 특별 강습이 있어요. 이 강습에 차세령이 늘 동행한대요.」
보고를 하며 동하의 안색을 살피던 수찬의 눈빛을 기억한다. 수찬의 눈빛에는 ‘아직도 잊지 못했습니까?’라는 질문이 선명하게 담겨있었다.
‘잊지 못했는가?’ 동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잊기 위해 떠났으니까. 그리고 잊기 위해 모든 것을 했다.
하루를 일 년 같이 그저 치열하게 살았다. 검은 머리카락의 동양인이 백인 프라인드가 만연한 보수적인 대학에서 교수 타이틀을 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치열했던 시간 덕이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그러다 보니 나중엔 일부러 애쓰지 않는 한 떠오르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일부러 애써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뇌의 일부분을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세령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이 편집된 필름처럼 아득하기까지 했다.
‘잊었다.’
동하는 스스로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저 세령이 자신의 인생에서 완벽한 타인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싶을 것뿐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그 날, 풀에서 세령을 본 순간 동하의 확신은 산산조각 났다. 심지어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도 아니었다. 아들을 향해 앉아있는 세령의 실루엣을 먼발치에서 얼핏 보았을 뿐이었다.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얼굴이, 그녀와의 추억이, 그녀의 음성, 향기, 체온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살아나 거미줄처럼 엉키더니 목덜미에 들러붙어 숨통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잊지 못했다. 따듯하고 애련했던 사랑의 감정이, 지독하고 처절한 애증의 감정으로 색깔만 바뀌었을 뿐. 어쩌면 헤어지던 그때보다 그는 더 강렬하게 그녀를 기억해 내고 있다.
풀장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동하는 푸르스름한 물결을 한참 바라보았다.
“살고 싶었어요. 그게 죄는 아니잖아요.”
깊은 물을 바라보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목소리가 오늘도 어김없이 동하의 귓가를 맴돈다. 동하로 하여금 세령을 향해 맹목적으로 뛰어들게 만들었던 말이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몰랐던 그에게, 살고 싶었을 뿐이라는 그녀의 말은 숙명 같았다. 그녀를 살게 하는 것이 자신이 사는 이유였다.
“살고 싶었어. 그게 죄는 아니잖아.”
그러나 그 말은 끝내 그녀가 동하를 떠나는 이유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를 살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었다. 그녀를 잃고, 동하는 다시금 삶의 목적을 잃었다. 살아도 죽은 날들이었다.
허황된 생각에 빠져있던 동하는 문득 물 근처에 어른거리는 인영을 느꼈다. 동하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몸을 조금 앞으로 숙여 통유리 밖으로 시선을 모은다.
누군가 풀 안에 있었다. 폐장한 풀장에 숨어든 침입자는 그 와중에 당당하게 몸까지 풀고 있다.
“음?”
동하가 짙은 눈썹을 살짝 치뜬다.
구면이다. 지난번, 풀에서 만났던 그 수영강사였다.
을이니 뭐니 꽤 재미있는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말로는 자기가 을이라 불리하다 해놓고, 정작 조목조목 망설임도 없이 따져대던 맹랑한 얼굴과 목소리가 선명하게 기억났다.
처음 봤을 때부터 워낙 인상 깊었다. 뭇 남자들이 수작 한번 부려보고 싶음 직한 예쁘장한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유순해 보이는 생김새와 상반되는 뾰족함. 예의는 갖추지만 그 태도에 한 점의 비굴함이 없던 그녀의 당당한 태도가 그의 가슴에 깊이 각인 되어있다.
마치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저보다 곱절은 큰 동물에게도 겁 없이 덤벼드는, 철없는 어린 짐승을 보는 기분이랄까. 심기에 거슬리지만, 불편하지는 않고, 맹랑하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동하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사희…라고 했던가……?”